무림맹 외원의 서 연무장.
평시라면 각기 자유롭게 단련할 무인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서 연무장에 모인 이는 소위 소호단(少虎團)으로 불리우는 무림맹 하급 무사 단체인 12무단 중, 5무단부터 8무단까지의 단원이었다.
"이 형, 무슨 일일까요?"
"글쎄다. 총 소집령이라니."
미색의 무복에 미색 피풍의, 허리에는 다같이 3척 2촌 길이의 소호검을 비끄러맨 무인 600명이 모여 선 것은 제법 장관이었다. 다만 150명씩 각자 다른 빛의 머리띠를 두른 정도가 다르게 보였다.
연무장 앞쪽으로 작은 단이 세워지고, 한 사내가 그 위로 올라섰다. 당난영의 눈에 비친 사내의 얼굴은 뜻밖에도 아는 얼굴이었다.
으득.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무림맹에 온 첫날, 저를 붙들고 앉아 몸 여기저기를 주물러대던 파렴치한이었다.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소호단 여러분, 반갑네. 이 몸은 무림맹 부군사 장상진(蔣常進)이라고 한다. 느닷없는 총 소집령에 적잖이 놀랐을테지?"
여전히 뱀 같은 웃음을 띤 입매가 비웃는 듯 보였다.
"무림맹 부군사면 제법 높은 사람 아니야?"
"그런 것치곤 좀 젊지 않나."
"그런데, 남자 맞아?"
술렁임이 일었다.
"다름이 아니고, 최근 마교가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지. 아마 장안 인근에서 왔다면, 사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는 자도 있을 듯한데."
스스로를 부군사라 소개한 장상진의 말은, 장내를 조용히 만들기 충분했다.
"해서 소호단 12개 단중, 3개 무단을 소식이 날아온 곳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저쪽의 규모도 알 수 없고, 어느 정도의 무력을 지녔는지도 모르겠지만, 3개 무단 450명 정도면 모자라지는 않겠지."
사전에 이야기가 있었는지, 장상진이 손짓을 하자 각 무단의 단장이 단상에 올랐다. 제비뽑기로 정하려는 모양이었다.
"8무단이 당첨이로군. 그럼 영석(永夕)대사,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마도를 벌하는 것 역시 부처님의 뜻이겠지요."
* * *
다음 날, 제비뽑기로 뽑힌 2무단, 8무단, 9무단이 각기 다른 길을 따라 장안으로 향했다. 그 중 당난영이 속한 8무단은 일종의 선발대로, 장안까지는 말을 타고 관도로 이동하기로 예정되었다.
"이 형, 그러고보니 못 보던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고보니 그렇네. 누구지?"
8무단 일행의 선두에는 세 사람이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단장인 영석선사 외에, 뜻밖에도 동행한 부군사 장상진과 처음 보는 중년 사내였다.
"저 분은, 무영검(無影劍) 모용효명 대협(慕容曉明)이시다. 월영단(月影團)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조장, 월영단요?"
"이름 그대로 달 그림자처럼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정예 단체다. 나도 숙부님께 들은 적만 있는 곳이야."
"그렇군요."
하급무사라고는 하여도, 명색이 무림맹의 정식 무사가 400명 넘게 행동한다. 그런데 거기에 비밀스러운 정예 단체의 대원이 굳이 동행하다니. 예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난영은 조금 불안해졌다.
"이 형, 어쩌면 우리 몸 조심해얄지도 모르겠어요."
"응? 어째서? 저 정도의 고수가 있다면 우리는 반대로 안전해지는거 아냐?"
"반대로, 그런 고수에 무려 부군사가 동행해야 할만큼 위험할 수도 있는 거예요."
"아, 음. 그러네."
하지만 여로에는, 그녀가 느낀 불안감이 무색할만치 별다른 위협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소란거리가 있어 일행이 심심함을 느끼지는 않게 해 주었다.
소란의 근원은 당난영의 예상대로 팽준호였다. 풍월루에서 벌어진 일전의 그녀를 둘러싸고 발생한 사건 때문인지, 팽준호는 공연히 제 발이 저려, 부러 행렬의 후미에서 말을 몰며 장상진을 슬금슬금 피했다.
하지만 장상진도 그리 마음이 넓은 위인은 아니었던지 그런 팽준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첫 소란은 일행의 첫 식사시간에 벌어졌다. 장상진은 굳이, 다른 단장이나 조장과 함께하는 대신에 일반 단원들의 틈바구니에 거구를 구겨 넣은 팽준호를 찾아 바로 옆에 앉았더랬다.
"오래간만입니다, 팽가의 역산도 소협?"
"하하... 안녕하십니까, 부군사."
"후후, 오늘은 화내지 않으시네요?"
팽준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돌려 애써 못본 척 했다.
이런 식으로 식사를 하거나 쉴 때면 어김없이 장상진은 팽준호를 찾아와 말을 붙였다. 그때마다 한껏 표정을 굳히며 애써 피하고 도망치려 드는 그는 이 일행에 소소한 소란을 불러일으켰다.
본디 가까이 지내던 남궁익이나 팽준호 산하의 조원은 이 모습이 우스웠던지 그때마다 낄낄대고는 했다.
"아이고, 조장. 큽, 매번 그렇게 얼굴 찌푸리면 우리도 불편해 못 쉽니다. 저리 가요, 저리."
어느 조원은 웃음기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에게 이리 말하였다. 장안에 거의 다 도착하여서는 결국 팽준호도 체념하고서 부군사, 무영검, 단장, 조장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식사하거나 쉬고는 했다.
그리고 매번 어김없이 먹은 것이 얹힌 얼굴을 하고서 거구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관도를 따라간다고는 하여도 낙양에서 장안까지는 천리길, 게다가 도착하고는 어떤 상황일지 모르니 체력을 보전하면서 가야 했다. 노숙을 피하고 중간 중간 말을 바꿔가면서 길을 달렸다.
나흘째 되는 날, 8무단 일행은 장안에 입성했다. 마교도의 출몰에 대한 소문은 이미 장안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어 어렵잖게 통과할 수 있었다.
"모두들 말 달리느라 고생했소이다. 내일부터는 마교도를 수색할 것이라 산속에서 헤매야 하니 푹 쉬시오."
영석의 말이 떨어지자 너나할 것 없이 객잔으로 몰려들었다.
다음날, 8무단의 무인들은 미색 무복에 미색 피풍의인 단복을 갖추고 조별로 나누어 장안성을 나섰다. 각 조 30여명씩 5개 조, 총 150여명의 무인들이 모조리 같은 옷에 똑같이 흰 머리띠를 맨 모습은 알 수 없는 엄숙함마저 느껴졌다.
* * *
"아이고, 삭신이야."
"조금만 더 움직여요, 이 형. 덩치는 그렇게 커다라면서 너무 금방 나가떨어지는거 아니에요?"
"내가 뭐가 커다래. 예랑이 네놈보다 덩치 작은 사내가 드물 게다. 아무튼 좀 쉬자."
이명걸은 꽤나 지쳐보였다. 벌써 꼬박 이틀 밤낮을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한 채 산 속을 헤매고 다녔으니 당연할 터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 곁의 당난영은 멀쩡했다. 곱고 여린 흰 살갗은 때가 좀 앉아 얼룩덜룩한 것이 영 꾀죄죄했다. 하지만 동그란 눈망울은 지친 기색 없이 힘이 깃들었다.
"와... 진짜 평소에 고기도 안 먹는 놈이 무슨 체력이 이렇게 좋냐?"
"나와서는 고기를 먹으니까 힘이 나나 보지요."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허리띠에 매단 주머니를 톡톡 쳤다. 산 속에서는 제대로 된 음식을 챙겨먹기 어려운지라, 다들 장안성을 떠나면서 식량을 충분히 챙겼다. 단지 그 식량이라는 것이, 바싹 마른 육포며 쪄서 말린 쌀이나 말린 떡, 찐빵 등속의 그야말로 연료에 가까운 것뿐인지라 그 역시 무인들의 힘을 빼놓았다.
"너는 그, 아휴, 육포 부스러기가 고기라고 그러냐."
이명걸은 황당하다는 듯 그녀의 말을 일축했다.
"이 형, 다 쉬었으면 갑시다."
"어이구, 지독한 녀석."
재차 그녀가 재촉하자 이명걸은 못 이기겠다는 듯 밍기적대며 일어섰다.
"그나저나 흔적이라고 하는데, 뭘 찾으라는 걸까?"
"글쎄요. 뭐 마교도라고 특별히 발자국이 다른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우리도 안 피우는 불을 그놈들이라고 피울 리 만무하겠지."
통상적으로 사람이 머문 자리에는 그 흔적이 마련이다. 앉아서 눌린 풀, 흙에 남은 발자국, 부딪쳐 부러진 나무의 잔가지 같은 것들. 혹은 불을 피운 흔적. 이들은 그런 것들을 찾아 산을 헤맸다.
"이 형, 마기(魔氣)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요?"
"응? 어어, 그 마교 놈들이면 풍긴다는 그거?"
"네에. 그거, 마기가 없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공포같은 걸 느낀다나 봐요."
"공포? 우리가 살기를 느끼듯이?"
"아뇨, 좀 달라요.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풍기는 그런, 그러니까 조금 달라요. 공기가 차가워지면서 묵직하게 가라앉고, 그 가라앉은 공기가 묘하게 피부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오, 신기하네. 그런데 너, 묘하게 잘 안다?"
"네? 어, 음. 하하, 스승님께 들었어요."
태평스레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명걸과 달리, 당난영은 이미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더 뛰어난 내력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기감은 이명걸의 그것보다 범위도 훨씬 넓고 예리했다. 그 거미줄처럼 뻗은 감각에 마기 한 자락이 걸렸다.
바로 맞부딪을 거리는 아니나, 이미 그 무거운 기운이 살갗에 들러붙어 저를 위협하는 느낌이었다. 마교에서 성장했고, 한동안 그곳에 몸담았기에 마기는 익숙했다. 하지만 그녀가 있던 마화각(魔花閣) 같은 하급 단체의 이들이 풍기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훨씬 더 묵직하고 진득하게, 마치 목을 죄는 그런 감각.
익숙해서 더 강하게 다가온 공포는 하지 않는 쪽이 좋았을 말을 그녀의 입 밖으로 밀어냈다.
"아, 으. 어, 이 형, 저쪽으로 가 볼까요?"
그녀는 마기가 느껴진 방향에 약간 빗겨난 쪽을 가리켰다.
"그래, 그러지. 그런데 너 왜 말을 더듬어? 어디 아프냐?"
"아뇨, 괜찮습니다. 그저."
이명걸은 태평스러운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다 말고서는, 말을 하던 당난영의 입을 틀어막았다.
가까이 붙자 달큰한 체향이 훅 끼쳐와 이명걸의 코끝을 간질였다. 하지만 그는 그 간질간질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당난영을 붙들고 몸을 낮췄다.
"혹시, 그 마기란 거, 지금 이거야?'
한껏 낮춘 목소리가 공포감으로 바들바들 떨었다. 당난영은 그 목소리가 전한 말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 신호탄. 발견하면 신호탄을 쏘라고, 단장님이."
"아니, 잠깐만요. 안 돼요."
그녀는 이명걸의 허둥대는 손짓을 다급하게 막았다.
"쉬이, 너무 가까워요.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들어 줄래요?"
그녀는 제 검지를 입술 위에 대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이명걸의 손에 들린 신호탄을 빼앗아들었다.
"너무 가까워서, 지금 쏘면 들킬지도 몰라요."
신호탄을 마기가 잡힌 방향으로 약간 기울여 나무에 비끄러맸다.
"저쪽으로, 좀 멀어지지요. 제가 이 형보다 발이 빠르니까 먼저 몸을 빼세요."
당난영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뒷걸음질치는 이명걸을 못 본 체 하고서 허리춤의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에 넣어뒀을 부싯돌을 찾느라 섬세한 손이 부산스레 움직였다. 탁 탁. 어렵사리 찾은 부싯돌로 도화선 끝에 간신히 불을 붙인 그녀의 목에 싸늘한 물건이 느껴졌다.
"흡."
목덜미에 느껴지는 예리하게 벼린 물건의 싸늘한 촉감. 그것으로도 모자라 당장이라도 제 목을 비틀어버릴 듯 섬뜩하기 짝이 없는 살기. 게다가 전신이 저릿거릴만큼 진득하게 달라붙는 불길한 기운.
찰나가 백년 같다.
"이런 곳에, 쥐새끼가 숨어 있었나."
녹슨 철판을 득득 긁어내듯 거북살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찌르듯 들려왔다.
그 때, 순식간에 타버린 도화선 끝으로, 신호탄이 하늘 높이 붉은 불꽃을 쏘아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