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탄?"
폭음과 함께 푸른 하늘 높이 빨간 불꽃이 수놓였다. 불꽃 아래로 붉은 연기가 길게 꼬리를 늘어뜨렸다.
"무슨 손장난을 하나 했더니, 패거리를 부를 셈이었나보군."
연기의 궤적을 눈으로 좇느라, 당난영의 등 뒤에 선 사내의 주의가 흐트러졌다. 그 잠깐 사이, 단숨에 거리를 좁힌 이명걸이 사내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신호탄보다는 이쪽을 좀 신경써주지 그래."
"쥐새끼가 둘이었나."
"그래그래, 쥐새끼끼리는 도와야 하지 않겠어? 우선 그 칼부터 내려놔."
"쯧."
사내가 쥔 장검을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금속과 흙이 맞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당난영은 사내에게서 멀어져 이명걸 쪽으로 갔다.
"이 형, 덕분에 살았어요."
그녀는 검을 뽑아들었고 이명걸과 함께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 크지 않은 체격의 사내는 몸에 딱 맞는 시커먼 무복에다 같은 색의 복면을 뒤집어써 한눈에 보기에도 수상해보였다. 하지만 그 평범해보이는 무복의 옷깃에 은사로 수놓은 자그마한 별모양. 눈에 익은 그것은 다름아닌 마교도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붉은색의 매화. 당난영은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
홀로 2명과 대치하는 상황이었지만 이 흑의인은 꽤나 여유가 있어보였다. 두 사람이 칼을 겨눈 채 이리저리 몰아 자신의 칼은 저 멀리 있는데다 저 자신은 빈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상대는 오히려 기세를 끌어올리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가까이 닿은 마기의 농도가 점점 짙어졌다. 땅거미가 내릴 때의 어둠처럼 짙어진 마기가 공기를 잠식했다. 늪처럼 숨을 조여오는 감각이 소름끼쳤다.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뜻이리라.
당난영과 이명걸은 한 차례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차피 눈앞의 저 마교도는 두 사람보다 높은 경지를 이뤘음이 틀림없는 실력자고, 그런 상대로부터 도망치기는 불가능했다. 차라리 둘이서 협공하며 시간을 끌어, 다른 이들이 도달하기를 기다리는 쪽이 나았다.
두 사람 역시 자세를 잡으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무용한 짓을 하는구나."
명명백백 비웃음이 섞인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말꼬리를 붙들고 당난영의 검이 날아들었다.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날카롭게 벼린 강철검과 인간의 살덩이가 충돌할 때 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녀의 검격을 막아 낸 흑의인의 손이 형형히 빛났다.
"이 형!"
이명걸이 흑의인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는 당난영의 검을 놓으면서 몸을 비틀어 이명걸의 공격을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피했다.
당난영과 이명걸은 자주 대련을 했고 또 그래서 서로의 검에 대해 제법 잘 알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호흡은 척척 맞아떨어져 서로의 빈틈을 잘 메웠다. 덕분에 명백하게 실력 차이가 나는 흑의인을 상대하면서도 밀리지 않고 균형을 유지했다. 아니, 오히려 당난영의 언뜻 가볍게 보이는 공격이 절묘하게 빈틈을 파고들어 생채기를 남겨댔다.
"마기가..."
당난영이 무심결에 뱉은 탄식. 마기의 농도가 점점 짙어졌다. 공기가 전신을 묵직하게 옥죄는 느낌. 눈앞의 이가 뿜어대는 것이 아니다. 방금 전에 느꼈던 공포감이 이쪽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예서 더 시간을 끌어봐야 불리해지기만 한다.
당난영은 호흡을 고르고 칼날에 내력을 집중했다. 이명걸은 그녀의 기도가 바뀐 것을 눈치채자, 그녀가 집중할 수 있게끔 거들었다. 몸을 바삐 움직여 당난영의 쪽으로 향하는 공격을 막아냈다.
"흐읍..."
흑의인은 권술의 단점인 짧은 간격을 메우기 위해 빠른 몸놀림으로 파고들어 그야말로 눈이 휙휙 돌아가게 공격을 가했다. 강맹한 기세가 실린 주먹을 막는 이명걸의 상태는 썩 좋지 못하였다. 사람이 맨주먹으로 칼날을 때려대는데 오히려 이쪽에서 상대의 힘에 밀리는 꼬락서니였다. 칼날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에 손바닥이 아릿했다. 상대의 내공이 실린 권격을 막노라니 뱃속에서부터 울컥 뜨끈한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때, 등 뒤의 기세가 바뀌었다.
당난영이 양손으로 검을 쥐고서 흑의인의 목을 향해 찔러들어왔다. 하지만 흑의인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찌르기를 맞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쪽으로 일 장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매서운 공격을 막으려고도, 피하려고도 시도하지 않았다. 순간, 3척이 넘는 장검의 칼날이 뱀처럼 꾸물대는 것처럼 보였다. 당난영은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장력을 흘리며 칼날이 흑의인의 팔을 타넘어 그 근원을 깊게 찔렀다.
"큭! 쥐새끼가!"
그 긴 칼날이 오른쪽 어깨를 꿰뚫었다. 흑의인의 등 뒤편으로 비스듬하게 삐져나온 칼날의 길이만 1척은 족히 넘어보였다. 당난영은 그대로 검을 비틀어 뽑아내면서 뒤쪽으로 훌쩍 뛰었다.
"어때? 더 해보겠어?"
"후... 주제에 제법이구나."
흑의인은 비척비척 뒷걸음질쳤다. 어깨에 너덜너덜하게 바람구멍이 뚫린 오른손은 축 늘어져 인형의 그것처럼 보였다.
"이 형, 지금이에요."
당난영은 이명걸에게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두 사람은 왼팔로 어깨의 혈도를 눌러 지혈하는 흑의인을 뒤로 하고 가능한 빠르게 경공술을 전개했다.
하지만 둘은 그리 멀리 가지 못하였다. 눈앞에 또다른 흑의인이 내려앉았다.
신장이 일곱 척은 족히 되어보였다. 성별을 짐작하기 어려운 가느다란 몸은 새카만 천으로 둘둘 감았음에도 묘하게 우아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오른손에는 언뜻 가녀린 팔다리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거도(巨刀)를 쥔 채였다. 날카로운 눈만 내놓은 이 새로운 흑의인은 상투를 트는 대신 긴 머리칼을 한 가닥으로 질끈 묶고 붉은색 수실로 매화 한 송이를 수놓을 까만 머리띠를 매었다. 좀 전에 쓰러뜨린 자의 머리띠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었으니, 필시 이 자가 그보다 지위가 높을 터였다.
키만 비죽하게 클 뿐, 몸은 가느다란 무인이었으나, 당난영은 눈 앞의 상대를 마주한 공포로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까 포착했던 차갑고 진득한 기운의 주인은 바로 이 사람이었다.
"도저히 무리, 이 형, 아, 으. 끄, 끝이에요."
"진정해. 예랑, 진정해라."
고운 얼굴이 희게 질려가고 발그레한 입술은 이에 눌려 허옇게 떠서 피를 흘리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덜덜 떨리는 오른손목을 붙들었다. 이명걸도 두렵기는 매한가지였으나 그래도 재차 검을 고쳐쥐었다.
서로 다른 마기가 무수히 공기를 채웠다. 흑의인들이 더 나타났다. 어림잡아도 십수 명은 족히 되어보이는 자에게 포위당한 모양새가 되었다.
공포로 이지러진 마음은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가쁜 호흡은 칼 끝을 떨리게 만들었다. 떨리는 칼끝 때문에 검로마저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당난영은 이명걸과 등을 마주대었다. 군데군데 가늘게 남은 통증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날카롭게 벼린 감각을 날카롭게 일깨웠다.
깊고 묵직한 검격은 내력을 불어넣은 검으로 막고 얕은 공격은 피하거나 비껴 맞았다. 아직 매화 머리띠를 맨 흑의인은 공격에 가세하지 않았다. 신호탄이 터지고서 적잖은 시간이 지났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곧 다른 단원도 모일 것이다.
"컥...!"
등 뒤를 받치던 기세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그녀보다 내력이 달리는 이명걸이 피를 토했다. 내공에 있어 우위인 다수를 상대로 버티느라 속이 온통 뒤틀린 탓이다.
"우웩!"
"이 형!"
시커멓게 죽은 핏덩이를 토해 낸 이명걸은 힘이 빠지는지 비틀거렸다. 휘청이던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장검을 땅에 짚어 간신히 자빠지는 꼬락서니만 면하였다.
"흐윽, 괘, 괜찮아요?
"글쎄다... 흐, 견디, 견딜만은..."
위태위태하게 간신히 서있는 이명걸을 향해 검격이 날아들었다.
"안돼!"
찰나가 한없이 느려지는 것 같은 그 순간에, 철장(鐵杖) 하나가 날아와 검로를 가로막고 땅에 박혔다. 곧이어 한 무승이 나는 듯한 몸놀림으로 이명걸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단장님, 오셨군요!"
그리고 뒤이어 흰 차림의 무인들이 속속 도착했다. 우와 열이 뒤바뀌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한 무리의 흑의인을 일곱 배는 될 법한 백의 무사들이 둘러싸 검을 겨누었다.
당난영은 재빨리 이명걸을 부축해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이 형, 이제 살았어요. 조금만 참아봐요."
간신히 숨을 돌린 그녀는 여전히 나무 위에 고아하게 선 흑의인을 바라보았다. 머리띠에 수놓인 매화가 핏방울같은 궤적을 남긴다. 제법 키가 큰 나무 꼭대기에서 뛰어내렸으나 땅에 발을 디디는 소리조차 남기지 않았다.
어딘가 눈에 익은 몸놀림. 그러나 기억에 남은 이 중 저런 정도로 무시무시한 마기를 흘리는 자는 없었다. 이미 눈앞에는 난전이 벌어졌다. 손을 거들어야 했다. 숨이 좀 가쁘기는 하여도, 아직 기운이 달리지는 않았다.
당난영의 가느다란 신형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쏘아져나갔다.
어느 동료의 뒷덜미를 노린 검격을 막고, 제 목으로 날아오는 칼날을 막았다. 사방에 흩뿌리는 핏방울은 숫제 꽃잎 같았다. 날아드는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반격을 가하려 디딘 발이 질척한 웅덩이를 밟았다. 뜨끈하게 젖어드는 감각과 함께 새빨간 물이 튀어올랐다.
"수준 차이가 너무 나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던 생각이 저도 모르게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이편은 150명 가량, 저편은 많아도 스물이 넘지 않는 머릿수. 분명 숫자만은 압도적으로 많건만, 이 마교도들은 전신에 피를 뒤집어쓰고 악귀처럼 날뛰었다. 그나마 혼자 한 명을 상대하는 이는 단장과 조장, 무영검 정도였다. 장상진 부군사는 어디에 있는지 눈에 띄지도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 칼날이 춤을 추며 다가왔다. 칼날은 희게 빛나는 기운에 감싸여 주변의 공기를 온통 일그러뜨렸다.
이건 막을 수 없다. 몸을 돌려 검격을 흘렸으나, 일렁이는 공기가 왼팔의 옷자락을 찢어놓았다. 날카로운 통증이 목덜미를 타고 올랐다. 회수하는 검을 따라 파고들어 옆구리를 깊게 찔렀다. 낮춘 등과 머리 위로 왈칵 뜨끈한 액체가 쏟아졌다.
"이정도라면."
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저 칼날 뿐 아니라 저 빛나는 불꽃과 불꽃을 따라오는 아지랑이까지 하여 조금 더 간격을 두면 되었다.
이번에는 가슴 언저리를 가로로 깊게 베어드는 칼날. 저 일렁이는 불꽃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훌쩍 뛰어, 폭이 넓은 그 도신의 옆면을 밟고 몸을 튕겼다.
몸을 움직이면서도 머리를 가만 둘 수는 없었다. 당난영 그녀 역시 한때는 마교의 산하 단체인 마화각에 몸을 담았었다. 그곳에서 도망친 배교자 신분이기는 하여도, 그 거대한 힘의 편제는 쉬이 바뀔 수 없으니, 필시 그 머릿속 어딘가에 저들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을 터였다.
저 붉은 매화. 수가 너무 많아 도리어 검이 얽히고 서로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단원들의 급소를 찔러대는 저 붉은 매화. 이미 열 명은 족히 베어넘겼다.
"혈매..."
"혈매대(血梅隊)?"
묘한 울림을 띤 청아한 사내의 목소리. 조금 높기는 하여도 고급 비단처럼 매끄럽게 공기를 울리는 목소리가 곁에서 그녀의 말을 이었다. 장상진 부군사였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그곳에 장상진이 서 있었다. 엷은 분홍색 두루마기는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하고 손에는 희게 빛나는 옥접선(玉摺扇)을 들었다. 어찌나 이 광경과 어울리지 않는지, 절로 실소가 나왔다.
채앵! 잠깐 멍해진 그 새에 찔러들러온 검격을 그 시인의 손에나 어울릴 희디흰 부채가 막아냈다. 비껴 막은 칼날은 부채살을 따라 흘러나가고, 뒤이어 접힌 부채가 칼의 주인을 후려쳐 쓰러뜨렸다. 다시 잘 보니 어깨에 두른 산호색 피풍의에 온통 사람의 피로 새빨갛게 수를 놓았다.
"네, 혈매대요. 이 사람들 옷깃에..."
길고 가느다란 손이 방금 쓰러진 흑의인의 멱살을 쥐어 올렸다. 밤처럼 검은 옷깃에 뜬 별과 그 아래 피어난 피처럼 붉은 매화가 보였다.
"아, 읽은 적 있습니다. 붉은 매화. 분명 혈매대 대원이로군요. 조금 놀라운데요?"
빙그레 말려올라가는 입꼬리가 뱀의 그것처럼 징그럽게 보였다. 분명 사내라기에는 너무도 고운 얼굴에 띤 미소임에도 그녀는 그 웃음이 소름끼쳤다.
"스승님께 들었어요."
당난영은 장상진을 피하기 위해 튀어나갔다. 제 눈앞에 등을 돌리고 선 흑의인을 향해 검을 찔렀다. 어쩐지 가녀리게 보이는 그 등이 휙 돌며 두터운 도신으로 칼끝을 막았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