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사위에 깔린 엷은 어둠 사이로 두 송이의 붉은 매화가 눈앞에 떠올랐다. 옷깃의 매화는 모든 이에게 있는 것이었으나, 머리띠에 핀 저것은.
"제법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새까만 복면 아래 감춰진 입매에, 보이지도 않는 비웃음이 맺혔다.
낭패다. 당난영은 재빨리 검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거리를 조금 벌리자 비로소 목을 얽어매 숨통을 조르던 눅진한 마기의 무게감이 줄어들었다.
매화 머리띠는 거도를 고쳐쥐며 자세를 취했다. 그 길이만도 거의 3척에 육박하는 거도의 도신은 그저 투박한 쇳덩이에 가깝게 보였다. 그러나 날 부분만은 형형한 예기를 뿜었다. 마기가 한층 짙어지자, 도신 주변에 아지랑이가 떠올라 공기가 일렁였다.
당난영은 이를 악물었다. 남은 내력을 헤아려보았다.
"허나,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제법 용감한 놈인가 했는데 그냥 단순한 멍청이였나."
당난영을 평가하듯 위아래로 훑는 눈빛은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그녀는 이를 갈며 상대를 가늠해보았다.
공격이 먹힐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어내면 이쪽이 버티지 못한다.
채앵!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첫 합은 평가전. 아니나다를까 과연 완력이 괴물 같았다. 오른손을 지지하려 거듭 잡은 왼손의 손바닥이 충격을 이기지 못해 터져나갔다. 붉은 피가 뚝뚝 흘러 붉은 강에 물방울을 보태었다.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결코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특기는 검법보다는 경공술에 있었으니, 특기를 십분 활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묵직한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다가온다. 당난영의 가느란 신형을 위아래로 토막낼 듯 강맹한 기세였다. 그녀는 바닥을 박찼다. 붉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공중으로 붕 뜬 몸은 하늘하늘 칼날을 피했다. 무인의 몸놀림이라기보다는, 그저 한 장의 가벼운 천자락이 나풀거리며 날리는 듯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뚱이같지 않은, 무게감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몸짓. 무희의 춤사위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피한 칼날의 옆면을 짚고 공중에서 선회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내려긋는 일검.
상대의 거도는 얄밉게도 그 검로를 정확하게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 도를 쥔 이의 얼굴은 묘한 표정을 띠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의 검격이어서인지 모르나 묵직한 도신에 실린 힘도, 깃든 공력도 종전에 미치지 않았다.
검게 가라앉아 고요하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당난영은 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힘이 모자라게 실렸다 하여도 명백한 우위를 점한 상대가 검을 뿌리치며 물러났다. 그리고 재차 가한 공격. 하지만 묘하게 힘도 속도도 덜한 그 공격은 당난영의 옷자락도 스치치 못하였다. 내려그은 도신을 따르는 공기의 술렁임을 타듯 훌쩍 공중제비를 돌았다.
여인네의 치맛자락이 팔랑팔랑 날리는 듯한 몸놀림을 노려보던 상대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명백하게 동요한 눈빛. 칼날처럼 예기가 형형하던 눈매엔 놀라움이 뚝뚝 묻어났다.
"너, 그, 그 보법!"
날카로운 목소리가 비명처럼 터져나왔다. 이제 그 묵직한 칼날은 이편을 향하지조차 않았다. 늘어져 지면을 훑을 뿐이었다.
"내 보법?"
무얼 숨기거나 가릴 형편이 아니어서, 스승에게 배운 것을 쓰지 못했다. 그보다 더 전에, 아홉 살께부터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힘써 익힌 경공술. 마교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할 옥녀상파마공(玉女裳擺魔功)의 보법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왔다.
옥녀상파마공은, 마교라는 거대한 문파를 먹여살리는 자금원 중 하나인 마화각(魔花閣)의 구성원이 배우는 무공이었다. 내공심법과 체술, 보법으로 이루어진 이것은 배운 이의 마기와 기도를 갈무리해 숨겨주었다. 게다가 그 보법은 춤추듯 우아한, 이름대로 상제(上帝)의 딸 옥녀의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는 모양새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래봐야 기녀인 그녀들은 보법을 쓸 일이 잘 없었으므로 같은 마교도라도 이 몸놀림은 아는 이가 극히 드물었다. 그 점을 믿고서 펼쳤건만 뜻밖에도 눈앞의 흑의인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너..."
매화 머리띠는 당난영의 멱살을 붙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입김이 뒤엉킬만치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멱살을 움켜쥔 왼손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눈동자는 반쯤 넋이 나갔다.
"이게 미쳤나..."
당난영은 오른손에 들린 검을 역수로 고쳐쥐고서 그대로 베어버렸다. 예리한 검이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크악!"
함께 갈라진 옷자락 틈새로 울컥울컥 피를 쏟아내는 흰 살결이 드러났다. 매화 머리띠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도를 휘둘러 당난영의 검을 쳐내었다. 그대로 당난영을 튕겨내버린 그는 왼손으로 머리띠를 풀어 뭉쳐서 옆구리를 눌렀다.
"으, 큭, 철수한다!"
신음을 애써 참아내며 내력을 실은 목소리가 퍼졌다. 한 손이 열 손을 못 당해낸다고 하였던가, 벌써 흑의인 무리의 숫자는 반수에 가깝게 줄어들었다. 남은 자들은 순간적으로 마기를 강렬하게 분출해내며 자신을 상대하는 이를 밀어내고 몸을 빼내었다.
숲을 온통 새빨갛게 물들이고서 남겨진 소호단 단원은 그렇게들 멍하니 서 있었다. 소호단의 피해 역시 너무 컸다. 애시당초 무위의 차이가 너무 났다. 일고여덟 명이 한 명을 상대해도 역부족이었다.
"아미타불. 사악한 무리에 너무 많은 형제가 희생당했구려. 부상이 가벼운 시주들은 우리 형제들의 시체를 수습합시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리저리 죽어 널부러진 동료에 대한 비감이 뭉클뭉클 솟아나 공기를 적셨다.
죽은 이만 서른 둘. 걷는 것조차 불가한 이들도 열 명이 넘었다. 그나마 말짱한 자들은 시체를 둘러매기도 하고 들것을 만들어 중상자를 나르기도 했다.
성 내에 마련한 8무단의 숙소는 침통한 분위기에 잠식당했다. 다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부상을 치료하던 차에 후속인 2무단과 9무단이 장안에 도달했다.
새로이 합류한 이들과 벌인 수색망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장안 인근의 숲이며 산 어디에도 흑의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불을 피운 흔적 정도만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닷새 밤낮을 내리 수색하였으나, 별달리 찾은 것이 없었으므로 철수 결정이 내려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저렇게 침울한 분위기 그대로 돌아가는 것은 무림맹 입장에서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무려 30년만에 소수라고는 하나 마교에서 드러내놓고 움직였다. 사기를 띄워야 했다.
* * *
무림맹 외원, 소호당 대식당에 수많은 무인이 와글와글 모여섰다. 중앙에서 한 사내가 무어라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소중한 동도들이 희생당하기는 하였으나, 우리는 그 소중한 피로 저 사악한 마교의 무리를 몰아냈다. 오늘의 우리는 소중한 승리를 거두었다!"
무림맹 부군사 장상진이었다. 오늘도 화려하게 반들거리는 운금(云錦) 심의(深衣) 차림이었다. 그가 무어라 외치며 팔을 휘두를 때마다 몸을 따라 산들산들 감기는 폭 넓은 소맷자락이 시선을 붙든다.
"저 사람, 무인은 맞지?"
이명걸이 제 곁에 선 당난영에게 말을 건넸다.
"어어, 이 형, 못 봤어요? 장난 아니에요. 저건 그냥 취향인가 보던데요."
"흐응. 난 저런 소맷자락이며 옷자락이며 왼통 너풀너풀한 옷은 불편해서 못 입겠더만. 게다가 별로 무인에게 어울리는 차림은 아니잖냐."
"에이 뭐, 우리 조장도 심의 차림이에요. 저기 봐봐요."
당난영의 손끝이 가리킨 쪽에는 남궁익이 서 있었다. 따스한 색감의 옅은 푸른색 심의에 은사로 수놓은 용이 반짝거렸다. 옷에 반사되어 부서진 빛은 잘생긴 얼굴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에휴 됐다, 됐어."
"뭐, 옷이야 아무려면 어때요. 그보다 몸은 좀 괜찮아요? 그때 피 토했잖아요."
"나야 튼튼하잖느냐. 운좋게 운기요상을 빨리 했잖냐.조금만 있으면 말짱해질걸."
"그거 다행이네요."
닷새에 걸쳐 수색하고 이레를 꼬박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 부상자 둘이 더 죽어나갔다. 맹에 도착해 뒷수습을 하고 이 연회가 열리기까지의 사흘 사이에 또 하나가 죽어버렸다. 사망자는 맹 내에서 안치되어 데리러 올 이를 기다리고 있다.
희생이 원체 컸던지라 가라앉은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방편이 이것이었다. 하룻밤만이라도 술과 음식을 푸짐히 차리고 기녀를 불러다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며 즐기기. 조금씩 가까워지는 불안감을 하룻밤만이라도 잊고, 산 자는 승자로,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이날 연회의 주연은 단연 마교도와 충돌했던 8무단이었다.
평소에는 간편한 무복 차림이던 여인네들도 다들 색색이 고운 치마저고리 차림이었다. 사내들도 색이나 수가 화려한 옷을 걸쳐 연회 분위기에 맞추었다. 무인에겐 심의가 어울리지 않네 어쩌네 하던 이명걸도 호복(胡服) 차림이기는 하여도 옷자락도 발목까지 내려오는 남색 웃옷을 둘렀다. 당난영 역시 옷깃에 덩굴무늬를 수놓은 옅은 보라색 학창의(鹤氅衣) 차림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반짝이는 형형색색의 광경이 눈을 어지럽혔다.
"...아, 곱다."
"응?"
당난영의 혼잣말. 이명걸이 좇은 그녀의 시선은 어느 여성 대원에게 머물러 있었다. 본가가 부유하다던 그녀는 틀어올린 머리에는 색색의 옥비녀를 꽂고 고급스러이 은은하게 빛나는 자줏빛 예복 차림이었다.
당난영은 기루에서 태어나 기녀로 키워졌기에, 본래 곱게 화장하고 반짝이는 장신구를 달고 색색이 화려한 의복을 골라입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나마 기루에 종종 나가기는 하였어도, 저는 남복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리도 곱게 치장한 여인네가 주변에 가득하면 절로 눈길이 가고 부러워하고는 하였다.
물론 이런 그녀의 속사정을 알 리 만무한 이명걸은 한숨 섞인 혼잣말을 오해했지만.
"아, 아녜요."
"뭐가 아니란 거냐. 크크, 누가 그렇게 곱던?"
"그보다, 분위기 좋네요."
"응? 아아, 그러게나 말이다. 그렇게나 많이들 죽었는데도."
"그래도, 관 속처럼 침울한 것보단 낫잖아요? 간만에 이렇게 향 좋은 술도 마시고 말이죠."
그녀는 손에 든 제법 큼직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하동에서 잔뜩 공수해왔다던 분주(汾酒)가 수정보다 투명한 자태를 뽐내며 입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부드럽게 목을 타넘은 액체는 뱃속을 찌르르 울렸다. 청아한 향이 비강을 폭발하듯 올라와 비강을 가득 채웠다.
"크, 끝내주네요."
"쩝, 누구 약올리냐?"
이명걸은 아쉬운 표정으로 연신 입맛을 다져대었다.
"누구는 의원 나으리가 술은 입에도 대지 말래서 이 와중에도 차만 들이키고 있구만."
"하하... 나중에 양껏 드세요. 그래도 지금은 의원 말 잘 들으시구요."
당난영은 짐짓 놀리듯 미소를 띤 얼굴로 연신 술잔을 비웠다. 분주는 부드러운 목넘김이 일품이라고는 하여도, 상당한 독주인지라 그녀의 말갛게 흰 얼굴은 금세 도화빛으로 발긋하게 물들었다.
이명걸은 주변에 가득한 주향을 음미하며 제 눈앞의 고운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곱다 속으로 되뇌이었다. 그때, 식당 한 켠에서 커단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만 이렇게 살아남아 미안하구나..."
형제가 함께 입단했다던 아무개는, 낙양으로 오던 길에서 중상으로 앓던 동생을 잃었다 하였다. 처음에는 부군사 나으리가 영웅이라며 떠받들어주고 또 맛좋은 음식이 한가득이니 그에 취하여 기분이 퍽 좋아보였다. 그러나 독주가 부드러운 넘김과 함께 가득 불어넣은 술기운은 절로 동생을 떠올리게 만든 모양이었다.
한 명이 울음을 터뜨리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너도나도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였다. 즐거워야 할 연회장의 공기가 비감으로 진득하게 물들었다. 많은 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다 울지 않는 이도 다들 슬픔에 젖어 승전 축하연은 어느새 망자에 대한 추모연으로 변모했다.
일이 이리 되자, 소위 간부들-단장이나 조장, 부군사, 귀빈석을 꿰차고 앉은 군사 같은 자들-은 퍽 난감해졌다.
그 난감한 표정을 본 당난영은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우는 이를 피해가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