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무협물
파촉지룡
작가 : 부지화
작품등록일 :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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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 그 이후(1)
작성일 : 17-12-09     조회 : 409     추천 : 0     분량 : 5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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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난영의 가벼운 발걸음은 조장들이 모여앉은 원탁으로 향하였다. 그녀가 찾으려던 사람은 뚱한 표정으로 제 앞의 술잔을 멍하니 노려보는 중이었다.

 

 "저기, 조장?"

 "흐이익?"

 

 남궁익은 퍽 놀랐던지 요상한 소리를 냈다.

 

 "어, 어흠흠. 무슨 일이지?"

 

 "조장, 제가 악기를 챙겨오지 않았어서 계속 합주 못했잖아요?"

 

 "그랬지."

 

 남궁익은 그간 당난영이 보일 때면 거의 합주를 하자며 졸라대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매번 악기를 챙겨오지 않았다며 내뺐다.

 

 "하지만, 오늘은 악기가 있잖아요?"

 

 "악기? 고향에서 보내주셨나?"

 

 "후훗, 아뇨."

 

 그녀는 불려온 기녀들을 가리켰다. 당연히 그녀가 특기라 말했던 비파를 들고 온 자도 있었다. 남궁익은 알았다는 듯 씨익 웃더니 키가 비죽이 큰 기녀가 든 비파를 빌려왔다.

 

 당난영은 현을 몇 번 쓸어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무얼 연주하면 좋겠느냐?"

 

 "마땅한 무희도 없고, 북도 무엇도 없지만 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으로 할까 합니다. 조장은 악곡의 큰 줄기를 연주세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파진악을 하자고? 여기서?"

 

 "네에."

 

 생긋 웃는 그녀의 미소와 느리게 끄는 말꼬리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남궁익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다시 해사하게 웃더니 비파현을 퉁겼다.

 

 굳은살 하나 없이 마냥 곱고 섬세한 손가락이 현을 튕기자 북소리가 울리고 발(鈸)소리가 울렸다. 오직 비파 하나로만 내는 소리임에도, 그녀의 섬세한 내공 운용 덕에 군악 특유의 장중한 분위기가 풍겼다. 남궁익도 이에 질세라 옥피리를 연주해 장단을 맞추었다.

 

 낮고 묵직하게 울리는 음이 가슴을 둥둥 울렸다. 전장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과 비애 대신에 고양감을 되살리는 곡조. 곡소리 가득하던 연회장의 공기가 묵직한 음조에 훅 떠밀려 사라졌다.

 

 그 빈 자리는 성취감이 채웠다.

 

 "그래,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았잖아?"

 

 "이긴 건 우리니까."

 

 "마교도 놈들이 도망쳤지."

 

 한편 남궁익은 슬슬 당난영의 탄주에 맞추기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원래도 관악이 끼던 악곡이 아닌데다가 그녀의 연주는 뛰어난 기교를 자랑했다.

 

 '망치지 않는 것이 최선...'

 

 질질 끌려가는 느낌에 입이 쓰긴 했지만 그래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탁월하게 아름다웠다. 현을 짚은 손가락이 공기를 쥐고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남궁익은 정말 훌륭한 악사들은 비록 무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도 악기를 통해 기를 쥐락펴락 한다 들은 적이 있었다. 들은 당시에는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온데.

 

 '정말로 가능했구나.'

 

 그렇기 연주가 끝나자, 연회 분위기는 재차 두둥실 떠올랐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들 기분이 도로 좋아졌나봐요."

 

 "어, 어어. 대대로 악사라더니 과연 대단하구나."

 

 여운에 취해있던 남궁익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 그의 눈에 바뀐 분위기가 들어왔다. 그때, 한 사내가 그의 편으로 손짓을 하는게 보였다.

 

 "...무영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오늘 합주는 영광이었다. 다음에 또 한 수 청하마."

 

 * * *

 

 축하연이 끝나고 해가 바뀌었다. 소호단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수련에 힘썼다. 그 중에서도 특히 8무단의 단원들이 제일 열심이었는데, 일전의 마교도와의 충돌 때 적잖이 충격을 받은 때문이었다. 무림맹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맹 전체가 대단할 뿐, 하급 무사인 그들은 보잘 것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정월의 찬 공기에도 땀을 뻘뻘 흘려대는 이 중에는 당난영도 있었다.

 

 그간 너무 안일했었다. 주위에서 옥화소랑이라는 둥, 경공술이 귀신같다는 둥 떠받들어주는 목소리만 들으며 자만했다. 또래에 비해 뛰어나다 여겼으나, 어디까지나 또래 중일 뿐, 강호 무림 전체를 아우르자면 명백한 약자였다.

 

 게다가 그 자. 붉은 매화가 수놓인 머리띠를 맨 도객, 그의 드러난 눈 주변은 퍽 젊게 보였다. 냉정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묘하게 낯이 익었으나, 딱히 누군가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 그토록 냉정한 눈빛을 한 자는 없었다.

 

 "아차, 집중..."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이지러지던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녀는 상념을 떨쳐내려 부러 몸을 혹사시켰다.

 

 매일같이 연무장을 달리고 목검을 휘두르며 몸을 단련했다. 그녀는 그간 부족한 근력을 내력으로 때우면 된다 여겨 외공에 대해선 안이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장안 인근에서 크게 낭패한 뒤로는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하여 이토록 몸을 단련하는 데에 열중하게 되었다.

 또한 다른 이의 대련을 하자는 부탁도 어지간하면 거절하지 않게 되었다. 그 때에도 내공과 경공을 이용해 현란한 검술을 펼치는 대신 최대한 외공 위주로, 가능한 한 내공을 억누르고 간결하게 목검을 놀렸다.

 

 "그러고보니, 요즘은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건 안 하냐?"

 

 "팔랑팔랑요?"

 

 "너, 경공술 끝내주잖, 악!"

 

 당난영은 이명걸이 흰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드러나는 빈틈을 두드려댔다. 이명걸은 슬슬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어깨며 옆구리를 가격하는 그녀가 얄미워졌다.

 

 "아이고, 이놈이 형을 잡네..."

 

 최근 당난영의 공격은 근력이 붙은 탓인지 제법 묵직해졌다. 막지 못할 만큼은 아니라지만 방금도 맞은 옆구리가 욱씬거렸다. 이명걸은 아픈 옆구리를 문지르고 있노라니 부아가 슬금 치밀었다.

 

 이전에야 워낙 날짐승같이 움직여서 공격이 닿지 못하여도 납득했었다. 헌데 근래 들어서는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스쳐 흘려버리니 묘하게 약이 올랐다.

 

 외공을 최대한 활용하여 대련에 임하기를 수 개월, 어느새 가녀린 팔이며 어깨, 다리에는 가늘지만 탄탄한 근육이 붙었다. 본래 근육이 잘 발달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근력은 제법 향상되었다.

 

 물론 당난영이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또 다시 여름이 가까워올 동안에 외공에만 힘을 쏟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새로이 기를 끌어모아 단전을 늘리는 대신, 운공실에 틀어박혀 사색하는 데에 집중했다.

 

 비록 옥란주사신공의 비급이 수중에 있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전부 머릿속에 남아 있다. 어찌나 여러 번 읽었던지 내용 뿐 아니라 먹물이 튄 자국, 틀려서 지운 흔적, 책 가장자리에 남은 손때까지 생생하게 기억났다.

 

 다만 문제는, 그녀에게는 악곡의 형태로 정리된 내용과 스스로가 익힌 무공을 연결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생각했다.

 

 이제는 몸에 완전히 배인 내공의 운용 방법과 흐름을 책 속 구절 하나 하나에 전부 대응시켜보았다. 그래도 잘 풀리지 않으면 악곡을 머릿속으로 연주해보며 비교하기도 하고, 주법과 비교해보기도 하였다. 또, 기루에 나가 연주할 때에도 머릿속으로 구결을 떠올렸다.

 

 날이 슬슬 더워질 무렵, 그녀는 간신히 자그마한 성과를 하나 얻었다. 바로 행공할 때 숨결에 스며 나오던 독기를 갈무리해 주변에 영향이 없도록 제어하는 방법이었다. 덕분에 굳이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안전하게 내공 수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부족했던 외공도 보강되었고, 내공 역시 한층 더 정교하게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성장에 기분이 좋아 한여름 오시의 더위도,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도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오, 너는 덥지도 않냐? 이 날씨에까지 그렇게 긴팔에 긴바지에 의관정제를 해야겠어?"

 

 이명걸과 당난영, 두 사람은 점심을 먹고서 잠시 쉬자며 나무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이명걸은 덥다며 윗도리는 훌훌 벗어던져 두고서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당난영은 천이 얇고 통풍이 잘 된다고는 하여도, 속저고리부터 시작하여 제대로 무복을 갖춰입은 차림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참을 만 하잖아요."

 

 "보는 내가 다 덥다, 아이고."

 

 당난영은 평온하게 입꼬리를 올려 매끈한 호선을 그려보였다. 좀 덥기는 하여도, 저렇게 윗옷을 벗어젖힐 수는 없었다. 맹의 사람들은 아직 그녀를 사내인 줄로 알고 있으니 별 수 없이 더위를 참아야했다.

 

 "그 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더위에도 추위에도 구애받지 않게 된다잖아요. 그러니까 더 열심히 수련하세요, 흐흐."

 

 "하이고, 살아생전에 그렇게 될 리가 없잖냐. 조금만 더 식혔다가 움직이자."

 

 "그래요."

 

 그녀가 눈을 감자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눈가에 발처럼 드리워졌다. 또다시 옥란지주에 관한 생각에 마악 잠기려던 때, 익숙지 않은 인기척을 느껴졌다. 섬세한 눈동자에 들어온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보통은 내원 쪽에 기거하여, 지금까지 딱 두 번 본 사람. 그 사내가 이편으로 다가왔다.

 

 "무영검 대협 아니십니까.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당난영은 늘어져있다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가까이서 본 무영검 모용효명은 묘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한 가닥으로 높게 묶어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이미 희끗희끗한 반백이어서 제법 나이를 먹은 듯 보였다. 그 얼굴은 기껏해야 갓 불혹이 되었을까 싶어 보였지만 젊어 보이는 얼굴에 어린 표정에는 연륜이 서렸고 눈빛은 명경지수와 같았다.

 

 "음, 자네가 하예랑이던가?"

 

 "네, 그렇습니다. 하온데..."

 

 그녀와 이 중년의 무인 사이에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일전의 장안행에 동행하여 함께 일전을 치뤘다는 것 정도였다. 그나마도 단 둘이 아니라 백 명이 넘는 인원 중 하나였다.

 

 "아아, 별 일은 아닐세. 그저 지난 승리연에서 자네의 연주가 제법 인상깊어 이리 찾아왔을 뿐이네."

 

 "아, 그러셨군요."

 

 짐짓 수긍한 듯 답은 하였으나, 저런 답이 납득이 갈 리 만무했다. 무영검의 잿빛에 가까운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으나,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그것은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퍽 나이가 들어보이지는 않았으나 더 젊은 시절에는 여자깨나 울렸음직한 얼굴에 떠오른 묘한 미소 역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네의 집안은 어느 하 자를 쓰는겐가?"

 

 "개원(開元) 연간, 장약허(張若虛)가 강가에 뜬 달 처음 본 이를 찾던(江畔何人初見月) 때의 하(何) 자를 씁니다."

 

 "호오, 검남도에 그런 악사 가문이 있었던가..."

 

 "하하, 뭐 그렇게 대단한 집안은 아닙니다. 잔도를 넘어 낙양까지 소문이 미칠 리 만무하지요."

 

 "그렇구먼."

 

 무영검은 무언가 할 말이 더 남은 눈치였다. 하지만 꾹 다물린 입에 문 것은 정적뿐이라, 당난영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다음에도 탄주를 들을 기회가 닿으면 좋겠네."

 

 "네, 영광입니다."

 

 당난영은 그대로 뚜벅뚜벅 멀어지는 등을 노려보았다. 무영검이 속한 월영단은 무림맹 내원에서도 최심처인 세한당(歲寒堂)의 바로 곁에 있는 건물을 사용한다. 내원에 속한 예까지 올 일 따위 없다. 드넓은 무림맹 장원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예까지 나온 것은 그저 지나는 길이 아니라 분명 어떤 의도를 지니고 굳이 걸음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무영검은 그저 연주에 대한 칭찬을 하고 갔을 뿐이었다. 그냥 오다가다 마주쳤을 때 해도 충분할 말이다. 그에 느껴지는 찝찝한 감정이 머리 한구석에 고여 오래도록 남았다.

 

 그로부터 보름께가 지났을까, 당난영은 시장에 볼일이 있어 장원을 나섰다가 다시 무영검과 마주쳤다. 무림맹 장원에 필요한 물자는 기본적으로 납품 계약을 맺으므로 맹 장원 내에 기거하는 인원은 굳이 시장에 나와 보통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을 피하는 편이었다. 특히 월영단은 단체로서의 격이 그리 높지는 않아도, 일종의 비밀 단체에 가까운 맹주 직속 부대였으므로 그 단원이 이리 시장에 어슬렁거릴 일은 정말로 드물었다.

 

 “오, 자네 하예랑 맞지? 내 합석 좀 하겠네.”

 

 “아, 무영검 대협이시군요. 제가 어찌 대협의 합석을 마다하겠습니까.”

 

 그것도 길거리 한복판도 아닌 허름한 다루에 말이다.

 

 “자네 스승이라던 도사는 그래 어느 문파 출신이라 들었나?”

 

 “푸웁, 네, 네?”

 

 별 내용 없는 잡담을 주고받다 나온 뜻밖의 내용에 들이키던 찻물을 그대로 뿜어버렸다.

 

 “그건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 도인이라고만 하셨기에.”

 

 “그렇구먼... 자네, 검남도 출신이라고 했던가.”

 

 “예에...”

 

 “그렇다면 청성파인가...”

 

 무영검은 그녀의 대답도 들은체만체하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별안간 벌떡 일어나 사라져버렸다. 괴팍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에 당혹스러웠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쑥불쑥 예상도 못한 곳에서 나타나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대는 무영검 덕에 당난영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스승님께서 마음을 평온히 다스리라 하셨건만...”

작가의 말
 

 중국에서는 어떤 한자를 말할 때, 우리처럼 어찌 하(何)같은 식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어느 단어나 어구의 하(何) 같은 식으로 부른다고 해요. 그래서 본문에서는 성당시기의 시인인 장약허의 춘강화월야 중 한 구절을 차용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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