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무협물
파촉지룡
작가 : 부지화
작품등록일 :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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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명파의 제자(1)
작성일 : 17-12-12     조회 : 430     추천 : 0     분량 : 5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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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명산(鶴鳴山)?”

 

 무영검의 눈동자가 도르르 움직였다. 허공에 적힌 글을 읽어내려가듯 구르던 눈동자가 멈춰섰다.

 

 “아, 그렇군. 학명파가 있었지. 그쪽의 파견 인원이 조만간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어. 헌데, 네년은 그걸 어찌 안 게야?”

 

 “스승님에게서, 하읏, 기별을 받았습니다. 인솔자를 자처하셨다며...”

 

 “인솔자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질이 없었는데... 좋아. 사흘 안에 도착한다 했으니, 그때까지는 유예다.”

 

 그리고는 그대로 구금.

 

 지하인지라 바깥이 보이지 않으니, 당난영은 낮인지 밤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때때로 가져다주는 식어빠진 만두며 떫디떫은 차가 들어올 때면 식사 시간이구나, 하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받아든 차나 음식에는 언제나 산공분이 섞여 있었다.

 

 특별히 손발을 구속하여 움직임에 제약을 두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갇힌 방은 발을 제대로 뻗고 누울 수조차 없이 좁았다. 시원스레 쪽 곧은 다리가 길쭉하여 영 거추장스러웠다.

 

 흑단목을 얼기설기 짜맞추어 만든 문은 틈이 조금씩 벌어져 그 사이로 가는 빛을 간신히 밀어넣었다. 그조차도 없었으면 완전한 암흑이었을 터인지라, 당난영은 그 자그만 빛줄기도 반가웠다.

 

 눅눅한 지푸라기를 그러모아 그 위에 몸을 웅크렸다. 어차피 학명산에서 진즉 출발한 스승이 도달하면 이 억울한 처지에서 벗어날 터이니 마음만은 괴롭지 않았다.

 

 마음을 스스로 괴롭히는 대신, 머리를 움직였다.

 

 머릿속에 차곡차곡 꽂힌 책을 꺼내 되씹었다. 실제로 내공을 운용해보며 명상했다면 좋았겠지만, 배를 채우느라 바빠 단전은 텅 비었다.

 

 네 번째로 받아든 만두를 쪼개어 천천히 씹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느 여인의 목소리가 나무문을 쿵쿵 울렸다.

 

 연륜을 감아 우아한 노년의,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 익숙하고도 반가운 스승의 목소리였다.

 

 “내 제자는 어디에 있느냐?”

 

 “그년이 얘기한 스승이 소현(素玄) 진인이셨습니까.”

 

 “년이라니! 랑아는 내 자식과 같은 아이거늘, 네놈이 이년 저년 하고 부르면 내 기분이 어떻겠느냐.”

 

 “제 나이가 벌써 지천명인데, 이놈 저놈 부르시는 것도 참 좋지는 않지요. 그러는 진인께서는 아직까지 우화등선도 아니 하시고 예서 뭘 하시는 겝니까?”

 

 “원시천존께서 이놈의 성질머리 좀 죽여야 받아주신다더구나.”

 

 “하이고, 나 참...”

 

 투닥대는 말소리가 가까워온다 싶더니, 일순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등불의 일렁이는 빛을 휘감은, 새하얀 도복 차림의 여도사가 눈에 들어왔다.

 

 “스승님!”

 

 “랑아, 오래간만이구나. 그간 잘 지내, 지는 못했구먼. 꼴이 이게 다 무어야.”

 

 “하하...”

 

 당난영의 흰 얼굴은 볕을 못 받아 허옇게 떴다. 살이 빠졌는지 눈 아래며 뺨에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붉었던 입술도 허옇게 떠 급기야는 쩍쩍 갈라지다 못해 피까지 맺혔다.

 

 소복은 찢긴 상처에서 흐른 피가 배여 거멓게 말라붙은 채로 너덜거렸다. 게다가 너덜거리는 앞섶 새로 동여매 누른 가슴이며 하자가 내다보이자 당난영의 스승, 소현 진인은 눈살을 절로 찌푸렸다.

 

 “세상에, 채찍질이라도 한 게야? 이 여린 것이 어디 때릴 데가 있다고!”

 

 소현 진인은 혀를 쯧쯧 차대며 겉옷을 훌훌 풀어 당난영의 몸을 덮어 감쌌다.

 

 “원래 심문이 그런 거 아닙니까.”

 

 무영검은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 음, 그, 미안하게 됐네. 내가 오판했구먼. 자네는 당초대로 월영단에 적을 두면 되네.”

 

 이명걸이 도복에 감싸인 어깨를 토닥였다. 소현 진인은 그도 마음에 안 드는지 눈을 흘기며 그 손을 탁 쳐냈다.

 

 “내 숙소는 어디에 마련했더냐? 네가 좀 앞장서거라.”

 

 당난영은 제 스승이 누군가를 그리 격의 없이 부르는 것에 호기심이 동하였다. 허나 며칠 전에 호되게 당한 것 때문인지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중요한 일이라면 스승이 알려줄 것이라 애써 넘겼다.

 

 무영검이 앞장서 도착한 건물에는 정갈하고 단정한 필체로 중묘헌(衆妙軒), 석 자가 메운 현판이 걸려 있었다.

 

 “소현 진인께서도, 또 이끌고 오신 학명파의 제자들도 예서 머물면 됩니다.”

 

 소현 진인은 자신보다 한참 큰 당난영의 몸을 감싸듯 하여 함께 건물로 들었다. 소현 진인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당난영의 상처부터 살폈다.

 

 채찍이 핥고 지나간 상처는 생각보다 얕아, 다행히 뼈나 근육이 상하지는 않았다.

 

 깨끗하게 닦은 상처에 소현 진인의 특제 고약을 바르고 다시 깨끗한 천을 덧대 감았다. 산공분의 효과가 가시고 다시 단전이 들어차자, 상처는 조금 더 빠르게 아물어갔다.

 

 이틀 뒤, 여느때처럼 상처를 닦고 고약을 덧바르는 중,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소현 진인, 좀 들어가겠습니다.”

 

 “기다리거라.”

 

 “급한 일입니다.”

 

 “기다리라지 않더냐.”

 

 상처를 돌보는 손길이 빨라졌다. 마악 천을 감아 마무리하는 중, 문이 벌컥 열렸다.

 

 “급한 일이라 하였습, 니...다...”

 

 장상진 부군사와 함께 들어오던 무영검의 눈길이 천만 칭칭 감긴 당난영의 몸에 가 닿자, 그의 얼굴이 온통 시뻘게졌다. 그에 반해 장상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었다.

 

 당황한 당난영은 그대로 이불을 둘둘 감았다.

 

 "그래서, 부군사님, 어인 일이신가요?"

 

 당난영은 채찍 자국이 아직 쓰라려서인지 무영검 쪽은 눈을 흘기듯 스치고서 말을 이었다.

 

 "소녀가 약을 바르느라 몸을 채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두 분 대협께오서는 소녀에게 의복 정제할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말투는 정중하고 목소리는 곱고 나긋하지만 명백하게 옷 좀 입어야겠으니 당장 꺼지라, 는 소리. 소현 진인은 두 사내를 토끼 몰듯이 방문 밖으로 내보냈다.

 

 재차 열린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옷을 제대로 걸친 당난영이 일어서 있었다.

 

 길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은 검은 폭포처럼 드리워져 목덜미며 얼굴이 초승달보다 창백하게 빛났다.

 

 소매가 단출한 저고리는 살결만큼 희었다. 그 아래 입은 치마는 우유 한 사발에 능소화를 꼭 한 송이만치 섞은 빛이 단아했다.

 

 "함부로 내쫓아 죄송합니다. 이제 들어오시겠습니까?"

 

 정사각형 탁자에 당난영과 소현 진인, 무영검, 장상진 부군사가 둘러앉았다.

 

 "소현 진인, 이 하예랑(何藝郞)이라는 자가, 진인의 제자라 하셨습니까?"

 

 "그렇네, 장 부군사. 어려서 고아 된 것을 내가 손수 거두었지."

 

 “고아, 라. 하지만 이끌고 오신 제자들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더군요. 겨우 8년 남짓 보았다 들었습니다.”

 

 “내어놓고 가르친 것은 그쯤 되었네.”

 

 “하오시면?”

 

 “장 부군사는 빈도가 장문인직을 내려놓은 것이 벌써 30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인가 보구먼. 궁관도 떠나 산 속에 은거한 게 벌써 그리 되었네. 그 사이에 부모 잃은 어린 아이 하나 거둔들 누가 알았겠는가.”

 

 “허어, 그것도 그렇군요. 헌데 어찌 궁관에 데려다 두지 않으시고?”

 

 “글쎄, 그저 늙은이의 변덕이라고 해 둠세. 그보다, 장 부군사는 지금 이 노인네의 말을 못 믿어 심문하는 겐가?”

 

 “하하, 심문이라니요. 온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어찌 진인 같은 어른께 심문 따위를 하겠습니까. 학명파는 옛부터 오갈 데 없어진 여아들을 거두어 먹인 도교의 명문이며 진인께오서는 그런 곳의 큰 어르신 아니십니까.”

 

 “과연 혀가 매끄럽구먼, 장 부군사. 허면, 무엇 때문에 이 아픈 아이를 앉혀 두고 이리 괴롭히는 것인지 좀 알고 싶은데.”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인.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하예랑은 제가 이끄는 월영단의 단원이 되었지요. 진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월영단은 정파 무림의 중심이며 정신적 지주인 무림맹주 직속이잖습니까. 그런 곳에 수상쩍은 자를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하여 몇 가지를 좀 확실하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저어, 말씀 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스승님, 저는 이제 괜찮아요. 의외로 상처가 얕은걸요? 저도 진즉에 성년은 지났으니, 제가 대답하게 해 주세요.”

 

 “알겠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그리 해야지.”

 

 서서히 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고운 중년 여인의 얼굴이 당난영을 향하자 흐늘흐늘 풀어진 표정을 띄웠다. 세상사는 물론이요 감정까지 진즉 초탈해 조만간 우화등선이라도 할 것 같던 얼굴만 보아 온 무영검은 속으로 몹시 놀랐다.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까요...”

 

 애시당초 학명산을 떠나 낙양으로 향하면서, 스승과 정한 것은 그녀의 가명과 가짜 내력 정도였다.

 

 당초부터 이리 어이없이 들통이 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미리 말을 맞춰 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차라리 혼자 말을 만들어야 한다 여겼다. 그리하여 스승에게는 저가 이야기하겠다 자청하였다.

 

 “스승님께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습니다마는, 제 어미는 지금은 불타 사라진, 이곳 낙양 옥화원의 기녀였습니다. 아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니 성은 없고 그저 요요(妖妖)라 불렸습니다마는.”

 

 “옥화원이라면...”

 

 “예에, 제가 딱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옥화원에서 난리가 났었지요. 요행히도 저희 모녀는 목숨은 건졌습니다. 제 어미는 저를 감싸느라 심하게 다쳤었지만요.

 학명산에 가면, 오갈 데 없어진 여인네들을 거두어 준다는 곳이 있다기에 무작정 검남도로 향했습니다. 거의 두 달을 걷고 또 걸어 간신히 학명산에 도착한 날, 저의 어미는 다친 데가 덧나 먼저 가버렸습니다.”

 

 당난영은 어설피 거짓을 지어내기보다는, 적당히 가위질해 기운 진실을 풀어놓았다. 이왕이면 동정심을 살 만한 내용을 적당히 보탠 것으로.

 

 “너무나도 막막하여 뒷일은 어찌 할까 생각도 못하고 하냥 울기만 하였답니다. 그러던 차에 눈 앞에 선녀가 나타났지 뭡니까.”

 

 “푸흡...”

 

 반쯤 지어낸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것을 듣느라 멍한 표정을 짓던 소현 진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 참. 그렇게 웃어버리시면 어찌해요, 스승님!”

 

 “아이고, 그래. 미안하구나. 마저 이야기하련.”

 

 “스승님의 반응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그 선녀가 스승님이셨습니다. 스승님께서 거두어 주신 덕에 굶지도, 매를 맞지도, 도둑질을 하지도 않을 수 있었지요.”

 

 당난영은 예까지 이야기하고서는, 고달픈 나날을 회상하듯 짐짓 한숨을 쉬었다. 거짓으로 술술 지어낸 이야기를 풀어내는 주제에 말간 눈가가 발그레하게 물들다 못해 급기야는 물기까지 어리었다.

 

 “그리고 열 일곱이 되던 해에, 정식으로 입관하여 도호를 받았습니다. 스승님께서 손수 도호와 성명을 주셨지요. 성은 하선고의 하요, 이름은 예랑(何藝娘), 도호는 하랑자(何娘子)입니다.”

 

 “아이고, 큽, 소현 진인, 너무 성의 없으신 것 아닙니까? 같은 글자로 성명에 도호까지 죄다 돌려막기라니, 너무 하잖습니까.”

 

 “시끄럽다. 요런 고얀 녀석 같으니라고. 저게 최선이었느니라.”

 

 세월의 흔적이 옅게나마 패인 소현 진인의 얼굴에 불그스레 물이 들었다.

 

 저리 속마음이 솔직하게 얼굴에 드러나는 스승의 모습이 얼마만이던가.

 

 당난영은 미소가 어리는 입가를 손으로 살며시 가렸다.

 

 “저는 마음에 듭니다, 무영검 대협. 아무튼, 그렇게 정식으로 제자로 적을 올렸는데, 하필 스승님의 제자로 올리다보니, 항렬이 너무 높아졌지요. 아마 스승님께오서 이끌고 오신 사질들은 제 이야기 하기를 즐기지 않았겠지요.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고아 계집애가 하루아침에 사숙이라니, 황망하기 그지없잖습니까.”

 

 “대강 어찌 된 일인지는 알겠습니다, 소현 진인. 뒷일은 저와 정군사님, 그리고 월영단 부단장 셋이 의논하여 수습하겠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 무림맹 장원 이곳저곳에 방문이 붙었다.

 

 비록 학명파가 규모가 작은 문파이기는 하나, 도교의 가장 오랜 성지 중 한 곳이며 민간에 두루 명망이 높은 곳이니, 아예 대대적으로 알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9월 1일자로 월영단에 입단한 맹원 하예랑(何藝娘)은 일신상의 연유로 남복을 하였을 뿐, 본디 여인의 몸이며 명문 정파인 학명파의 정식 제자임을 널리 알리노라.」

작가의 말
 

 나름대로 초 급전개... 라고 생각합니다! 종전부터 줄곧 언급되던 ‘스승님’이 드디어 등장했어요. 학명산은 대개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원래는 도교의 매우 중요한 성지 중 한 곳이라는군요. 제 입맛대로 설정을 붙여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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