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
황제의 대명궁 아래 수없이 많은 백성이 살아 숨쉬며, 온세상에서 사람이 모여드는 대당 제일의 도시.
당난영은 낙양에서부터 바삐 말을 달려, 불과 이틀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덕분에 새하얗던 도포는 먼지가 누렇게 앉았고, 곱게 빗어 틀어올린 머리는 모양새가 흐트러져 초라했다.
하지만 행색이 초라하다 하여도, 이미 무림맹에서 여도사 하나를 파견할 것이라는 언질이 있었던지라 성문 통과부터 입궐까지 일사천리였다.
황궁은 어지간한 도시만큼이나 넓었다.
내관의 뒤를 따라 태액지에 안내받아 도착하자, 한 소녀가 궁인들을 줄줄이 이끌고 다가왔다.
“공주 전하 납시오.”
당난영이 앞으로 한동안 호위하게 될 평하 공주였다.
“빈도 하랑, 공주 전하께 인사 올리나이다.”
“고개를 드세요. 궁 안이 복잡해 길을 헤매지나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내관이 잘 인도하여 그러지는 않았나이다.”
고개를 들자 황궁의 예법을 따른 번쩍번쩍한 치장에 짓눌린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창백한 낯빛은 인형을 빚어 놓은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생기 없는 얼굴에 자리한 눈동자만은 까맣게 반짝거렸다.
“어마, 난 산속의 도사님이래서 이렇게 무섭게 생긴 할머니가 올 줄 알았는데, 엄청 젊고 아름답네요.”
공주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며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밀어올리자 그제야 나이에 어울리는 소녀처럼 보였다. 당난영은 채 막지 못한 미소를 싱긋 얼굴에 띄워올렸다.
“꽃과 같은 미인이 황하의 모래보다 많은 궁에서 자라신 공주 전하께서오서 이리 빈도의 겉모양을 칭찬하오시니 황송하나이다.”
“아아아, 편하게 이야기해요. 궁 바깥에서 온 사람하고까지 이렇게 딱딱하게 대화해야 해요?”
“전하의 명이 그러하시면 따르지요.”
“일단 내 처소로 가지요.”
처소에 이른 공주는 딱딱한 낯을 하고서 궁인들을 모두 쫓아 내보냈다.
“사람을 물린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대해 줘요.”
“알겠습니다. 차차 그리 하지요.”
공주는 당난영의 옆으로 옮겨 앉아서는 오른쪽 소매를 걷어올려 잡았다. 파리한 손끝에 찻물을 쿡 찍어서는 탁자에 글씨를 써나갔다.
「바깥으로 새나가면 곤란한 일이에요. 황궁 밖, 황성 밖이 아니라 제 처소 문 밖을 말하는 거예요.」
손끝을 따라 글자를 읽어내리던 당난영의 눈동자가 조금 떨렸다.
「저는 이대로 개봉으로 유람을 하는 척 황성을 떠나, 부황의 명대로 태원군의 진왕부(晉王府)로 갈 겁니다. 거기서 진왕의 세자와 혼인을 하라는 밀명을 받았어요. 하랑은 거기까지 저를 호위하기 위해 부른 거예요.」
대명궁이 새 주인을 맞이한 것도 어느덧 스물여섯 해나 지났건만, 천하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소종에서 회종, 다시 소종에서 애제로 이어지는 동안, 사방팔방에서 절도사들이 들고 일어나 군벌이 되어 대제국은 사분오열 찢겨나갔다. 그리고 그 혼란은 현재진행형이었다.
“확실히, 진왕이 기세가 대단하긴 하지요. 허나 삼면이 적으로 둘러싸인 그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부황께서 맹의 도움을 얻어 반왕을 척살하실 때에, 진왕도 몸소 정예병을 이끌고 달려왔다던 모양이에요. 뭐, 말이 도움을 받은거지, 사실은 꼬맹이가 뭘 했겠어요. 호랑이 등에 얻어탄 어린애 신세였겠죠.”
“황제 폐하께 어찌 그리 불경한 말씀을.”
황궁 밖에 실낱처럼 흘러나온 평하 공주의 인물됨은, 어질고 현숙하며 침착하고 진중하다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그녀는 딱 그 나이대만큼의 발랄하고 가벼움을 숨긴 소녀였다.
아무리 친아버지라지만 무려 황제를 꼬맹이라며 부르다니. 보통이라면 황제를 능멸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써도 할 말이 없을 터이었다.
“괜찮아요. 부황께서는 제게 너그럽죠. 한낱 첩여 소생의 천한 공주인데도요.”
“황제 폐하의 핏줄인 공주 전하가 어찌 천하다 하세요.”
“후후, 그래요. 존귀한 황가의 핏줄, 이었죠. 하지만 어차피 이 처지에 귀하고 천하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딱딱한 미소를 애써 지어 올린 얼굴에 켜켜이 앉은 체념이 희게 가라앉았다.
“제 어머니는, 그러니까 황후 낭랑이 아니라 제 생모인 장 첩여는, 원래는 궁인이었대요. 어화원을 정돈하는 막둥이 궁녀가 우연히 부황의 눈에 들어 단숨에 첩여 자리를 꿰찬거죠. 굉장하죠?”
공주는 목이라도 타는지, 애써 붉게 연지를 칠한 흰 입술을 찻물로 축였다.
“뭐, 몇 달 차이 나지 않는 제 여동생들은 아마 저보다는 조금 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처럼 뒷배 든든한 외가가 없는 공주는 태고적부터 이랬었죠. 나라를 평안케 할 정략 결혼의 제물!”
“공주 전하, 조금 진정하세요.”
“나는 지금도 차분해요, 하랑.”
공주의 그 한 마디는 추호의 거짓도 없는 듯, 차분하고 단정한 표정을 얼굴에 걸어 내보였다.
생모의 천한 출신은 아마 이 소녀의 지위를 위태롭게 흔들었을 것이다.
공주가 영특하다는 소문은 높다란 대명궁 담을 넘어서까지 흘러나왔다. 그리고 실제로 마주한 공주는 소문대로, 아니 그 이상인 소녀였다.
이 영특한 소녀는 아마도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접한 사서에서 자신의 운명을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하여 그 순간부터 조금씩 조금씩 체념해왔으리라.
“알겠습니다, 전하. 진왕부로 향하는 여정 내내 아무 일도 없도록 지켜드릴게요.”
“그거면 충분해요.”
밀랍이 희게 말라붙은 얼굴에 고운 미소가 내려앉았다. 딱 그 나이만치의, 밝은 미소가 말갛게 눈부셨다.
평하 공주 일행은 사흘 뒤 대명궁을 떠났다.
초겨울로 넘어가는 찬 공기를 막으려는 듯, 호화로운 마차에는 색색의 장막을 둘러쳐 두었다.
널찍한 마차에는 당난영이 측근 시녀를 대동한 평하 공주와 함께 앉아 있었다.
시녀는, 그 사이 친해진 탓인지 격의없이 공주와 담소를 나누는 당난영을 어찌 대하면 좋을지에 대해 깊이 고민중이었다.
“음, 조금 춥지 않느냐?”
나이답지 않은 파리한 뺨이 겹겹이 둘러친 장막으로도 채 가리지 못한 바람이 시려워 파르스레 질려 있었다.
물론 새어드는 바람이 상당히 차긴 하였어도, 젊고 건강한 몸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매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하 공주는 입술까지 달달 떨었다.
“최대한 많이 장막을 친 것이라... 지금 외투를 꺼내겠나이다. 조금만 참으소서.”
“공주 전하, 많이 추우세요? 어디 몸이 불편하신가요?”
당난영은 공주의 맞은편에 앉았던 몸을 옮겨 그녀의 곁으로 다가 앉았다. 당난영 자신도 그리 체구가 크지는 않았으나 공주는 그보다도 한참은 작고 여렸다. 품속에 쏙 들어오는 어깨에는 뼈가 도드라져 안쓰러웠다.
그녀는 공주의 마른 나뭇가지같은 팔을 끌어안아 쓰다듬었다.
그 사이 시녀가 큼직하고 두터운 피풍의를 꺼내 덮어주었다. 옅은 분홍빛에 흰 매화를 수놓은 비단에 여우 모피로 안감을 덧대어 포근포근한 피풍의는 두 여인의 어깨를 감싸고도 품이 한참이나 남았다.
개봉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장안까지는 아니었으나, 개봉은 제법 번화한 도시였다.
전쟁의 발톱이 할퀴고 지난 상흔은 어느새 아물었다. 대로는 물론이요 좁은 골목에도 사람이 그득그득 들어차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어차피 일행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다.
공주 일행은 이제는 반왕 주전충이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는 사실마저 희미해진 개봉에서 이틀을 머물고 출발했다.
진왕부로 향한다던 마차는 곧장 태원으로 향하는 대신, 포주(蒲州)에 가 멈췄다.
"포주라면... 관작루(鸛雀樓)인가요, 공주 전하?"
"맞아요, 하랑. 관작루는 손에 꼽히는 명루니까요. 이왕 근처까지 온 건데 들어가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기에는 섭섭하지 않겠어요?"
"끼어들어 송구하오나 전하, 옥체를 보전하시어야 하나이다."
시녀는 당난영에게 어떻게든 공주를 말려달라는 눈치를 보냈다.
기실 공주는 이 정도의 거리를 이동해 본 일이 없어 퍽 피곤해했다. 더구나 피곤이 쌓인 탓인지 자주 몸을 떨며 안색은 점점 나빠졌다.
게다가 포주 땅은 황제와 진왕의 영향권의 경계선에 자리해, 치안이 느슨했다. 공주의 안전을 생각하자면 굳이 머물지 않고 그냥 통과하는 편이 나았다.
당난영은 시녀의 간절한 눈과 제 곁에 웅크린 평하 공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공주 전하, 곤하지는 않으신가요? 퍽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이곳은."
공주의 처연한 눈매에 물기가 어렸다.
"그렇게 가보고 싶으세요?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그냥 통과하는 편이 맞기는 하겠으나..."
"수많은 명사들이 이 관작루를 두고 시를 읊었죠.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눈으로 꼭 보고 싶었어요. 내가 이리 약한 몸으로 또 언제 예까지 여행을 하겠나요."
창백하게 가라앉은 낯에 켜켜이 내려앉은 체념 너머로 손톱만한 불꽃이 떠올랐다.
얼마나 가 보고 싶었으면 이다지도.
당난영은 존귀한 신분으로 태어나서는, 다른 어떠한 것보다 포기하는 법을 먼저 깨우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희게 질려 딱딱하게 굳은 얼굴.
하지만 당난영의 앞에서는 종종 얼굴을 뒤덮어 숨통을 막던 밀랍이 녹아내린 듯, 딱 그 나이만큼의 표정을 지어보일 때가 있었다. 그리고 당난영은 공주의 그런 표정에 약했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폭 쉬고는 공주가 그토록 바랄 대답을 해주었다.
"뭐, 괜찮겠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전하의 몸도 더 상태가 나빠지는 것 같으니, 바람이라도 좀 쏘이는 게 좋겠네요."
"뜻에 따라주어 고마워요, 하랑."
생긋 웃어보이는 미소가 너무나도 맑아서 외려 처연했다.
"뭐, 어차피 금군을 이끌고 왔으니, 어지간해서는 괜찮겠지요. 어지간한 상대라면 공주 전하 한 명 정도는 구해 도망칠 자신도 있고 말이죠."
당난영은 공연히 공주가 안쓰러워 깊게 가라앉은 검은 눈망울을 피했다.
당난영과 평하 공주, 공주의 시녀, 이렇게 세 여자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서 관작루에 들어섰다.
꼭대기까지 올라오자, 공주는 체력이 달려 밭은 숨을 내쉬었다. 당난영은 창가 자리에 그녀를 앉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야말로 절경이로구나!"
하늘도 공주를 가엾게 여겼는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온통 새파랗게 맑았다.
맑은 날씨 덕에 시야가 탁 트여, 황하는 물론이요 저 멀리로 중조산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산천이 두루 어우러진 풍경에 마음이 사르르 씻기었다.
공주가 시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낑낑대며 이고 올라온 길쭉한 짐꾸러미를 끌러 내밀었다.
칠현금이었다.
반질반질 윤기가 도는 오동나무제에 현도 잘 손질된 최고급품. 현악에 조예가 깊은 당난영의 눈이 절로 그리 붙들렸다.
하지만 공주는 그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인지 제 앞으로 끌어당겨 현을 퉁기기 시작했다.
"관작루 서편에는 백 척 돛대가(鸛雀樓西百尺檣)..."
가락에 맞춰 읊는 것은 이익(李益)의 동최빈등관작루(同崔登邠鸛雀樓)였다.
혼란의 시대에 뜻을 채 펴지 못하고 날개가 꺾였단 문인의 옛 목소리가 공주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변방을 떠돌다 오른 관작루에서 토해내었을 서글픔이 절로 눈가에 흘렀다.
"공주 전하. 무언가 드시지요. 바람이 싸늘하니 무언가 따뜻한 걸 먹으면 기분도 나아질 거예요."
"고마워요, 하랑. 하지만 난 괜찮아요."
"호호, 공주 전하는 너무 먹지 않아 탈이에요. 하지만 빈도는 수련자인지라 노상 배가 비었으니 무언가 먹어야겠어요."
공주는 평화를 위한, 힘을 빌기 위한 공물이 되어 팔리듯 타지로 가 혼인해야 하는 스스로의 처지가 서글펐던 모양이었다. 더 어릴 적부터 체념해왔어도 막상 그 순간이 닥치니 감정이 넘실거렸다.
당난영은 그런 공주를 달래듯 짐짓 밝은 어투에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응대했다. 그녀는 따라 웃는 공주를 보며 시녀를 불렀다.
"무언가 음식을 주문하게 점원을 불러다 주시게."
"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시녀는 바삐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내려간 이는 도로 올라오지 않았다.
탁자에 놓인 찻잔을 각기 비울 때쯤에야 느직이 올라온 시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전하."
울음기가 묻어나는 가느란 목소리.
시녀의 가는 목에 바싹 붙은 것은 칼날이요, 그 여린 신형에 가까이 선 것은 험상궂은 사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