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무협물
파촉지룡
작가 : 부지화
작품등록일 :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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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하 공주(2)
작성일 : 17-12-12     조회 : 451     추천 : 0     분량 : 6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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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약한 아녀자를 내세워, 다시 연약한 아녀자를 겁박하다니, 참으로 사내 대장부다운 자로구나. 이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 이런 짓거리를 행하였겠지?”

 

 평하 공주가 나지막히 말했다. 어차피 손님이 없어 사위는 고요했고, 시녀의 훌쩍거리는 소리 외에는 그 말소리를 가릴 것이 없었다.

 

 당난영은 자리에서 일어서 공주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공주 전하, 이 양산 가지고 계시어요. 화살 정도는 막아줄 겁니다.”

 

 공주에게는 양산을 쥐여 주었다. 침착함을 가장하고 당당함을 둘렀지만, 닿은 손끝 너머의 소녀는 덜덜 떨었다.

 

 “물론이지. 빌어먹을 황제 페하의 금지옥엽 맏따님 아니던가.”

 

 험상궂은 사내가 대답했다. 한족의 복장에 상투를 틀고 관까지 썼건마는 어딘지 어색했다. 손에 쥔 단검도 어딘지 손에 익지 않아 보였다. 결정적으로, 말투가.

 

 “거란인이더냐?”

 

 사내는 북풍의 내음을 한껏 안은 채였다.

 

 “하! 공주 전하는 눈치도 빠르구나. 젠장할, 덕분에 좀 곤란해졌다.”

 

 “그 아이는 놔주어라. 어차피 목표는 이 몸 아니더냐?”

 

 “목표가 맞긴 하다. 그런데, 우리가 뭐하러 귀찮게 인질 같은 걸 잡겠어.”

 

 사내는 코웃음쳤다.

 

 그 뒤로 덩치 좋은 사내들이 하나 둘 올라와 계단 주변을 가득 메웠다. 어림잡아 열 명은 족히 넘을 숫자.

 

 “뭐라 하였느냐?”

 

 “말이 샜다는 말씀이지. 이존욱, 그 개자식이 그놈의 황제랑 사돈을 맺는다는 소리가 말야. 그걸 방해하는 건 간단하잖아.”

 

 “그럴, 리가. 그리도 조심했는데.”

 

 “걱정마, 장안이 아니라 태원에서 새어나온거거든. 멍청한 이아자 그놈을 탓하라구.”

 

 사내의 눈에서 음산한 안광이 깔려나왔다. 들판의 늑대처럼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공주의 그렇잖아도 창백한 얼굴은,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허옇게 질렸다. 거미다리마냥 바싹 말라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허, 시주. 어찌 그리 연약한 아녀자에게 무도하게 구십니까?”

 

 당난영은 사내의 맹수같은 기척을 잘라내듯 말을 뱉었다.

 

 “호오, 낯짝이 아주 반질반질하다. 이거 예상 밖의 수확이다. 가한께 바칠 좋은 선물이 되겠어.”

 

 번드르르한 눈알이 당난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들개가 얼굴에다 대고 침을 뚝뚝 흘려대는 느낌이 소름끼쳤다.

 

 하지만 불쾌감과는 별개로, 그녀는 딱히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눈앞의 거란인들은 수도 많고 거칠고 용맹해 보였으나 단지 그것뿐이었다.

 

 “빈도 하랑, 북방에서 온 시주께 제안 하나 드리리다.”

 

 “우리 거란의 전사에게 말은 쓸모 없다!”

 

 사내의 뒤편에 서 있던 다른 이가 활시위처럼 몸을 튕겨 앞으로 쏘아져나왔다.

 

 당난영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더 큰 사내였다. 그는 튀어나오면서 거의 동시에 등에 찬 거도를 뽑아 내리그었다.

 

 “빈도는, 대화를 하자 하였습니다.”

 

 사내의 칼이 허공을 갈라 바닥에 메다꽂혔다. 당난영은 이미 보법을 밟아 사내의 등 뒤로 걸음을 옮긴 뒤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무도한 자에게는 매운 맛도 필요한 법이라 하였지.”

 

 어느샌가 돌아들어간 등 뒤에서, 발걸음을 멈춘 그녀는 겁집채로 검을 휘둘렀다. 사위에 선 이들도, 그 검에 뒤통수를 맞아 고꾸라진 사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채 알아차리지 못한 채였다.

 

 단지 칼을 휘두르며 나선 사내가 채 뽑지 않은 칼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시주들, 이제 좀 빈도의 제안이 궁금해지지는 않으셨습니까."

 

 당난영은 그대로 몸을 틀어 여전히 시녀를 붙든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사내들의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대화가 필요한가? 네년같은 전사라면 이 계집이 죽든 말든 무시하고 우리를 모두 쓸어버릴 수 있다.”

 

 “그 말씀도 옳긴 합니다만 빈도는 헛된 살생은 원하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빈도의 제안을 들을 생각이 있느냐 다시 묻겠습니다.”

 

 생글생글 말간 미소를 지으며 허리띠에 찔러 둔 옥접선을 촥 펼쳐들었다. 그 고운 얼굴만큼이나 하얗게 빛나는 부채가 살래살래 흔들릴때마다 서릿발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좋아, 듣겠다.”

 

 “공주 전하와 빈도, 이렇게 둘을 데리고 가는 건 어떻습니까?”

 

 “뭐?”

 

 “공주 전하는 황제 폐하의 존귀하신 혈통을 이어받으신 분, 살려둔다면 인질로써 가치가 높지요. 게다가 빈도는 어차피 끌고 가겠다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도 좋겠다. 하지만 네년은 계집 주제에 우리보다 뛰어난 전사인데,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나?”

 

 “하하하하! 참으로 사내다우십니다. 한낱 여인네가 두려워 쩔쩔 매는 북방의 전사라니요.”

 

 “이, 이년...! 건방진 년이구나!”

 

 사내의 얼굴이 채 누르지 못한 노기로 벌겋게 물들었다.

 

 “아차, 그 가여운 아이는 좀 놓아주세요. 그리도 떨고 있는데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도사님, 저는 미천한 몸입니다! 이년의 목숨을 내어주고 전하를 구해주셔야지요!”

 

 시녀는 목에 바짝 붙은 칼날도 잊은 채 몸부림을 쳤다. 눈물범벅인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공기를 찢고 울렸다.

 

 “공주 전하가 거란으로 가셨다는 말을 전할 이가 필요하겠지요. 그 아이는 전하의 최측근 시녀. 그 아이의 말만큼 믿음직스럽게 들릴 것이 적다 보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럴듯한 말이군. 하지만 나는 네년의 그 매끄러운 혓바닥을 믿지 못하겠다.”

 

 당난영은 별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오른손에 검집째 들고 있던 칼을 그편으로 내던졌다. 마룻바닥에서 묵직한 금속성이 튀었다.

 

 사내가 눈짓을 하자 뒷편에 선 다른 이가 그 검을 주워들어 물러섰다.

 

 “빈도는 이제 무기도 없습니다. 적수공권인 여인네 둘이 두렵다고는 아니하시겠지요.”

 

 여전히 귀여운 눈매는 초승달처럼 휘어 부드럽게 빛나고 고운 입매는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채였다. 하지만 어딘지 비웃는 듯 보이는 미소짓는 그녀의 주변으로 예리한 기운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한층 짙어지는 살기는 예민하게 갈고닦은 거란인 사내의 감각을 마구 때려댔다. 그는 초원 복판에서 홀로 늑대 무리와 마주한 듯한 두려움 탓에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 좋다. 그렇게 하겠다.”

 

 사내가 목에 겨눈 칼을 거두자, 시녀는 벌벌 떨리는 발을 놀려 제 웃전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이편으로 돌아서는 당난영을 원망스럽게 쏘아보았다.

 

 당난영은 시녀에게 가까이 붙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걱정 마렴. 내가 설마하니 공주 전하를 이대로 오랑캐의 손에 넘기겠니. 다만 네 목숨도 귀한 것이니 구하느라 이리 하였느니."

 

 시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 의젓하게 말은 하였으나, 그녀는 기껏해야 공주보다 한 살 많은 소녀였다. 어찌 두렵지 않았으랴.

 

 여전히 두 소녀를 막아 선 당난영의 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누각 바깥, 저 아래에서 일어난 소란이었다. 쇠와 쇠가 맞부딪는 소리. 사내들의 고함소리.

 

 그래, 고작 열다섯 명이서 오지는 않았겠지.

 

 누각 입구 쪽을 거란인들이 막아서서는 금위군의 진입을 저지하고 있었다. 다만 숫자는 확실히 금위군이 더 많았다.

 

 "공주 전하를 잘 지켜 주련. 그 양산, 아주 튼튼하니까 여차하면 후려쳐버리련."

 

 부채를 오른손으로 옮겨쥐었다. 비어버린 왼편 손바닥으로 탁자 모서리를 후려쳤다.

 

 탁자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공주의 앞을 가로막은 벽이 되었다.

 

 "무슨 짓을...”

 

 당황하는 사내들을 향해 당난영이 다가갔다.

 

 걷는 걸음걸음 고요하고 우아하여 천상의 선녀가 내린 듯한 걸음걸이. 다가가며 끌어올린 내공을 채 못 이겨 폭 넓은 소맷자락이 한껏 부풀어올라 펄럭였다.

 

 “공주 전하를 끌고 가기 이전에, 빈도의 손발부터 묶으셔야지 않겠습니까. 빈도가 뛰어난 전사라 겁이 나신다 하였으니.”

 

 오른손에 펼쳐 든 부채가 희게 빛나자 그 표면에 글씨가 떠올랐다. 음각된 도덕경의 구절 한 자 한 자마다 아지랑이가 휘감겨 일렁였다.

 

 “자아, 어디 한 번 묶어 보시지요.”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발걸음이 가벼이 다가서건마는, 그걸 목도한 거란인들은 그 걸음마다 실린 묵직한 위압감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태평하게 내민 오른팔이 한 자루 잘 벼린 칼처럼 보였다.

 

 겁에 질려 뽑아든 칼날이 대숲처럼 얼기설기 번쩍였다. 당난영은 태연스레 그 칼날의 숲으로 들어섰다.

 

 빠른 속도로 짓쳐드는 여인의 신형이 가녀리다. 열 개가 넘는 칼날이 찰나의 시간차를 두고 차례로 쏟아져들어온다.

 

 하지만 칼날이 얽힌 그 자리에 이미 여인의 신형은 사라지고 없었다.

 

 공중에 나부끼는 흰 도포자락이 선학의 날개처럼 보였다.

 

 공중제비를 돌아 떨어지는 여인의 발끝이 한 사내의 머리 위에 착지한다. 날개를 접으며 땅에 내려앉는 학처럼 우아하고 가벼운 느낌, 그러나 그 그 발끝에는 정순한 내공이 실려 흰 불꽃이 휘감겼다. 사내는 그대로 짓눌려 쓰려졌다.

 

 쓰러진 사내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춤추듯 딛는 발걸음을 따라 흰 빛이 튀었다. 튄 빛무리를 따라 사내들의 피가 튀었다.

 

 얼굴을 향해 칼날이 날아들었다. 고개를 살며시 틀어 아슬아슬하게 흘려보내고는 그 뿌리를 향해 짓쳐든다. 우아하게 호를 그린 부채가 칼을 휘두른 이의 목을 호되게 때리자 그대로 피가 솟구쳤다.

 

 부채를 회수하며 펼치자 얼굴로 날아들던 핏방울이 가로막혔다.

 

 그대로 몸을 틀며 빈 손바닥을 펼쳐 쭉 뻗치자 다른 이가 나자빠졌다.

 

 저토록 가냘프고 여리게만 보이건마는, 이건 숫제 토끼 우리 안에 늑대를 풀어놓은 꼬락서니가 아닐런가.

 

 필경 지휘자임이 분명한, 시녀를 붙들고 협박질을 하던 사내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가 손짓을 하자 다섯 명이 무리에서 뒤로 빠져나가 칼을 놓았다. 그런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활과 화살이었다.

 

 당난영은 이 안에서 한 마리 맹수인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둘러싼 것은 그녀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토끼 떼가 아니라 사람의 무리였다.

 

 이미 물러서서 제 동료가 맞는 것도 겁내지 아니하고서 연신 살을 쏘아대는 활잡이들.

 

 당난영은 제 곁의 사내의 손목을 비틀어 검을 빼앗아서는 활잡이 한 명을 향해 집어던졌다. 강맹한 공력을 실어 집어던진 칼은 그대로 사내의 가슴을 꿰뚫어 그 뒤편으로 칼날이 삐죽이 솟아나왔다.

 

 연신 날아드는 살촉은 당난영, 그녀의 몸은커녕 나부끼는 옷자락에도 미처 닿지 못했다. 허공에 너울거리는 천자락은 날아오는 화살이 닿을 성 싶으면 기묘하게 휘어져 그것을 흘려버렸다.

 

 반면에 거란인들의 피해는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이미 서너 명이 화살을 등에 꽂은 채였다. 아니, 정확히는 옷자락에 꽂혀 덜렁대는 화살을 단 채였다. 찢긴 옷자락 사이로 가죽 갑옷이 들여다보였다.

 

 “뭘 믿었나 했더니, 고작 이런 것이었습니까, 시주.”

 

 당난영의 얼굴에 곱게 그린 미소가 섬뜩했다.

 

 자그마한 발이 보법을 펼쳤다. 빠르지 않아 보이지만 아무도 그 걸음을 막지 못하였다.

 

 덜렁거리는 화살을 그대로 움켜쥐고서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쿡 찔러넣는다. 화살은 갑옷을 뚫는 것이 아니라 마치 두부에 날카로운 송곳을 찌르듯 부드럽게 박혀들었다.

 

 “으아아아아악!”

 

 처참한 비명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또다른 화살을 매단 이에게 다가가는 그녀에게 화살이 날아들었다. 활짝 펼친 부채가 화살대를 톡 건드리자 경로가 휘어 빗나갔다. 실로 묘기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솜씨였다.

 

 날아드는 검격을 향해 부채를 펼쳐들었다. 펼쳐진 부챗살 사이 좁은 틈으로 절묘하게 검신을 끼워넣었다. 그대로 부채를 접으며 비틀자 검과 함꼐 그 주인이 홱 딸려와 나자빠졌다. 사내의 가슴팍을 밟으며 재차 부채를 비트니 굳건히 쥐인 검이 딸려올라왔다.

 

 무언가 알아듣지 못할 고함소리가 장내에 가득찼다. 사내들은 독기에 찬 눈을 번들거리며 달려들었다.

 

 당난영은 풀쩍 뛰며 팔을 휘둘렀다. 그 폭이 두 척은 족히 넘어가고도 남을 소맷자락이 휘어 한 사내의 목에 휘감겼다. 부채에 딸려온 검신의 끝이 그대로 그의 배 복판에 박혔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하셔야지요. 그래야 빈도가 옳은 길로 손수 인도해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크지 않은 말소리는 전신을 타고 흐르는 내공에 실려 실내 가득 퍼져나갔다.

 

 어느 이가 살갗을 온통 내리누르는 공포감을 떨치려 그녀의 등 뒤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파라라락 옷자락이 나부끼며 가느다란 몸이 제자리에 뱅그르 돌았다. 고운 손에는 마악 쏜 화살이 붙들리었다.

 

 이제 그 살은 제 주인의 목을 꿰뚫었다.

 

 당난영은 주인 잃은 검을 꼬나쥐었다. 넘실거리는 불꽃이 차디찬 쇠붙이를 따라 나부꼈다.

 

 일방적인 살육의 시간이 도래했다.

 

 검로에 잔상처럼 남은 불길에서 불티가 튀었다. 불티가 튈 때마다 사람이 쓰러졌다.

 

 종내에 똑바로 선 것은 당난영의 가녀린 신형 하나 뿐이었다. 한껏 부풀어 나부끼던 소맷자락은 바람이 멎은 듯 얌전히 가라앉았다.

 

 한 식경이 지나도록 한패가 내려오지 않아서일까, 계단 아래서 다급한 발소리와 무어라 외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진정된 공주의 얼굴은 이제는 더 빠질 핏기도 없는지 새파랗게 질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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