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
"공주 전하..."
두 소녀의 울먹이는 소리가 죽음과도 같은 정적을 밀어냈다.
당난영은 주변에 부서져 널부러진 탁자며 의자의 파편을 그러모았다. 올라오는 계단은 단 하나. 그 단 하나 뿐인 계단을 틀어막았다.
“공주 전하, 이제 괜찮습니다. 감히 전하를 핍박한 적도들의 목숨은 어느 하나 남김없이 빈도의 손으로 거두었으니.”
당난영은 공주를 향해 미소지었다. 희디흰 얼굴에 꽃잎처럼 번진 핏방울이 끔찍스러웠다.
“하랑, 하지만 더 많은 자들이 올라오고 있겠지요.”
“그래요, 공주 전하. 저 소리가 들리죠? 그래서 빈도가 계단을 막았습니다. 겁내지 마세요.”
“금위군에게, 내, 내가 알렸습니다. 거란인들이 있다. 구하러 오라고.”
“현명한 판단이네요. 잘 하셨습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저자들은 이제 내 목숨을 붙들고 협상하겠죠.”
“걱정 마세요, 전하. 빈도가 그리 되지 않도록 막겠습니다. 빈도를 믿으시지요?"
"네. 믿을게요. 믿을게요, 하랑."
숫제 시체처럼 보이는 소녀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방울져 굴러떨어졌다. 당난영은 도복 소매의 아직 깨끗한 부분으로 물기를 훔치고는 몸을 돌렸다.
아직 성한 의자 몇 개인가를 끌어다 파편에 얽듯 쌓아올렸다. 반대편을 향해 날카롭게 부러뜨린 의자며 탁자 다리를 삐죽삐죽 끼워 넣었다. 흡사 창을 꽂아놓은 모양새가 났다.
"양산은, 돌려주겠어요? 필요할 성 싶으니."
아까 집어던졌던 검은 다시 챙겨 시녀에게 건넸다. 거란인을 도륙내던 부채는 곱게 닦아 허리띠에 도로 찔러넣었다.
"내가 내려가면, 의자 다리를 저쪽을 향하게 해서 끼워 넣어 구멍을 막으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시녀에게도 뒷마무리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고, 좁다란 틈으로 몸을 빼냈다.
등 뒤가 완전히 막혔다. 양산을 움켜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호흡을 가다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명경지수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은 마음은 적을 마주하는 데에 가장 중한 것이므로.
계단을 뛰어오른 거란인 무리가 목도한 것은, 선녀처럼 보이는 여인이었다. 동글동글한 눈매가 제법 귀여워 소녀 티를 채 벗지 못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의 손에 들린 것은 펼쳐진 양산이었다. 실내에 펼친 양산을 받쳐 든 손이 지나치게 희고 고와 도무지 눈앞의 이 여인이 현세에 속한 존재로 보이지가 않았다.
한없이 가녀리게만 보이는 여인이 걸친 하이얀 도포 끝자락에는 붉은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점점이 번져나가는 매화꽃 송이송이 비릿한 혈향이 번져나갔다. 새로 올라온 자들은 깨달았다. 저 년이 자신의 동료를 단 하나도 남김없이 잡아먹은 요물이라고.
“처음 뵙겠습니다. 빈도는 서왕궁에서 도를 닦다 내려온 하랑이라고 하옵지요.”
“우리 형제들, 먼저 올라간 형제들은 어디에 있나!”
“글쎄요. 연약한 아녀자를 핍박하던 자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왕모님의 가르침을 좀 전해드렸답니다.”
“왕모?”
당난영은 생긋 웃어보였다. 자못 화사한 미소가 아리따웠다.
“그러하답니다. 왕모님께오서는 그대처럼 정도를 벗어나는 이에게는 자비가 없으시지요.”
당난영은 이제 펼쳐들었던 양산을 곱게 접어 늘어뜨렸다.
태평한 어조에 태평한 걸음걸이. 화사한 미소는 봄볕같으나 가라앉은 눈동자는 겨울 바람을 품었다.
그녀가 점점 다가오자 그제야 거란인들은 정신을 차렸다.
공격하라는 듯한 고성이 터졌다. 동시에 짓쳐드는 검수들은 짐승을 모는 사냥꾼이 되었다. 그리고 그에 몰리는 짐승은 한떨기 꽃과 같은 여인.
한 점으로 몰리던 칼날들이 서로 부딪쳐 쇳소리를 냈다.
분명 눈앞의 적을 찔렀다 생각한 검은 동료의 그것과 서로 엉켜버렸다. 사내들은 스스로의 멀쩡한 두 눈을 의심했다.
분명 뻔히 두 눈을 뜨고 있었건만 도통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여인은 그 자리에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방금 전과 달라진 것은 그저 양산을 쥔 오른손이 살짝 움직였다는 정도 뿐이었다.
당난영은 재빨리 물러서는 이 중 하나를 쫓았다. 단 한 걸음으로 바싹 붙어서는 두번째 걸음을 디뎠다.
디딘 곳은 바닥이 아니라 사내의 무릎이었다. 디딘 발끝이 멀쩡히 서 있던 무릎과 함께 땅바닥에 살포시 가 닿았다.
"크아악!"
그대로 쓰러지는 사내를 뛰어넘는다. 선학의 날개처럼 나풀거리는 소맷자락이 정말로 날개라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날짐승과 같은 몸놀림이 아름답다.
쓰러진 사내의 무릎은 불가능한 방향으로 구부러졌다.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내는 투명한 눈동자 바깥으로 밀려났다.
나붓하니 옮기는 그녀의 발걸음이 마냥 태평스럽다.
다만 그 발걸음이 가 닿는 곳은 태평스럽지 아니하여, 겁 먹은 사내들이 비척비척 뒷걸음질친다.
이건 숫제 접힌 양산을 느슨히 쥔 계집이 홀로 칼 든 사내 여럿을 겁주는 모양새가 아닌가. 예까지 생각이 미친 거란인 하나가 이를 뿌득 갈았다. 하나같이 검은 포삼을 걸친 와중에 다만 홀로 왼팔에 푸른 띠를 맨 자였다.
그가 고함을 내질렀다. 헐렁한 옷자락 아래로 얼핏얼핏 내비치는 단련된 몸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자의 손짓을 따라 사방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당난영은 생긋 미소지으며 양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편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신을 양산으로 비껴 흘리고 몸을 틀면, 그 빈 자리에 다시 날카로운 칼날이 베어 들어온다. 그대로 허공을 가른 칼날을 따라들어가 무방비한 가슴팍을 걷어찬다.
튕겨 날아가는 이를 다른 이들이 부축하는 사이 당난영은 뒤로 한 바퀴 휙 돌아 공중에 떴다. 가까이 선 사내의 목에 다리가 감겨 휘었다. 사뿐히 내려서는 발 마래로 목이 기묘하게 꺾인 사내가 쓰러진다.
“무의미한 살생은 원치 않았습니다만, 별 도리가 없겠군요.”
사내들의 눈은 노기로 벌겋게 달아 실로 흉험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당난영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도리어 기세를 높여 다가섰다.
훌쩍 몸을 틀면 그 빈 자리에 검격이 들이친다. 마치 미리 짠 듯 척척 맞아떨어지는 헛공격이 수십여 차례 반복된다.
다만 이것이 결코 사전에 약속된 것이 아니란 것은 사위에 나뒹구는 거란인들이 몸소 증명했다.
깃털처럼 사뿐히 거란인들의 틈바구니를 누비는 당난영이 기세를 점점 올린다.
풀쩍 뛰어올라 이편으로 검을 찔러온 사내의 등을 타고 넘었다. 흰 불꽃이 너울너울 폭 너른 소매를 타고 일렁였다. 형형한 불꽃이 감싼 소매가 방금 타넘은 사내의 목에 휘감긴다.
우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소매에서 풀려난 사내의 목이 기묘하게 꺾였다.
뒤로 물러선 자가 화살을 쏘았다. 어깨에 두른 피백이 불꽃을 휘감아 꾸물꾸물 뻗어 달려드는 이의 목을 붙들었다. 그 겨를에 끌려온 사내의 뺨에 화살이 꽂혔다.
좌우에서 찔러드는 검격. 당난영은 그저 오른손의 양산을 휘두르기만 했는데도 칼날이 비껴나갔다. 비낀 날붙이는 서로의 급소를 찔렀다.
노기 어린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엉켜 사위를 잠식했다.
비스듬히 쥔 양산은 날붙이도 아니며 그 끝은 뭉툭하기만 하건만, 불꽃을 휘감은 그것은 갑옷과 함께 살갗을 찢어버렸다.
전신에 피를 새빨갛게 뒤집어쓰고서는 지옥 밑바닥에서 튀어올라온 악귀처럼 날뛰었다.
당난영은 이미 쓰러뜨린 자를 헤아리는 것을 포기했다. 그저 가까이 오는 자들을 쓰러뜨리며 한 층 한 층 내려갈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아래층에 마침내 도달했다.
“아이고, 흐...”
숨을 고르며 다가선 출입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휘익 둘러본 사방의 창문 역시 전부 못질이 되어, 바깥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혔다. 짜증이 슬그머니 밀려올라왔다.
“하긴, 어차피 안에 공주가 어찌 되었을지 모르니 불은 못 지를거라 생각했겠지.”
출입문은 잠금장치로 잠근 것이 아니고, 탁자를 부수어 나온 판자를 덧대 못질한 상태였다.
당난영은 살그머니 남은 내력을 가늠해보았다. 워낙에 적의 수효가 많았던지라, 여유가 없어 바닥까지 닥닥 긁어쓴 탓이었다.
하지만 이 문만 열면, 바깥에는 금위군이 있다.
양산을 두 손으로 쥐고서 남은 내공 한 방울까지 전부 짜냈다.
희미한 불꽃이 양산 끄트머리에 간신히 아른거렸다.
우지직, 그대로 내려친 판자는 두 동강이 났다. 문을 열자 바깥에는 금위군이 통나무를 구해다 문을 부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문이 열렸으니 그대로 손을 놓고 달려오던 자들이 멈칫했다.
“웬 놈이냐!”
당난영은 머리부터 온통 피칠갑을 해 온통 시뻘건 상태였으니 놀랄 만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눈 앞에 이 무시무시한 꼬락서니를 한 자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아, 도사님이시군요. 공주 전하께옵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무사하십니다. 제일 위층에 계단을 막고 모셔두었으니, 올라가 보세요. 저는 예 있겠습니다.”
“예, 그럼.”
병사들은 의자 위에 축 늘어진 당난영을 두고 뛰어올라갔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가며 그 주변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바지런히 오르며 대강 헤아려 보니 쉰을 족히 넘기겠다 싶었다.
“이게 무림인의 힘인가봐.”
“아마 머릿수가 많으니까 계단을 끼고 싸운 모양인데.”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은 맞아?”
그들이 보기에도 실로 경악스러운 힘이었다.
그래도 산 자가 없는지라, 올라가는 길은 어려울 것 없었다. 가장 마지막 계단에 도달하자, 부숴진 의자며 탁자 다리를 이편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오게 해 얽어 쌓은 나무더미가 보였다.
“공주 전하, 들리시옵니까? 적도는 전부 제압하였사옵니다. 하여, 소장이 들어가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금위군 하나가 한껏 목청을 돋워 외쳤다.
“전하께오서 허하셨습니다.”
시녀의 대답.
병사들은 뾰족하게 잘린 의자 다리에 찔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나뭇조각들을 치우고 계단을 올랐다.
시체 더미 너머로 두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흰 검집에 흰 손잡이의 검을 든 공주의 시녀와, 황실 예법에 맞도록 화려한 차림을 한 공주였다.
“공주 전하, 무탈하시옵니까?”
“나는 괜찮습니다. 털 끝 하나 상하지 않았으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헌데, 하랑은...”
당난영이 보이지 않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끝을 너른 소맷자락 속으로 애써 감추었다.
“아, 그 도사라면 아래에 있사옵니다. 다만 좀 지친 모양인지 쉬겠다 하여 남겨두고 왔을 뿐이옵니다.”
“그렇습니까. 참으로, 참으로 다행이에요.”
시녀는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공주의 얇은 입술 새로 흘러나온 한숨 소리를 들었다.
금위군 병사들은 1층까지 계단과 계단 사이 길을 내듯 주욱 전포를 펼친 채 주욱 도열하였다. 황실의 안위를 책임지라 고르고 골라 뽑은 덕에 체격이 좋아, 공주의 눈에는 펼친 전포 자락이 꼭 벽처럼 보였다. 그 천으로 세운 벽 건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1층으로 내려오자 누군가 붉은 물이 든 큼직한 천을 아무렇게나 뭉쳐 출입문 가에 던져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공주는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그것에 조금씩 다가갔다.
안개에 감싸인 그것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돈다. 간신히 씻어낸 얼굴이 말가니 꽃술처럼 보였다.
하지만 얼굴만 닦아낸 모양인지, 머리카락을 따라 붉은 실이 늘어진다. 싸늘하게 식은 도포가 질척한 소리를 낸다.
"하랑."
"공주 전하."
피에 온통 젖은 그녀가 몸을 숙여 읍하였다. 겹겹이 늘어진 천자락이 꼭 만개한 작약을 연상케 했다.
"어서 일어나요, 하랑. 고생, 많았어요. 아, 옷이 젖어 춥겠군요. 애야, 내 옷을 좀 가져다 드리련.”
“아뇨, 아닙니다. 저는 시녀의 옷이면 충분합니다. 공주 전하의 옷은 움직이기가 불편하잖아요?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까요.”
“네에, 그럼.”
시녀는 제 옷 중에서 깔끔하고 색이 밝은 것으로 골라다 주었다. 당난영은 물을 구해다 머리의 핏물을 쏙 빼고 피에 전 옷도 물에 푹 담궜다. 따로이 조두를 사용한 것은 아니어도 피비린내가 가시니 절로 기분이 산뜻해졌다.
잘 빨아 보송하게 말린 옷은 약간 가칠하지만 외려 그 느낌이 개운했다.
“왜 이리 된 것인지..."
"네?"
"아니, 아닙니다. 모쪼록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일단은 출발하는 게 좋겠군요.”
공주가 앞장서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금위군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