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놀이 깔린 무림맹 내원 중묘헌, 그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두 여인이 마주 섰다.
두 사람 모두 목깃이며 장식무늬며 똑같은 도포를 걸쳤는데, 다만 오른팔에 수 놓인 선학이 한 사람은 세 마리요, 다른 한 사람은 두 마리뿐이다.
두 마리 선학이 수 놓인 소매에는 흰색과 검은색의 피백이 하나씩 걸려 그녀가 대제자임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사숙.”
두 마리 학이 수 놓인 도포를 걸친 여인이 먼저 입을 뗐다.
그녀는 제 앞에 선 다른 이보다 열 살은 족히 더 나이 들어 보인다. 저보다 한참 어린 사숙이 껄끄러워서였을까, 말꼬리가 축 늘어져서는 설설 기어들어갔다.
“사질. 사부님은 안에 계시는가? 내가 뵈옵고자 하더라고 말씀 좀 올려 주시게.”
선학 셋이 나란히 수 놓인 도포 차림의 당난영 역시 나이도 제법 위인데다 자신을 껄끄러이 여기는 사질을 대하기가 썩 편하지는 않은지라, 나가는 말이 영 딱딱하다.
“예, 우선 들어오시지요.”
들어선 건물 안은 어둑하니 냉기가 온 바닥에 깔렸다. 당난영 또래 내지는 그녀보다 어린 사질들은 죄 어디론지 출타하여 좌우로 주욱 늘어선 방안이 온통 조용했다.
“어서 올라오시랍니다, 사숙. 저는 사제들을 봐주러 가봐야 해서 죄송하지만 자리를 먼저 뜨겠습니다.”
딱히 답을 구하려 던진 말은 아닌 모양인지, 사질은 그대로 등 돌려 나가버렸다.
당난영 역시 조금은 무례하게 느껴질 법한 사질의 행동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서둘러 계단을 올라 가장 안쪽의 방으로 향했다.
아마도 지금 그녀를 가장 따스하게 보듬어 줄 이가 자리한 그곳으로.
“스승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서 들어오렴. 네가 내게 언제부터 그리도 예를 갖췄다고 그러느냐?”
“네, 그럼.”
열린 방문 안쪽에는 소현 진인이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세월이 얹혀 옅게 패인 주름마다 연륜이 고인 중년의 얼굴. 쉰이나 되었을까. 하지만 그 얼굴을 감싸고 굽이치며 흐르는 머리칼은 은사 타래를 풍성하게 엮어 늘어뜨린 듯 보인다.
춥지도 않은지 활짝 열린 창문으로 비쳐들어 온 저녁놀은 주황색 불빛이 되어 소현 진인의 머리카락에 온통 젖어들어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은사로 수를 놓은 듯 온통 흰 눈썹이 부드럽게 휘어 노을 빛깔만큼이나 따스한 미소를 짓는다.
“어서 앉으려무나.”
소현 진인이 자신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손짓했다.
당난영이 의자에 앉아 옷자락을 갈무리하는 사이, 소현 진인은 다호에 흰 찻잎을 넣고 물을 채웠다. 자기로 된 다호를 진인이 쓰다듬자 그 안에서 김이 조금씩 밀려 나왔다.
“그래, 장안은 어떠하였니? 황궁에도 가 보았느냐?”
“말도 마세요, 스승님. 아휴, 무영검인지 나발인지가 감시역을 붙였었다구요.”
“무영검? 아, 명아, 아니 효명 말이구나.”
“명아라니, 그거 그 작자의 아명이에요? 스승님,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아시는 건가요?”
“어흠. 그래, 그렇단다.”
과연 일전의 가까워 보이던 모습은 착각이 아니었다.
“너처럼 손수 제자로 거두지는 아니하였어도, 반쯤은 자식이나 마찬가지란다. 네게는 오라비와 같다고도 할 수 있겠구나. 무공에 넋을 빼서 좀 모자라기는 하여도 나쁜 아이는 아니니 너무 미워하지는 말렴.”
“네, 네에.”
소현 진인은 안타깝다는 듯이 당난영을 바라보고는 다호를 집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찻물이 기울어진 다호에서 잔으로 미끄러진다. 옅은 노란색을 띤 투명한 찻물은 청명한 향기를 한껏 자랑했다.
“원, 네가 이리 월영단 쪽으로 얽힐 줄 알았으면 효명, 그놈에게 미리 언질이라도 줄 것을. 내 게으름 때문에 애꿎은 네가 고생했구나, 랑아.”
“아뇨. 저는 괜찮아요, 스승님. 저는 정말로 말짱해요. 제가 부주의한 것도 있었으니.”
마주앉은 사제지간은 다향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었다.
주로 입을 여는 쪽은 당난영이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새가 지저귀듯이 스승에게 말했다.
기루에서 겪었던 일, 은소소와 만났던 날, 장안이 어떠하고 대명궁이 어떠하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가 줄줄줄 풀려나왔다.
당난영은 한참을 떠들어대다 목이 말랐던 모양인지 찻물을 들이켰다. 소현 진인은 그런 제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모양인지 말을 꺼냈다.
“은소소라고...”
“네에, 아는 사람이세요?”
“아니, 그건 아니란다. 다만... 내가 당씨세가와 연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 것이 기억나지?”
“물론이죠.”
“당씨세가 출신인 옛 친우에게 들었단다. 언제나 가주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은(隱)씨 일가가 있다고 했었지.”
“그러면 그 사람이 그 은씨 일가의 사람인 걸까요?”
“아마도 그럴 듯싶구나.”
“그러면 그 이야기도, 그 사람도 믿어도 될까요? 그래도 되는 거겠죠?”
“글쎄다...”
소현 진인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늦깎이 제자가 항상 걱정스러웠다. 우연히 주운 날부터도, 그 제자가 옛 친우의 혈육임을 알게 된 뒤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제자가 기어이 숨기고 숨기다 낙양행을 결정한 날이 되어서야 알려준 본래의 성명. 처음 만난 날에 알려줬던 기명도 아니요, 기명임이 뻔한 그 이름 대신에 지어준 이름도 아닌 본명 석 자. 당난영, 그 석 자는 재차 그녀가 옳게 판단했다 알려주었더랬다.
고작 아홉 살 나이에 천애 고아 신세가 되었던 당난영은 믿을 만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 소현 진인이 거두어 자신의 사문으로 들인 뒤에도 그 상황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왜인지 모를 끌림에 대뜸 자신의 제자로 올린 탓에 여러 제자에게 배척당해야 했다.
“그래, 믿을 이가 드물지... 그래서 더 믿고 싶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네?”
소현 진인의 머릿속에 은소소의 이야기에 달아 옛 나날이 떠올랐다. 그 때문에 꼭꼭 숨겨두던 안쓰러움이 절로 흘러넘쳤다. 흘러넘친 감정의 파편에 늦둥이 제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아니란다. 우선은 완전히 믿지는 않는 것이 좋겠구나. 혹시 모르니 말이야.”
“네, 스승님.”
"저어, 소현 진인, 계십니까?"
난데없는 사내의 목소리.
두 사제는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바빠 문밖의 인기척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도 익숙한 목소리인지라.
"모용 대협 맞으신가?"
"예, 그보다 대협이라니, 간지럽습니다. 어차피 저희 단원 하나도 이리 와 있겠지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진인?"
"물론이지. 어서 들어오시게."
무영검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남는 의자가 있으니 그리 앉게. 그보다 어인 일인가?"
"사실 진인보다는 저희 단원에게 볼일이 있어서. 아, 감사합니다."
소현 진인이 무영검에게 찻물을 채운 잔을 건넸다.
"에, 단원, 음 그러니까 하예랑에게 볼 일이 있어서요."
"예? 저요?"
"포주까지 다녀오느라 피곤하겠지만, 일 하나 더 해 줬으면 하는데."
"무슨 일이요?"
"아니, 애가 이리도 곤해하는데 무에 또 부려 먹으려는 게야?"
"아이고, 진인, 좀 진정하시고 끝까지 듣고나 말씀하세요."
"어흠, 그래. 말해보시게."
"우리 사이에 새삼 점잔을 빼고 그러십니까. 아무튼, 12무단의 각 조 조장들 몇몇이 임기가 끝났습니다. 하여 일부는 맹에 남기도 하고, 일부는 본가로 돌아간다는군요."
"헌데?"
"이 돌아가는 자 중에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있습니다. 워낙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고, 하랑과는 인연이 있으니 배웅 겸하여 함께 다녀와 달란 이야기였습니다. 간 김에 강남 구경도 좀 해도 좋고요."
"흐음, 그런가. 얘야, 랑아야, 너 강남 가본 적 있니? 조금 혼란한 와중이기는 하겠다만 날씨도 따뜻하고 여러모로 좋을 듯싶구나."
"아뇨, 가본 적 없어요. 좋다고 말씀만 하지 마시고 데리고 가봐 주셨어야죠. 스승님도 차암."
"아아, 그렇구나. 내가 쭉 산에 틀어박혀 있느라고. 한 번쯤 데리고 다녀올 걸 내가 잘못했구나."
"괜찮아요. 이참에 잘생긴 옥화검랑 대협이랑 다녀오지요."
당난영은 후훗, 하는 웃음을 나직하게 덧붙였다.
"얘가 뭐라는 게야."
소현 진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나, 스승님도 차암. 제가 보통 여염집 아낙이었으면 진즉에 노처녀 소리 들을 나이라구요."
어느새 스물 여섯. 이 겨울이 지나면 스물 일곱이 된다지만, 까르르 하고 터뜨리는 애교스러운 웃음이 아직도 소녀 같다.
"그, 어흠. 아무튼, 원단절을 지낸 뒤에 떠나기로 했다니, 그 전에 잠깐 들렀으면 하네."
"네, 부단장님."
무영검의 방을 나서는 등을 바라보는 당난영의 눈이 샐쭉했다.
완전히 닫힌 눈을 보자마자 툴툴거리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인지."
당난영은 아직도 미간에 한껏 주름을 잡은 채로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아직 그 자리에 무영검이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짜고짜 매질에, 뒤통수는 쳐놓고 감시역을 딸려 보내지를 않나. 이번엔 강남에 보내서 강물에라도 던져버리려는 건 아니겠죠?"
"저 아이도 더 알아볼 것을, 하며 후회했단다. 퍽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내게 말했지."
"저한테는 말 하지 않았는걸요."
"언젠가는 이야기하겠지. 안 그래도 내가 제대로 혼을 내주었단다."
"저한테 제대로 사과하면 그때 가서 풀지요."
* * *
원단절 전야인 제석, 당난영은 붉은 대수삼 위에 붉은 피풍의를 걸치고서 일월전 문을 나섰다.
치마와 저고리는 여전히 흰색이지만, 도복은 아니다. 두텁게 짠 흰 비단 바탕에 붉은 계통으로 장식을 더해 원단절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게 한 물건이다.
걸음걸이를 따라 치맛자락이 흔들릴 때마다, 걸음을 따라 홍매화가 흩날린다.
홍매화 향을 함빡 머금은 바람 위로는 온통 붉은 등이 조롱조롱 매달려 붉게 빛났다.
당난영은 장원 부근의 높이 솟은 누각으로 향했다.
누각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낙양은 붉은 등불의 바다에 잠기어 반짝거린다. 끝없이 늘어선 발간 불빛이 고와 자신의 마음도 함께 반짝인다.
창 밖 까만 하늘에 형형색색의 불꽃이 번지기 시작한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건만 사위가 온통 오색으로 밝게 물들었다. 폭죽 소리와 함께 빛나는 꽃잎이 온 하늘에 흩날려 어둠을 밀어낸다.
"새해에는 복수의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기를..."
허공에 잔뜩 수 놓인 불꽃을 보노라니 죽은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 젊은 나이에, 어린 딸을 두고서, 외롭게 죽어간 사람. 그리고 그 목숨을 빼앗은 자.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우고도 남아 입술 너머로 흘러넘친다.
"복수?"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 사이를 뚝 끊고 들어오는 목소리.
울림도 좋고 부드러운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소름이 돋는다. 귓가에 차디찬 비늘이 스치는 감각.
"...장 부군사님."
"아름다운 밤일세."
술잔을 왼손에 쥔 사내. 사내의 몸이 큼직한 창문 앞으로 향한다.
화려하게 터지는 불꽃놀이를 등진 부군사의 모습은 고왔다.
"아, 음. 그저 무림에 몸담은 자들 중 복수할 것 하나 없는 이가 몇이나 되겠어요? 아니 그렇습니까?"
"그도 그렇군."
일반적인 이야기로 당황을 애써 덮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눈초리는 여전히 이편을 향했다. 작은 몸으로 꼭꼭 숨긴 비밀을 찾아 혀를 날름거리는 미소가 섬뜩하다.
"그보다, 강남엘 간다지."
"네, 옥화검랑 대협과 동행하기로 되어 있다 들었습니다."
"그 근방은 지금 혼란스러워. 오(吳)왕가가 들어선 것도 제법 되었는데도 여전히 평정하지 못했으니. 게다가 작금의 황제 폐하께도 불손한 태도를 견지하더군."
"그렇습니까."
"그쪽도 머리가 있다면 슬슬 무림인의 힘에 관심을 둘 테지. 그리고 그곳에는 남궁세가가 있고."
"아, 알겠습니다. 혹여나 남궁세가가 오왕과 결탁한 것은 아닌지 살피라는 거군요. 좋으나 싫으나 지금의 황실과 맹은 한배를 탄 셈이니."
"역시 영리하군. 뭐, 장강 변은 풍광이 아름답지. 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테니. 동도를 믿지 않고 몰래 감시한 것에 대한 사죄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네."
"별 말씀을요."
"알아들었다면 슬슬 행장을 꾸려 두도록. 파오(破五)날에 출발할 테니."
"알겠습니다."
순전히 그 말만을 하러 왔던 모양인지, 장상진 부군사는 금세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당난영은 그 뒷모습 대신에 하늘을 한참 더 바라보았다.
백화요란, 오색의 꽃이 저마다의 빛을 뽐내며 화려하게 피었다 지는 그 광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