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고서 당난영과 남궁익, 팽준호 세 사람은 다시 길을 나섰다.
무창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양의 남방을 가로막은 백하(白河)을 건너야 한다. 가문 계절이라 물이 줄었다 하여도 백하는 제법 깊고 강폭도 너른 편이라 배를 타야 건널 수 있다.
하여 셋은 나루터로 향했다.
다행히 강을 건너려는 사람이 별로 없어, 어렵잖게 큼직한 나룻배를 구할 수 있었다.
“허허, 감사합니다요!”
사공은 바가지다 싶을 만치 비싼 삯을 요구했지만 남궁익은 흥정하지 않고 달라는 대로 건네주었다. 그래서일까 사공의 검게 그은 얼굴에 싱글벙글 살가운 웃음이 잔뜩 묻어난다.
“어디 유람 가십니까요?”
“그렇네. 강남이나 한 바퀴 주욱 돌아볼까 하고 말이지.”
“아이고, 그러셨군요. 강남에는 봄도 여름도 금방 온다 들었습니다요.”
사공은 입으로는 돈을 낸 남궁익과 무어라무어라 한담을 나누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다부진 팔이 움직일 때마다 나룻배는 물살을 가르며 죽죽 앞으로 나아갔다.
덕분에 도강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그럼, 수고하시게.”
일행은 관도를 벗어나 숲길로 접어들었다.
관도가 길이 잘 닦여 편하기는 하지만, 주요한 도시끼리 이어지게끔 만들다 보니 가끔은 그 길을 따르다 보면 빙 둘러 가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지금 당난영 일행이 그런 경우라, 극들은 관도 대신 숲길을 통해 곧장 가기로 했다.
어차피 말을 타고 가니 신발이 더러워질 걱정도 없다.
숲에 들어서자 공기가 확 바뀌었다.
온 땅을 뒤덮었던 낙엽이 겨우내 눈을 맞고 얼었다 녹아 바스러져 흙과 뒤엉켜 폭신하게 밟힌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습한 낙엽 냄새가 물씬 올라온다.
잎을 전부 떨어뜨려 헐벗은 나뭇가지에는 조금씩 생기가 차오른다. 칙칙하게 죽은 색 대신에 초록색이 감도는 마디마다 연두색 비늘이 뾰족이 돋았다.
도시에는 아직 코빼기도 비추이지 않은 봄이, 인적 드문 숲속으로는 벌써 발자국을 잔뜩 남겨 놓았다.
“벌써 봄이 오나 봐요. 벌써 새순이 돋을 준비를 하네요.”
나뭇가지처럼 생긴 비녀로 고정해 반을 틀어 올린 당난영의 머리 위에는 이미 봄이 한창이다. 연두색 비단을 엮은 보요가 만개한 벚꽃 다발 아래에 매달려 걸음을 따라 달랑거린다.
“그러네. 확실히 공기도 따뜻해졌고, 흙도 녹고 있고 말이지.”
녹은 땅 군데 군데가 진창이 되어 질퍽하게 말굽에 엉기지만, 그도 나쁘지 않았다. 흙냄새는 축축하지만 묘하게 포근하여 사람의 신경 줄을 누그러뜨렸다.
“확실히 하북이랑은 공기가 다르긴 다르네. 강남은 더 따뜻하죠, 남궁 형?”
느긋하게 이야기하며 말을 몰던 그때, 당난영의 코끝을 스친 바람이 묘한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럼. 강남은 따뜻하지. 겨울에도 눈이 거의 오지 않는다고. 온다고 하면 비나 올까.”
“겨울에 눈이 안 온다고요?”
남궁익과 팽준호는 느끼지 못한 모양인지 여전히 느긋하게 날씨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런 둔한 작자들.
당난영은 말을 씹어 눌러 목구멍으로 도로 밀어 넣었다.
희미하게 실린 그을음 냄새. 하지만 하늘 어디에도 연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긴 감각에 그제야 인기척이 잡힌다. 열 명은 족히 넘을 숫자.
“겨울에도 뱃놀이를 할 수 있, 어?”
한참 떠들어대던 두 사내도 그제야 느낀 것일까. 남궁익의 말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왜 그래요? 아, 인기척... 이런 데에 사람이.”
“그래, 그것도 꽤 많이. 대관절 무슨 일이지?”
“뭐 그런 걸 따지고 있어요.”
팽준호가 앞으로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웬 놈들이냐!”
그의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울려 퍼졌다.
질척한 발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를 굶었는지 도드라진 광대뼈 아래에는 짙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안색도 파리한 것이 건강이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바싹 말라 뼈마디가 보이는 손에 쥔 것은 허술하게 만든 창.
피골이 상접한 몸뚱이에 걸친 누더기는 삐죽삐죽 지푸라기가 튀어나와 차림새가 남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아래가 거무죽죽하게 푹 꺼진 눈만은 독기에 차 번들거린다.
“남양 시장에서 아주 큰 돈을 내놓는 것을 보았지. 주머니가 아주 넉넉한 모양인데 여기다 털어놓고 가라. 그러면 몸은 성히 보내주지.”
“녹림도였나.”
황도에서 멀어질수록 천지가 혼란해진다.
채 평정되지 않은 지방 군벌은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황제를 우습게 여겼다. 그 황제가 이미 장성하였음에도 그들은 종전처럼 백성을 쥐어짜, 그 고혈로 곳간을 채우고 화려한 누각을 높다랗게 지어 올렸다.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제 뿌리를 스스로 뽑아 깊은 산으로 도망쳤다.
사나운 짐승을 피해, 호랑이보다 무서운 관원을 피해 한 곳으로 모인 이들. 처음에는 그저 화전이나 일구던 이들이었으나, 수가 점점 불어나자 그 성질이 바뀐다.
종내에는 이리 녹림도 노릇을 하게 된 부락이 천하에도 수없이 많았다.
“못 알아들었냐? 무사히 지나가고 싶으면 통행료를 내란 말이다!”
악에 받친 목소리가 숫제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이런 미친...”
“진정해라.”
왈칵 화를 내려는 팽준호를 남궁익이 말린다.
“이보시오, 가진 걸 다 내어놓으면 우리는 여비도 없이 어쩌라는 말이오? 우리도 안경까지 가야 하는 처지라 여비가 많이 필요하니. 그러지 말고, 이것을 받고 우리를 좀 보내주시오.”
남궁익은 제 허리띠에 매달린, 손바닥 반만 한 옥패를 풀어 사내에게 던졌다.
제법 선명한 푸른색을 띤 벽옥을 깃털 모양으로 조각하고 깃털 결을 따라 은을 가늘게 상감한, 보기 드문 물건이었다.
사내는 받아든 옥패를 요리조리 살폈다. 그 사이, 하나같이 남루한 행색을 한 이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당난영 일행을 둘러쌌다.
“어느 집안의 도련님인지는 몰라도 역시 값진 물건을 지니고 다니는군그래.”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옥패에, 사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로는 모자라겠는데.”
“허, 그게 값어치가 얼마나 하는지는 알고 그러시오?”
헛바람을 들이킨 목소리가 나왔다.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화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우리가 몇인데 달랑 이거 하나로 배를 채우느냐는 말이잖아. 게다가 상납도 해야 하고.”
“아주 이름난 장인의 물건이오. 그거 하나 살 돈이면, 열 명이서도 올봄 넘기는 데에는 넉넉할 터인데, 모자란다는 말인지?”
“우리만 먹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여기 있는 열다섯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닐 거고.”
“흐음, 뭐 좋소. 더 드리지.”
남궁익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을 내리누르며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 손끝으로 상투에 꽂힌 순금 비녀가 닿았다.
“아, 그런데 상납이라니?”
“사천별림(私天別林)이라고 들어 봤나 몰라. 우리는 거기 가입했거든. 정기적으로 상납금을 보내야 하니까.”
비녀에 시선을 죄 빼앗긴 사내가 무의식중에 대답했다.
“사천별림? 아, 그러니까, 그냥 굶주림에 지쳐 나선 가여운 이들이 아니라, 사파의 주구라는 말이렷다.”
애써 누르던 짜증이 울컥 솟는다.
비녀로 가까이 갔던 오른손을 허리에 찬 검대로 돌린다. 손잡이를 움켜잡은 찰나.
“워, 도련님, 진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남궁익과 팽준호가 앞으로 나선 사이, 뒤로 처져 있던 당난영의 목을 향해 두 사람이 창날을 겨누었다.
“어, 그러니까, 인질이라도 잡겠다, 그건가?”
본래의 풍속에 더하여, 천지가 혼란하다 보니 성별에 무관하게 어지간한 사람들은 허리에 장검을 차고 다니는 시절이다.
그런 탓에 당난영이나 남궁익의 허리에 매달린 장검도, 팽준호의 등에 매인 거도도 이들을 무림인으로 보이게 하기는 어려웠다.
“허, 허...”
두 손을 들어 올린 당난영을 보던 팽준호의 잇새로 푸시시 바람 빠지는 허탈한 소리가 샜다.
“음, 어찌하면 좋을까요, 소협?”
당난영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들을 포위한 녹림도들은 독기가 올라 눈은 벌겋지만, 그와 별개로 특별히 뛰어난 무술을 익힌 듯 보이지는 않았다.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해 마른 몸에서 특별한 신력이 나올 리도 만무하고, 그렇다고 대단한 기도가 느껴지지도 않으니.
“그래, 인질 좋지.”
남궁익은 그대로 말에서 내려서 검대를 풀었다. 죽일 생각은 없다는 듯, 손에 검집째로 검을 꼬나쥐었다.
“할 수 있다면 해 보거라.”
그대로 처음에 나섰던 사내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간신히 칼을 막아낸 사내의 귀에는 그가 기대했던 여인의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너른 천이 휘날리는 소리.
마치 보통의 계단을 오르듯 안장을 내디디고 그다음 디딘 발걸음은 어느샌가 교차한 창대 위. 다리에 척척 감기는 흐늘거리는 치맛자락이 거치적거리지도 않는 걸까.
그대로 창대를 딛고 공중으로 붕 뜬 신형이 빙그르 돌아 사뿐히 착지한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몸놀림이 우아하다.
“허, 허어...”
녹림도 사내들은 하나같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저게 사람이 할 수 있는 몸놀림인가. 혹시 귀신이 아닐까 싶은 얼굴.
“빈도는 학명산에서 내려온 하랑이라 하옵지요. 도복을 입지 않아 여염집 아낙이라 오해하신 모양이로군요. 오해하시게 하여 송구스럽습니다.”
당난영은 사뿐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하면, 남궁 소협, 팽 소협, 어찌하면 좋겠는지요?”
“하 낭자, 주변이 온통 진창이라 옷이 더러워질 것 같으니 일단 몸을 빼시지요. 어차피 저랑 남궁 형 둘이서도 차고 넘칠 터이니.”
“그러면, 팽 소협, 빈도는 좀 피해 있겠어요.”
“그러시지요. 게다가, 힘쓰는 일을 여인에게 떠넘기자면 장부로서 면이 살지 않잖습니까.”
“네, 그럼.”
그녀는 제 앞을 가로막아 선 사내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넋 나간 표정을 무시하고서 어깨를 밟으며 다시 한 걸음. 그리고 바로 다음 걸음은 그 뒤편의 나무 위로.
단 세 걸음으로 나무 위로 올라선 몸놀림은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으리라.
경악에 찬 표정을 지은 녹림도들은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덩치도 크고 힘도 셀 것처럼 보여, 호위 무사라 생각했던 팽준호는 당연히 보이는 대로의 괴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저 한량인 부잣집 도련님이라 생각했던 남궁익의 검격이 어마어마하게 묵직하여.
비단 일격의 묵직함 뿐 아니라, 그 몸놀림 역시 평범한 사내들은 도저히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만치 빠르다.
처음에 나섰던 사내가 아마 대장이었던 모양인지, 나자빠지는 다른 자들을 다그쳐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이미 눈동자에는 공포가 스민 뒤였다.
나름대로 형과 식을 갖추어 길을 따르는 창날. 그러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는 그 둘을 대적할 수 없었다.
“이 겁쟁이들이!”
대장인 사내가 이를 부드득 갈며 창을 내찔렀다.
설렁설렁 봐주며 검을 휘두르던 남궁익을 향해 날아드는 창날이 곧은 선을 그린다. 금속성의 차디찬 빛이 목을 스친다.
방심하던 터라 반응이 늦었다.
몸을 틀어 피해 꿰뚫리는 것은 면하였다 하여도 왼쪽 목에서부터 턱을 타고 귀 바로 옆까지 핏물이 어렸다.
“감히!”
남궁익은 오죽 배가 고팠으면 사천별림에 들면서까지 산적질을 할까 싶어 그들을 가엽게 여겼다. 하여, 그저 겁만 주어 쫓아버릴 생각으로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
하지만, 턱을 스친 창날에 그의 눈동자가 홱 돌았다.
“사파의 개들 주제에!”
검집째로 검을 휘두르는 손끝이 매서워졌다.
팽준호는 남궁익이 자신의 미끈한 얼굴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았다. 거기에 상처를 냈으니 그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났을지도. 그래서 슬며시 뒤로 빠졌다.
비 오는 날에도 먼지가 날릴 만치 얻어맞은 녹림도 사내들이 비칠비칠 도망친다. 다들 어딘가 심하게 다친 모양인지 서로 부축하며 절뚝절뚝 달음질쳤다.
“후우...”
“남궁 소협, 괜찮으신가요?”
나무에서 내려선 당난영이 곧장 다가왔다. 어느샌가 말안장에 매달아 두었던 물통을 든 채였다.
“그저 스쳤을 뿐이야. 크게 다친 것이 아니니 아마 괜찮겠지.”
“어디, 좀 볼게요.”
남궁익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 몸을 숙였다.
섬세한 손가락이 목과 턱에 흐른 피를 씻어내고 혈선을 따라 약을 발라나갔다.
“서왕궁의 특제 연고랍니다. 흉터가 남지 않게 도와줄 거예요.”
“고마워, 하 낭자.”
“형도 참, 거 턱에 칼자국 있으면 아주 사내답고 보기 좋겠구만, 너무 씩씩대지 좀 말아요.”
“시끄러워, 이놈아.”
남궁익은 팽준호의 옆구리를 찰싹 때리고서 말 등에 올랐다.
어느새 주웠는지 옥패가 허리에 매달려 달랑거린다.
“그럼, 다시 출발하지.”
일행은 신발에 진흙이 좀 묻은 것 외에는 별달리 바뀐 것 없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