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데, 그냥 가는 겁니까?”
말을 몰던 중, 팽준호가 입을 뗐다.
“무얼 말이야?”
“저래 보여도 산적이고, 또 사천별림에 몸담은 자들이니 후환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잖아요.”
“되었다. 그저 제대로 된 무공도 익히지 않은 자들에게 너무 독한 수를 쓴 것 같아 그게 염려스러울 뿐이니.”
남궁익은 약이 끈적거리는 모양인지 표정이 썩 밝지 못했다.
“남궁 소협, 관아에 일러두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화전민들이 도적으로 변하는 일이 잦다 들었는데, 아까 그자들도 그런 무리일 테지. 맞은 데가 나을 때쯤엔 농사를 짓는 일이 바빠져서 별달리 민가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야.”
“그럴까요? 뭐,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요.”
“뭐, 그럴 겁니다, 하 낭자. 어차피 별달리 힘이 있는 자들도 아니고. 그보다, 황학루는 처음이라 하셨습니까?”
“네에. 저야 쭉 스승님 곁에서 지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스승님은 학명산은커녕 바로 아래의 도관에도 거의 내려가지 않으셨고.”
“허어...”
두 청년은 당난영이 뱉은 대수롭지 않은 한 마디 말에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많은 무림 세가 중에서도 한 손에 꼽을 만 한 명문 중의 명문. 남궁세가와 하북팽가는 그런 가문이다.
두 청년은 그런 가문의 적자니만큼 어린 시절부터 이곳 저곳 집안 어른을 따라 강호 유람을 다니고는 했었다.
그러니 어려서 천애 고아가 되어, 철이 들고 성년이 될 동안 줄곧 깊은 산속 오지에 틀어박혀 지냈다는 그녀가 가여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 저는 괜찮답니다. 학명산은 성지 중의 성지. 살아 그런 곳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운이 좋나요.”
“그런가.”
“물론입니다. 게다가 이리 철이 들고 나서, 훌륭한 경치를 처음 목도한다면 감상이 또한 남다를 터이니, 그 또한 좋은 일이겠지요. 세상만사가 마냥 밝은 면만 있는 것도 아니요, 그저 어두운 면만 있는 것도 아니니.”
“대, 대단하네요, 하 낭자. 뭔가 어렵긴 하지만...”
“그저 사문의 가르침일 뿐, 대단치 않답니다. 팽 소협도 제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계실 터이니 너무 어렵다 생각 마시어요.”
“그래, 네가 배움이 좀 짧기는 하다 마는 그게 그리 큰 흠도 아니잖냐.”
"어후, 그만 놀려요."
"하하, 그보다 어서 가자."
"그래요, 저도 황학루가 궁금하네요, 팽 소협."
그리하여 세 사람은 쉬는 시간을 아껴 가며 사흘을 내리 말을 몰았다.
남평(南平)을 거쳐 오(吳)의 북서쪽 끝으로.
사위에 어스름이 깔릴 무렵, 그곳에 자리한 호반의 도시 무창에 도착했다.
"어머나, 호수가 정말 넓네요. 호수가 이리 큰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당난영의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가득 들어차 휘둥그레 커졌다.
바다는커녕 강줄기도 없는 곳에서 자란 그녀는 이리 물이 잔뜩 고인 것이 신기해 어쩔 줄 몰랐다.
아마 동행이 없었더라면 당장 달려가 손이라도 담갔을지도 모를 정도로.
"무창 인근은 호수가 아주 많아. 아마 수소문해보면 뱃놀이도 할 수 있을걸."
"뱃놀이요? 이리 커다란 호수에서 말인가요?"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반짝했다.
물론 기루에 있다 보면 정원에 연못이 달린 저택에 나가기도 한다. 그런 연못에 배를 띄우고서 춤을 추거나 악기를 연주한 적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연못은 기껏해야 가슴께 깊이에 썩 넓지도 않은, 그야말로 연못이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호수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넓다. 깊이도 얼마가 될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아아, 이런 곳에 배를 띄우고 논다면.
수평선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황학루와 도시의 불빛. 검게 보이는 수면에는 부스러진 빛의 파편이 흩뿌려져 영롱하기 그지없다.
당난영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뱃놀이도 해 보고 싶네요."
"그럼 무창에 닿거든 좀 알아봐야겠는데."
"와아, 정말 기뻐요."
"어, 그런데 하 낭자는 수영은 할 줄 압니까?"
멍하니 있던 팽준호가 끼어들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수영은, 음, 아뇨. 해본 적이 없는걸요. 괜찮을까요?"
"일단 뱃놀이용 배라는 게 크기가 좀 작아서 불안하지요, 아무래도. 저는 간신히 물에 뜰 정도밖에는 못 하는지라, 뱃놀이를 썩 즐기지 않습니다, 하 낭자."
"물도 깊어 보이는데, 그리 말씀하시면 갑자기 무서워지잖아요."
그녀의 겁먹은 토끼 같은 얼굴이 퍽 귀여웠다.
"너무 그렇게 겁주지 않아도 된다. 호수에 풍랑이 일 것도 아닌데 무에 물에 빠지겠느냐."
"남궁 소협, 그런가요? 걱정할 필요 없는 건가요?"
"물론이지. 게다가 설혹 빠진다 하여도 이 몸이 구해줄 것이니."
"아아, 남궁 소협은 수영을 잘 하시는 모양이군요."
"남궁세가의 사내에게 수영쯤은 기본 소양이야. 게다가 나는 그중에서도 잘 하는 축이고."
"와, 대단해요."
당난영의 감탄하는 눈빛.
호감을 둔 미인이 그런 눈으로 바라보자, 남궁익은 왠지 어깨가 으쓱해졌다. 조금 거만한 웃음이 입가로 베슬베슬 새어 나온다.
"그 정도쯤이야. 그보다 오늘은 번듯한 숙소에서 그럴듯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겠군."
"그러네요."
"아, 슬슬 배가 고프네. 남궁 형, 우리 말을 좀 서둘러 몰지요."
"그래, 그러자."
호수 사이로 난 길을 달리고 장강을 건너, 정말로 무창에 입성했다.
장안이나 낙양처럼 불야성을 이루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밝게 불을 켠 건물이 제법 눈에 띄었다.
세 사람은 그중에서 제법 크고 번듯한, 3층짜리 객잔에 들어섰다.
세 사람은 거기서 각기 객실을 잡고서 늦은 저녁 식사를 했다.
확실히 풍요로운 강남이라, 요리는 재료도 풍성하고 숙수의 기교도 상당하다. 그 덕에 맛도 맛이지만, 향기가 대단했다.
객실도 외견만큼이나 넓고 호화로워서 일행의 여독을 말끔히 녹여 주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훤히 밝고서애 남궁익은 잠에서 깼다. 3층 투숙객 전용의 객당으로 나가보니, 당난영이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잘 잤나?"
"아, 남궁 소협, 일어나셨네요. 저야 잘 잤지요."
잠에서 깬 것이 얼마 안 된 모양인지, 긴 머리칼이 부스스하게 늘어졌다.
그래도 낯은 희고 보송보송하다. 여느 때와는 달리 발그스레 물든 뺨이 눈길을 붙든다.
남궁익은 자꾸만 그녀의 뺨으로 향하는 눈을 애써 창밖으로 돌리며 말을 받았다.
"준호 녀석이 안 보이는데. 설마 아직도 안 일어난 것은 아닐 테고."
"팽 소협은 몸을 움직여야겠다며 칼을 들고 나갔어요. 객잔에 후원이 딸려 있다더군요."
"그 녀석답네. 황학루에는 사람이 많을 터이니 좀 서두르는 것이 좋지 싶어."
"그럼 점소이에게 불러오라 시키지요. 저는 일단 먼저 들어가서 단장을 좀 하고 나오겠습니다."
"음. 내가 직접 내려갔다 오지. 먼저 준비하고 있어."
당난영은 남궁익을 내려보내고서 객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반만 틀어 올려 비녀 세 개와 빗으로 고정하는 것으로 몸단장을 마무리했다.
흰 저고리 위에는 상아색 대수삼을 걸친다. 대수삼의 소맷단과 목깃을 따라 굽실굽실 은사 덩굴이 휘감겼다.
그 아래에는 연한 분홍색의 치마. 하늘하늘 늘어지는 치맛자락에 때늦은 백매화가 한가득이다.
걸음걸음 옷자락이 살랑이면 사철의 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원 같은 향이 발걸음을 따라 똑똑 흐른다.
그 향기는 그녀의 미모보다 화려해, 스쳐 지나가던 이의 발걸음도 불들 정도였다. 그런 만큼 금세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있던 남궁익과 팽준호 역시 황학루로 가는 동안 그녀에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무림세가 출신인 만큼, 그 모친부터 시작하여 일가의 누이들부터 하다못해 하녀에 이르기까지 그들 주변의 여인은 누구 하나 몸을 단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다들 꽃향기보다는 묘한 땀 냄새를 풍겼다.
그런 와중이라 더더욱 당난영의 체향이 자극적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향기가 좋네요.”
결국, 팽준호가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네?”
“아, 아닙니다.”
어차피 내뱉은 말은 도로 주워섬길 수 없거늘, 팽준호는 당난영의 반문에 얼굴을 조금 붉히며 흐른 말을 가렸다.
“후후, 향기가 좋지요? 서왕궁에서는 꽃 향기를 모아다가 빗질을 할 때, 머리카락에 바른답니다. 명문가 출신인 속가제자들도 이 향기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더군요.”
“아아, 네, 음. 그, 그렇습니까.”
당난영은 팽준호의 생글생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황학루는 그들이 짐을 푼 객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황학루, 석 자가 높은 곳에서 당당한 자태를 뽐낸다.
"관작루도 대단했지만, 황학루도 못지않네요. 과연 명성대로예요. 진작 와 봤어도 좋았을 것을."
당난영의 감상이었다.
"들어가 보면 또 생각이 달라질걸. 어서 올라가지."
세 사람은 황학루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각 층에 올라설 때마다, 벽에 가까이, 바깥이 바라다보이도록 천천히 걸었다. 과연 한 층을 오를 적마다 창문 바깥의 풍광이 새삼스럽도록 뒤바뀐다.
어느 층이나 사람이 잔뜩 들어차 차를 마시며 전망을 감상했다. 저희끼리 서로 시를 읊어대는 패도 더러 있었다.
마침내 맨 꼭대기 층에 올라서자, 아주 조금은 싸늘한 강바람이 휘감아 돈다. 창밖으로는 도도하게 굽이치는 장강의 강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주변을 호위하듯 자리한 커다란 호수들도 그 모양새가 전부 보인다.
"와아... 정말로, 아름답네요."
당난영은 저도 모르게 창으로 다가섰다. 난간을 붙들고 바깥을 바라보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과연, 들리기를 잘 했나."
창문 밖을 보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이 흐뭇하다.
"어때요, 하 낭자? 경치가 마음에 드십니까?"
"네, 팽 소협. 이렇게 아름다운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스승님을 졸라서라도 와 볼 걸 그랬네요."
강 위로는 부연 물안개가 구름처럼 올라오는데, 하늘은 외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다.
당난영은 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물안개 휘감긴 강줄기를 내려다보았다.
서정적인 풍광은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애써 덮어 두었던 것을 끄집어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이리 안개가 꼈을까. 그 날은 달도 뜨지 않은 날이었다는데. 아, 낙양은 안개가 그리 자주 끼는 곳은 아니니 까만 하늘이 맑았을까.
어머니의 피살, 외숙을 향한 복수,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얻어내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란 힘이.
마음을 더없이 서글프게 만든다. 감정이 물안개처럼 희게 가라앉아 표정을 침울한 빛으로 부옇게 물들인다.
"표정이 좋지 않은데. 혹여 어디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닌지?"
남궁익은 왜인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당난영이 염려되어 말을 붙였다. 덕분에 안으로 침잠하던 그녀의 의식이 붙들려 나왔다.
"아뇨. 정말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네요."
눈가에 서글픈 물기가 어린다.
"아, 혹여 시를 좋아하나? 황학루 맨 위층에는 당시에 최호(催顥)가 손수 쓴 시문이 걸려 있다던데."
"그렇군요."
그녀는 시를 즐기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시 교육을 받았다. 감상하는 법, 짓는 법, 어울리게끔 음률을 붙여 노래하는 법. 어느 하나 기녀에게 빠져서는 안 될 요소였다.
익숙한 만큼, 즐길 수 있는 법인지라.
"이쪽으로."
남궁익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이끌었다. 옷자락을 따라 꽃내음을 품은 미풍이 샌다.
종이에 일필휘지로 써내린 칠언시가 가운데 걸려 있었다.
글자를 방해하지 않도록 수수한 무늬에 광택도 희미한 흰 비단에 표구된 시문. 족자에 달아 매단 시문이.
가슴을 저미며 폭 스며든다.
물안개가 가득 차 눈가로 똑똑 흘러내렸다.
"아니, 형은 왜 하 낭자를 울리고 그래요?"
팽준호가 눈치 없이 끼어든다.
"아, 아니. 진본이 있으니 좀 감상하자는 이야기였지, 나는."
그녀는 당황한 남궁익을 안심시키려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그저, 어릴 적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라서... 아마 보셨으면 좋아하셨겠다 싶어서 말이지요."
그 처연한 미소는 종일 그녀의 입가에 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두 사람과 농담을 하고 웃고 즐기면서도. 좋은 음식과 차를 맛보면서도 내내.
노을이 황학루를 감싸고 내려가 연파를 온통 불그스레 물들일 때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