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필의 말이 골목길을 내달린다.
"팽 소협, 그런데 어찌 짐을 다 챙겨오셨어요?"
"짐? 아, 저도 모르게..."
"되었다. 도리어 잘 되었으니."
세 사람은 금세 강가에 도달했다.
"아, 저기 저 배입니다!"
"어서 가자!"
열두 말발굽이 다급하게 모래사장을 디딘다. 걸음걸음 옅은 금빛의 모래알이 흩뿌려진다.
"어, 어어, 나리님들!"
세 사람은 나루터의 일꾼이야 손사래 질을 치든 말든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치고 움직이기 시작한 배에 뛰어올랐다.
어느샌가 말까지 끌고 와 뒤를 쫓던 사람들은 졸지에 닭 쫓던 개 꼴이 되어버렸다.
"아하하하, 꼴 좋다!"
"준호, 그만 웃고, 우선 말을 들이고 뱃삯을 내야지."
"알았어요, 남궁 형. 저는 그럼 말을 들일 곳을 알아보지요."
"그래."
그들이 올라탄 배는 제법 커다래, 한 쪽에 따로이 마구간이 구비되어 있었다.
팽준호는 말 세 필의 고삐를 마구간을 담당하는 일꾼에게 건넸다.
"저기, 나리."
"음?"
어느새 남궁익의 등 뒤에 다른 선원이 다가와 섰다.
"이리 멋대로 승선하시면 저희가 곤란해집니다."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혹, 빈 선실이 없는 것이오?"
"그건 아닙니다만..."
"삯은 넉넉하게 드리리다."
"아니, 그, 그래도..."
"아니, 그러면 강물 한가운데서 배에서 내리란 말이오?"
그는 선원의 손을 답싹 붙들었다. 큼직한 손바닥 사이를 작고 차가운 감촉이 가로막는다.
"자자, 그러지 말고, 남은 선실 중 가장 비싼 곳으로 부탁하오."
"하하, 이거 별도리가 없구만. 저를 따라오십쇼."
안내받은 선실들은 두둑이 치른 삯만큼이나 좋았다. 하나같이 넓은 데다 내부 장식은 고급스러웠다. 곱게 단장한 방들이 사람을 반겼다.
당난영은 짐을 풀고, 양산만 챙겨 갑판으로 나왔다.
아직 날이 풀리지 않아, 굳이 양산을 써야만 할 정도로 볕이 따갑지는 않다. 그래도 그녀는 구태여 양산을 챙겨 든다.
남장하던 때에야 양산을 들고 다니자면 이상해 보이니 두고 다녔지만, 여인임이 밝혀진 뒤로는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품이면서 동시에 가보요, 가주의 신물이다. 소중하고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 남궁 소협.”
남궁익은 갑판 가장자리의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하 낭자, 방은 어때? 마음에 드나?”
“네, 맹에 있는 제 숙소보다 훨씬 좋네요.”
“그거 다행이네. 이 배는 유람선에 가깝다더군. 아마 안경까지 제법 즐거운 여행이 될 거야.”
“어머나, 그거 정말 기쁘네요.”
남궁익의 확언대로 배를 타고 보내는 나날은 쾌적했다. 날씨는 맑고 강물은 소란하지 않아, 배도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당난영은 산의 풍경을 감상하기도 하고, 남궁익과 함께 합주하기도 하며 즐겁게 지냈다.
배는 장강을 따라 흘러, 어느새 구강군(九江郡) 인근까지 도달했다.
배는 이런저런 것들을 정비하느라 잠시 정박했다가 출발했다.
당난영은 남궁익과 함께 갑판에 나왔다. 양산을 쓴 채 갑판 난간을 붙들고서 보는 경치는 순간마다 달라져, 좀체 질리지를 않았다.
“안력을 조금 돋워서 저쪽을 잘 봐봐.”
남궁익의 손가락이 남쪽을 가리켰다. 멀리 흐릿하게 산봉우리가 보이는 방향이었다.
“어디... 어마, 대단하네요!”
눈에 공력을 조금 집중하자 한층 넓어진 시야에 여산(廬山)이 들어온다.
세월을 품고 번화한 구강군의 시가지 너머로 아흔아홉 봉우리가 겹겹이 드리운다. 구름 같은 물안개를 빙 두른 산이 신선처럼 고아하다.
“저기가 여산(廬山)이야. 이쪽 말고 감강(贛江)을 따라 내려가며 보는 풍경이 정말 각별한데, 아쉽게 됐네.”
“후후, 언젠가 기회가 닿을 날이 있겠지요. 그 때에도 함께 가 주실 테지요?”
“무, 물론이지.”
“고마워요. 어...”
그 찰나에, 원인 모를 불길한 예감이 벼락처럼 내리친다.
당난영은 저도 모르게 남궁익을 홱 밀쳤다.
“뭐, 뭐아? 헉!”
곧이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화살 한 대가 꿰고 지나간다.
“화살이군요.”
“강 한가운데에 어인?”
의아하게 생각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화살이 비처럼 날아든다.
두 사람이 기대어 선 난간에 밧줄을 엮어 만든 사다리를 건 갈고리들이 날아들었다. 밧줄마다 반대편 끝에는 작은 배가 있었다.
배마다 갑판에는 창을 든 이들이 한가득 서, 흉험한 기세를 내뿜는다.
긴장에 떨며 들이마시는 숨에 살기와 적의가 꽉 차, 목이며 가슴이 따끔거린다.
“수적이다!”
누군가가 고함을 친다.
그 소리가 배 위에 아비규환을 덧그려낸다.
수적들이 능숙하게 휘청이는 밧줄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일사불란하고 절도있는 몸놀림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이놈들! 어딜 감히!”
팽준호가 냅다 칼을 뽑아 든다. 멈춤 없이 수적 떼를 향해 그 커다란 몸을 수적 떼를 향해 날린다.
“팽 소협!”
“우리도 나서도록 하지.”
당난영과 남궁익도 칼을 뽑았다.
“별 도리가 없군요, 소협.”
두 사람은 각기 갈라져 수적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당난영의 눈에 들어온 수적들은, 남양 인근에서 마주친 녹림도를 떠올리게 한다.
바싹 마른 몸에 허름한 차림이 안쓰럽다.
하지만, 그 안쓰러운 이들은 창을 휘둘러 무고한 사람을 해치고 있었다. 막아야 하겠지.
어린아이를 향해 찔러 드는 창날을 가로막았다. 챙, 하고 맑은 금속성이 울렸다.
수적 사내는 분노하여 눈을 치떴다. 사나운 눈빛에 흉흉한 기세.
일전의 녹림도들과는 달리 거멓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탁하기 그지없다.
“웬 년이냐!”
“빈도는 바른길을 찾는 몸입니다. 힘없는 자를 핍박하는 자는 막아야 한다 배웠지요.”
“그런 꼬락서니를 하고서는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그녀는 이 여로에서 도사인 것도, 학명파의 제자인 것도 굳이 드러내놓고 다니는 게 좋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여, 도포 대신에 하늘하늘 빛깔 고운 옷을 걸치고 나섰다.
“아, 지금은 도복 차림이 아니기는 하군요.”
이번에는 이편을 향해 창을 찌른다.
당난영이 사뿐히 몸을 띄운다. 작은 발끝이 사뿐히 내려앉은 곳은 창대 위.
“하오나, 사람을 외양만으로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은 소인배의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창대에 사람의 무게가 더해지자, 창을 쥔 팔이 휘청거린다.
“무슨 이런 미친년이 다 있어!”
수적 사내가 악에 받쳐 창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하지만 그 위에 섰던 여인은 이미 갑판을 디디며 팔을 움직인다.
발밑이 불안정해 칼끝이 흔들렸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희게 빛나는 검신은 화를 내던 사내의 가슴팍을 꿰 찔렀다.
그녀는 분수처럼 튀는 핏줄기를 피해 몸을 띄웠다.
다시 수적 떼 한가운데로 발을 디딘다.
“무도한 자는 반드시 옳은 길로 이끌어야 한다 배운지라.”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신이 차게 불타오른다.
하지만 끌어올린 기세가 무색할 만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는 본래 지닌 실력의 반절도 발휘하기 어려웠다.
발끝이 흔들리자 칼끝이 어지러워진다. 착지할 때면 몸이 휘청거리고, 한바탕 날뛰고 나면 중심을 잡기도 버겁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무위는 현격하게 차이가 났다.
흰 불꽃이 공중을 수놓는다. 불길을 따라 피가 흐른다.
비틀거리던 검로가 한 사내 앞에서 멈춰섰다.
“오래간만이구나, 미친 계집.”
익숙한 음성.
“아, 그때 백강 부근에서 만났던...”
“그래, 기억하고 있었나?”
“그 때, 다들 골병이 들도록 얻어맞은 덕에 한동안 누워 있어야만 했다.”
음습한 기운이 사내의 눈매에 맺혔다. 어딘지 모르게 붕 떠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덕분에 앓던 내 딸이 떠나버렸지. 그 며칠 사이에 말이다.”
사내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주섬주섬 제 허리춤을 더듬던 왼손으로, 비(悲)자가 적힌 종이로 싸맨 단약을 꺼내 쥐었다. 그는 기분 나쁜 녹색이 도는 검은 단약을 꺼내서는 씹어 삼켰다.
“아니, 어떻게...?”
별볼일 없던 사내의 기세가 사납고 드세어졌다. 느릿하던 검로가 빨라지고 불규칙하던 발걸음이 일정하게 변했다.
“사천별림에 읍소하여 도움을 좀 받았지. 나를 놀린 네 년도, 나를 두들겨 팬 기생오라비 놈도 죄다 도륙을 내 버릴 것이야!”
매 검격이 보다 묵직해졌다. 칼끝을 따라 거친 불티가 튀어올랐다.
“검염?”
당난영은 검을 쥔 손에 한층 힘을 주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변화. 그래도 그녀보다는 아래였다.
작은 발은 춤을 추듯 가볍게 움직인다. 하지만, 평소대로라면 일정한 간격에 일정한 박자를 만들어냈을 걸음걸이가 어지러이 흔들린다.
검로를 따르던 발걸음이 고인 물 위를 디딘다. 그대로 발이 쭉 미끄러진다.
“꺄아악!”
찰나의 실수는 그녀를 뱃전에서 떠밀어버렸다.
“하 낭자!”
남궁익은 곧바로 물로 뛰어들었다.
“남궁 형!”
남궁익은 저를 붙드는 팽준호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허우적대는 당난영을 향해 헤엄쳤다.
그녀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치렁치렁 늘어지는 옷자락이 물에 젖자, 그 수족을 얽어맨 족쇄가 되었다.
그녀는 그러지 않아도 헤엄을 치지 못 하는 처지. 팔다리마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강바닥을 향해 추락한다.
아직 복수는커녕 원수의 얼굴조차 보지 못 했는데, 이대로 죽는 걸까. 마음이 몸과 함께 가라앉는다.
아니, 죽지 않으려나.
흐린 물 너머로 새파란 빛이 비친다. 숨이 막혀 흐릿한 눈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 보인다.
말랑하고 따스한 감촉이 파랗게 굳은 입술을 덮는다. 새 숨이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단단한 팔이 힘이 빠진 허리를 감아올린다. 위로, 위로, 밝은 곳으로 몸이 떠오른다.
흰 빛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푸하!”
“괜찮아?”
“네, 덕분에.”
“예에 어긋나는 일이나, 조금만 더 참았으면 좋겠다. 배에 다시 오르기는 어려울 듯하고, 이대로 뭍으로 가야겠어.”
“네, 그런데 팽 소협은...”
“음? 어디 보자... 아, 저기 있네.”
팽준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무판을 붙든 채 둥둥 떠 있었다. 당난영과 남궁익을 찾으려는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남궁익과 눈이 마주치자 반색을 하며 다리를 내젓는다. 남궁익의 손짓을 따라 가까운 강변을 향해 나아간다.
수적 중 몇이 세 사람에게 따라붙었다. 남궁익과 팽준호는 내력을 끌어 올려 한껏 속도를 높였다.
그 덕에 금세 뭍에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적들이 꼬리를 잡을 듯이 바짝 다가온 뒤였다.
당난영과 남궁익, 팽준호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채, 모래톱을 내달렸다. 다행스럽게도 수적들은 경공이 달리는 모양인지 금세 추격을 멈추었다.
숲자락에 들어서자 수적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후아, 이제 숨 좀 돌리죠."
“두 사람 다 고생했어. 어차피 뭍에서는 상대가 안 되는 건 저자들도 알 터, 이 이상은 따라오지 않겠지.”
“휴, 정말로 죽다 살아났네요. 수영은 꼭 배워둬야겠어요.”
“하하, 상황이 너무 급박하여 내가 무례한 짓을 하고 말았어. 하 낭자, 마음에 담아 두지 않으면 고맙겠는데.”
“별말씀을요.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이니 오히려 감사히 여겨야지요.”
당난영은 등에 비끄러맨 양산을 내려놓고는 물을 흠뻑 머금은 옷자락을 비틀어 짰다.
“양산, 그 난리 통에도 용케 잃어버리지 않았네요?”
“네, 아주 중요한 물건이니까요.”
그녀는 아주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하 낭자.”
"하지만, 나머지 물건은 전부 배에 남아 있죠."
"게다가 여비도 다 배에 남아 있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남궁 형?"
"남창으로 가자. 거기에는 우리 가문의 별장도 있고, 남영 무관도 있으니, 어쨌든 도움은 받을 수 있을 테지."
“그래요. 그럼 바로 움직이죠, 형.”
세 사람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남쪽으로 경공술을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