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난영과 남궁익, 팽준호는 강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세 사람은 발맞추어 경공술을 전개했는데, 제각기 이룬 성취만큼이나 그 속도가 제법 빨랐다.
모래사장에서든 산길이든 간에 말을 달리는 것과 엇비슷한 정도니, 범부는 물론이요, 어지간한 무림인도 놀랄 만치 빠르다.
당초에 경공술은 다른 어떤 무공보다도 내공의 양과 질에 구애받는 기술이다. 또한, 시전자 자신의 무공에 대한 이해도와는 큰 관련이 없다.
하여, 깨달음을 얻지 못해 검풍도 발하지 못 하는 자라도, 내공만 충분하다면 저보다 고수도 뿌리치고 달아나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무공의 수준이란 것은 무위와 비례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남궁익은 발을 놀리면서도 제 일행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보다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팽준호는 슬슬 내력이 달리는 모양인지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하지만, 셋 중 가장 실력이 아래인 하예랑은 의외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좀 창백한 듯 보이지만, 그녀는 평소에도 썩 혈색이 좋은 편은 아니므로 평소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왜 그러시지요, 남궁 소협?”
남궁익의 고개가 이편을 아주 살짝 향해 있다.
당난영은 흘끗 돌아보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살포시 웃어보였다.
왜인지 걱정스러운 눈빛. 그녀는 그 눈빛이 의아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팽준호에게 생각이 미쳐,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평소의 혈색 좋은 낯빛은 온데간데없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제법 빠른 속도로, 중간에 쉬지도 않고 쭉 내달렸으니 지칠 때도 되었나.
그의 성격상, 먼저 쉬자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아등바등 발을 맞추던 모양이었다.
“후우, 남궁 소협, 팽 소협, 조금만 쉬다가 가면 안 될까요?”
이대로 가다가는 사람이 상할까 싶어, 당난영이 먼저 휴식을 제안한다.
“흐으, 그, 그래요. 잠시만 좀 앉읍시다.”
팽준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발을 멈추고 풀썩 드러누웠다.
“아니, 앉자더니 너는 왜 드러눕냐?”
“아으, 아무려면 어때요. 눕는 거나 앉는 거나 쉬기는 매한가진데.”
남궁익의 목소리에 뚝뚝 묻어나는 장난기가 거슬린 걸까. 팽준호가 홱 돌아눕는다.
그와 거의 동시에, 꼬르르르륵. 팽준호의 덩치만큼이나 복명이 요란스럽다.
“음, 먹을 게 있... 을리는 없겠군요.”
“그렇지?”
이래저래 배에 버려둔 셈이 된 짐 중에는 당연히 약간이지만 비상식량도 있었다. 두말하자면 입 아플 소리지만, 현재 수중에는 없을 뿐.
“...배 안 고픕니다.”
“흠, 뭐든 좀 배를 채울 걸 찾아봐야 하려나.”
“배 안 고프다니까요, 남궁 형.”
“내가 고프다, 이놈아.”
“저도 속이 조금 허하네요, 소협. 게다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으니.”
어느샌가 잔잔한 호수에 저녁놀이 깔렸다. 불그스레 물든 수면으로 비스듬히 쪼이는 햇볕이 바스러진다.
“우리 본가에 가면, 서역에서 들어온 붉은 유리로 된 그릇이 있지. 꼭 그것이 떠오르는 광경이구나.”
“아, 음, 그렇군요.”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주변에 별달리 인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하늘 아래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산과 모래밭,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물뿐.
“아, 그러고 보니 팽 소협은 항상 건량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하지 않으셨나요?”
“어, 아, 네.”
간신히 숨을 고른 팽준호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허리띠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끌러낸 건량 주머니는 텅 비어서 축 늘어졌다.
“아, 이런.”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통에 다 쓸려나갔나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숲을 좀 뒤져봐야 하려나.”
“아,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당난영은 검대 옆에 맨 작은 꾸러미를 풀었다.
“저희 학명파의 특제 벽곡단이에요.”
그녀는 손바닥 위에 주먹만 한 사기병을 꺼내놓았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손톱만 한 크기의 옅은 금색 환단이다.
“배가 썩 부를 음식은 아니기는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아니, 감사하게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 낭자.”
“잘 먹을게, 하 낭자.”
세 사람은 병을 탈탈 털어내 나온 아홉 개의 환단을 셋씩 나눠 먹었다.
“허기는 좀 가셨고...”
“어쩔까요, 남궁 형? 밤새 달려볼까요?”
허장성세라 하였던가. 한껏 호기롭게 건네는 말과 다르게 팽준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다.
"팽 소협, 정말로 밤을 새워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녀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아, 뭐, 하 낭자께오서 지치셨다면 쉬었다 가지요."
"어머나, 저는 아직 말짱하답니다?"
"예, 예? 큼."
팽준호는 예상외의 대답에 당황한 듯 보였다.
"농이에요, 농. 어차피 지나치게 이르게 도착해 보아야, 성에는 발도 들이지 못하고 문밖에서 떨어야지 않겠습니까? 조금 쉬었다 가지요."
이번에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
확실히 이 거한은 제 속마음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다.
“그래. 나도 퍽 곤하구나. 잠깐이라도 눈을 좀 붙였다 가는 게 나을 성싶다.”
팽준호는 다른 두 사람의 말에 못 이기는 척 쉬기로 했다.
그들은 사위가 탁 트인 모래사장 대신에, 강가의 숲 언저리에서 잠을 청하기로 하였다.
“남궁 소협, 한 시진씩 번갈아 가며 번을 서면 충분하겠지요.”
“음, 그럼 순서는 어찌하면 좋으려나.”
“남궁 소협께오서 먼저 보시지요. 그다음은 제가, 마지막에는 팽 소협이 하면 어떨까 합니다.”
“아, 아닙니다, 낭자. 연약한 아녀자에게 어찌 고된 일을 떠맡기겠습니까. 낭자께서 마지막에 번을 서세요.”
본디 불침번을 설 때에는, 가운데에 낀 사람이 가장 고생스러운 법이다. 팽준호는 한사코 제가 그런 짐을 떠메겠노라 자청했다.
“정 그러하시다면, 따르지요. 때 잘 맞춰서 깨워 주셔야 합니다?”
“네, 네.”
당난영은 단 두 발짝만에 나뭇가지에 올라섰다.
나뭇가지는 사람이 서 있기에도 충분할 만치 굵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처럼 누워 잠을 청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는 이의 불안감과는 별개로, 그녀는 눕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당난영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끔뻑거리는 눈에 비친 것은 새카만 숲뿐이었다.
“하 낭자.”
“음, 아, 남궁 소협? 팽 소협은요?”
“그놈이 곤하였는지 아무리 깨워도 도통 일어나지를 않아서 말이야. 고생스럽겠지만 하 낭자가 먼저 번을 서야 할 것 같은데.”
“저는 괜찮으니, 좀 주무시지요.”
남궁익은 잠시 부스럭대는가 싶더니, 금세 잠들었는지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 곁에 누운 팽준호는 한 시진이 지난 뒤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으, 이렇게 안 일어날 거면 불침번 선다는 소리는 왜 했던 거야?"
태평스레 잠든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짜증이 뭉클뭉클 솟는다.
"이래도 안 일어나..."
그녀는 팽준호의 정강이를 걷어차고는 도로 나무 위로 올라갔다.
팽준호는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나, 주변이 환하게 밝고서야 간신히 깨어났다.
그는 멋쩍은 미소를 띠고서 다른 두 사람을 따라나섰다.
일행은 그렇게 달려온 만큼을 더 달려서야 남창에 당도했다.
“우선 우리 별장으로 먼저 가 볼까.”
남궁세가의 별장은 성에서 조금 떨어진 강가에 있었다. 제법 너른 부지를 둘러싼 담장 너머로 푸른 기와를 얹은 지붕이 보인다. 지붕 사이로 잘 가꾼 나무가 솟아 있고 한쪽으로는 높게 솟은 정자까지 눈에 띈다.
담 안쪽도, 그 둘레도, 나무들도 전부 깨끗이 정돈되어 사람 손을 탄 태가 난다.
하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사람이 없는 것 같네요.”
“별장만 있으면 뭘 해요, 형. 사람이 없는데.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흠, 관리인이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챙기지도 않은 별장 대문의 열쇠가 남궁익에게 있을 리 만무하다. 그는 굳게 걸린 자물쇠를 공연히 노려보다가 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각각 칼을 찬지라, 문지기가 쉬이 통과시켜 주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하지만 남영무관주 명경검의 지인이라는 한 마디면 뇌물도 필요 없었다.
“호, 남 숙부 대단한데?”
“명경검 대협이라면 강호에서야 이름이 높기는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형.”
“후후, 어쨌든 편해서 좋네요. 그런데 성에는 왜 들어오신 거예요, 남궁 소협? 남영 무관은 성 밖에 있잖아요.”
“아, 별장 관리인을 찾을 생각이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그렇군요. 뭐, 별 상관없겠지요.”
진작에 다툼이 가라앉은 덕택인지, 남창의 중심가는 제법 번화하다. 성 내의 공기부터가 생동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건 뭐랄지...”
이유 모를 위화감.
복닥거리는 활기는 절대 아니다. 그보다는 보다 불길하고 묘하게 광기 어린 공기가 꾸물거린다.
“응? 왜 그럽니까, 하 낭자?”
“아뇨...”
마교도들과 부대끼며 자란 탓일까, 그녀는 기감이 뛰어났다. 특히, 마기와 같이 사사로운 기운에 대한 감각은 발군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왔을 때랑은 동네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남창에 종종 오갔던 모양인 남궁익 역시 그 위화감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런가요? 난 잘 모르겠는데요, 형.”
“아니, 저것 좀 봐라. 비통의 비(悲)자가 적인 편액을 건 집이 제법 많잖냐.”
“아, 그러네요.”
두 집 건너 한 집 꼴로 서체도 재료도 다양하지만 비 자를 적은 편액을 걸어두었다.
“썩 좋은 글자도 아닌데, 왤까요? 비 자라...”
편액을 바라보던 당난영의 머릿속에 바로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비 자가 적힌 단약을 삼키자, 사람이 바뀐 듯 향상된 경지. 그때의 비 자와 이곳에 내걸린 비 자.
언뜻 별 관련이 없어 보이건만,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다.
“왜, 뭔가 생각난 거라도 있어?”
“아뇨, 별 건 아니에요.”
그때, 갸우뚱한 남궁익의 얼굴 너머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여럿이서 조용히 입을 맞추어 무언가 읊조리는 소리.
“염불인가?”
“응?”
당난영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 낭자!”
남궁익과 팽준호가 붙드는 손길도 뿌리치고 도착한 곳은 신당 같은 곳이었다.
비 자가 큼직하게 적힌 편액이 걸린 대문. 가늘게 자른 진녹색 천을 줄줄이 얽어 건 지붕 곁에 높이 솟은 솟대와 거기 걸린 깃발. 그 깃발이 바람을 타고 나부끼자 드러난 대비(大悲), 두 글자. 그리고 마당에서부터 깔려 나오는 중얼거림.
“하 낭자, 아는 곳입니까?”
“쉿.”
당난영은 급히 팽준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최대한 소리를 죽여 가까운 나무 위에 올라갔다.
문이 활짝 열린 신당에는 큼직한 관세음보살 상이 놓여 있었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
바람의 방향이 맞아떨어져, 간신히 알아들은 한 마디.
“관세음보살?”
하지만 불교 의식을 하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무어라 콕 집을 수는 없으나, 익숙한 듯 불길한 느낌이 감도는 풍경.
“그냥, 시절이 하 수상하니,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는 모양이네요.”
당난영은 다른 두 사람을 데리고 신당에서 멀어지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 뒤, 세 사람은 남궁세가 별장 관리인을 만났다.
그는 별다른 일은 없으나, 최근에 ‘대비교(大悲敎)’라는 종교가 남조 어림에서 넘어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관세음보살이 현현했다는 신녀를 교조로 받든다는 대비교는 남조 어림에서 시작해, 강남 일대에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가는 종교였다.
관리인은 특별한 먹으로 쓴 경전을 태운 재를 마시면 어떤 병이든 나을 수 있다며, 가난에 병든 이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보탰다.
“강남 일대의 혼란은 오왕이 진작 잠재웠다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나 보군.”
“뭐, 그렇지요, 소가주님.”
초로의 사내인 관리인은, 은자를 건네며 세 사람을 배웅했다.
세 사람은 그 뒤에 들린 남영무관에서도 명경검의 환대를 받았다.
게다가 운 좋게도, 마침 남영무관에서 남궁세가까지 바로 가는 배가 이틀 뒤에 출발한다고 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 만 하루 간의 고생이 무색하리만치 편한 여정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