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무관의 배가 강줄기를 따라 흐르는 동안, 공기는 조금씩 따스해졌다.
어느새 완연한 봄바람. 생기가 깃든 봄볕이 향그러워, 당난영은 갑판에 올라왔다.
남궁세가로 가는 남영무관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남(南) 자 기를 내건 배를 건드릴 만큼 간 큰 수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덕택에 여행은 한갓지기만 했다.
그런 평온이 지겨워질 즈음에서야 천주산(天柱山)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산자락을 병풍처럼 둘러친 남궁세가의 장원도.
“하 낭자, 남궁세가에 온 것을 환영하네.”
남궁익은 반지르르 잘생긴 얼굴에 햇빛같은 미소를 띠고서, 당난영을 대문으로 이끌었다.
무림 세가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는 남궁세가의 장원은 위풍당당했다. 어디까지 뻗었는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 담벼락. 푸른 기와가 줄줄이 늘어서 지붕에 이룬 바다. 장원 둘레로 지키고 선 당당한 거목들.
집채만 한 대문에는 새카만 윤기가 번질거린다. 거무스름한 금속 손잡이가 박힌 대문 앞에는 두 사람이 지키고 섰다.
짙은 파란색의 무복 차림과 허리에 찬 장검이, 이들이 남궁세가에 속한 사람임을 알려온다.
주변을 살피던 사내가 이편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무표정하던 얼굴에 반가움이 번져나갔다.
“소가주님! 맹에서의 임무가 끝나셨나 보군요.”
“그래. 드디어 돌아왔지. 아버님, 어머님은 잘 계신가?”
“두말하면 입 아프지요. 물론입니다.”
그는 남궁익을 반기며 그의 일행을 살폈다.
“아니, 팽 공자님 아니십니까? 간만에 뵙습니다. 그새 더 자라신 것 같은데요.”
“이 나이에 무슨 키가 크겠어.”
“이쪽 낭자께오서는...”
“하예랑이라고 한답니다. 처음 뵙겠어요.”
생글거리는 얼굴이 꽃봉오리마냥 곱다.
“아, 맹에서 알게 된 분이시다. 그보다, 아버님께 먼저 인사 올려야겠다.”
“예, 소가주님. 바로 모시겠습니다.”
세 사람이 남궁세가주인 호천검(號天劍) 남궁헌(南宮?)의 집무실로 향하는 동안, 이끄는 이가 두 번이 바뀌었고 수없이 많은 문을 지나쳤다.
덧문을 셋이나 열고서야 들어선 가주 집무실은 휘황찬란했다.
안에서 칼을 휘두르며 날뛰어도 될 만치 너른 방 안에는 그리 많은 물건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큼직한 책상에 의자 하나와 책꽂이 둘. 책상 뒤를 장식한 병풍에 소나무 분재 둘이 전부. 그나마 벽에 걸린 몇 자루인가의 장검이 꽃을 대신해 방 안을 간신히 장식했다.
하지만 언뜻 단출해 보여도, 개개의 집기를 뜯어보면 세가의 위용에 어울리도록 호화롭다.
흑단목을 짜 맞춘 책상과 의자는 촘촘히 붙은 나전 장식이 오색 빛을 반사한다. 그 뒤를 받친 병풍은 그 단단한 흑단목에 수리를 큼직하게 투각하고 은을 상감했다.
당난영은 부귀 어린 광채에 절로 벌어지는 입을 애써 단속하며 예를 올렸다.
“한데 익아, 이 소저는 누구더냐?”
인사를 받은 남궁헌은 오랜만에 보는 팽준호나 소중한 장남보다도 먼저 당난영에 관심을 보였다.
젊은 여인. 그것도 허리에 맨 장검마저 청초하니 고운 미인이, 혼기를 놓친 아들과 함께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네?”
“어느 집안의 여식이냐?”
“아, 아버님...”
어디에 두어도 눈에 뜨이도록 멀끔한 남궁익의 얼굴이 발그레 달았다.
“어흠, 그, 무림맹에서 알게 된 하예랑 낭자입니다.”
“하예랑이라고 합니다. 무림맹의 일개 무사일 뿐, 그리 대단한 가문의 일원은 아닙니다.”
꽃향기를 물고 들어온 듯한 미소 띤 얼굴. 가볍게 묵례하자 폭포처럼 미끄러지는 검은 머리채 위로 빛이 묻어나 반짝인다.
“그런가. 검을 쓰는 듯한데, 혹 사문을 물어도 되나?”
“아, 도복을 입고 오지 않아서... 소녀는 서왕궁의 소현 진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지요.”
“서왕궁?”
남궁헌은 편하게 늘어뜨렸던 몸을 바로 했다.
물론 학명파는 작은 문파요, 상대가 장문도 아니다. 그렇다 하여도 아주 아랫사람처럼 편히 대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니.
“하면 학명파로구먼. 어쩐지 검이 눈에 익다 싶더라니. 소현 진인의 제자라 하면...”
“네, 제 사저인 헌도(獻道) 진인이 저희 학명파의 장문을 맡고 계시지요. 제 도호는 하랑이라 합니다.”
“허어, 하랑 도장이로군. 반갑소. 한데 이 먼 곳까지 어쩐 일로 오셨소?”
“아, 옥화검랑 소협을 배웅하라는 명을 받았답니다. 사실은 고생했으니 놀다 오라는 이야기겠지만요.”
“그런가. 정말 잘 왔소. 이왕 한 걸음이니 유람도 좀 하고, 며칠 푹 쉬다 가시오.”
“감사합니다, 대협.”
문밖에 시립해 있던 시녀는 당난영을 내원의 객당으로 안내했다.
시녀는 객당 한켠의, 꽃봉오리가 맺힌 벚나무를 두른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홍수재(紅樹齋)라 적힌 현판에는 연분홍색 꽃송이가 글씨에 곁들여 새겨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붉은 색조의 가구로 단장한 방 안은 깔끔하고 아늑했다. 창가에는 때를 잊은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를 화려하게 피워올렸다. 중앙의 탁자에 놓인 다호는 방금 준비한 모양인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확실히 명문 세가라 객 맞이가 능숙하구나.”
“그럼, 아가씨, 편히 쉬시어요.”
당난영이 무심결에 뱉은 감탄을 들어서일까, 문을 닫고 돌아서는 시녀의 입가에 웃음기가 맺힌다.
“어디.”
감꽃 빛의 찻물이 봄꽃 같은 향내를 흰 잔 가득 투명하게 채워 올렸다. 꿀물같이 달큰한 뒷맛이 혀끝에 감겨들었다.
"와, 이거 최상급 백호은침이잖아? 이 정도면 값이... 힉."
대강 어림해 보아도 소박한 맛에 길든 속이 찻물이 얹힐 만큼은 족히 된다.
"과연 무림 제일 세가라 할 만하네."
이때다 싶어 한창 고급스러운 차향을 음미하던 중, 당난영의 귓가에 소란이 들려왔다.
"뭐지?"
문 밖으로 나서자, 바삐 다니는 하녀들이 눈에 뜨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걸음을 따라가는 허리에 매인 검이 절그럭거린다.
"저기!"
"네, 아가씨, 부르셨나요?"
"주변이 소란한데, 무슨 일인가요?"
"아, 작은 어른께서 오셨답니다. 어디라더라? 아무튼 어디서 높은 벼슬을 하고 계셔서 위세가 아주 당당하시거든요."
"아, 그래서 다들 바쁘구나. 알려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아, 그보다 식사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답니다. 외원의 벽하루(碧河樓)로 가셔야 하니 채비하셔요. 지금 모시고 가면 딱 맞을 것 같아서요.”
“그럼 잠시만...”
따로이 누각에서 식사한다는 것으로 보아, 연회에 가까운 자리인 모양이다. 게다가 초대받은 객으로서 너무 남루하게 하고서 나가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
당난영은 방 한켠에 놓인 은경을 들여다보았다. 반짝이는 은판에 화장기 없이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여벌의 옷이야 없으니 별수 없다지만, 화장도 하지 않은 민얼굴에 풀어헤친 머리를 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옷에서는 눅눅한 물 내음이 풍기는 것 같다.
그나마 허리띠에 매어 잃어버리지 않은 짐꾸러미에서 향분과 화장품을 꺼냈다. 옅은 화장을 하고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는 점취 보요를 매단 은비녀를 꽂았다. 허리의 향합에는 향료를 채운 향낭을 집어넣었다.
한 다경여가 지나고서야 그녀는 간신히 문밖으로 나왔다.
“준비 다 했어요.”
“예, 그럼 모시겠습니다.”
당난영은 시녀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어서 벽하루에 도착할 수 있었다.
2층짜리 누각의 꼭대기에는 지붕 대신에 사방이 트인 정자가 얹혔다. 서편 산허리에 걸린 초승달마냥 휘어 올라간 처마가 파란 기와를 떠메고 섰다. 그 아래로 은박 물린 비단 휘장이 푸른빛으로 투명하게 빛난다.
계단을 오르자, 상다리가 휘도록 산해진미가 그득히 차려져 있었다.
"오, 하 낭자, 나왔, 오셨군요."
이미 일가족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던 남궁익이 그녀를 반겼다. 제 가족들을 의식해서인지 평소대로 편하게 하던 말이 엉켜 나왔다.
남궁익과 그의 가족들, 팽준호까지 모두 자리에 앉자, 딱 한 자리가 빈 채로 남았다.
“이거, 제가 조금 늦었나 보군요.”
나직한 사내의 목소리. 당난영은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숙부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남궁익이 숙부라고 부른 사내는 남궁헌과 쌍둥이처럼 보일 정도로 빼닮은 얼굴을 했다. 다만 정수리에 서리가 좀 더 내렸다는 점과 시커멓게 가라앉은 눈빛이 속내를 알 수 없어 뵌다는 정도가 달랐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흔들리는 짙은 푸른색의 옷자락에는 서늘한 비린내가 묻어난다.
“호, 처음 보는 사람이 있는구먼.”
“처음 뵙겠습니다. 서왕궁 소현 진인의 제자, 하랑자이올습니다, 남궁 대인.”
"젊어 뵈는데, 학명파의 어른이셨구먼. 나는 남궁최호(南宮隹戶)라 합니다. 반갑소이다, 하랑 도장."
"어른은요."
“자아, 인사들 다 나눴으면 식기 전에 들지.”
남궁헌이 입을 뗐다. 정자에 모인 이들은 각기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의 안주인은 집안을 단속하고 꾸려 나가는 재주만큼이나 요리 솜씨도 뛰어난 모양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산채를 곁들인 잉어찜은 비리지도, 흙냄새가 나지도 않는다. 산비둘기 요리며 버섯 요리들도 하나같이 정갈한 모양새만큼이나 섬세한 맛을 자랑한다.
식사 분위기 역시, 딱히 어려운 사이끼리 모인 게 아닌지라 화기애애했다.
“하랑 도장, 내일은 조촐하나마 연회를 열 예정이오. 도장께서도 함께 하셨으면 좋겠소만...”
“초대 감사합니다, 호천검 대협. 당연히 가야지요.”
“하하하! 그럼 내일 뵙겠소. 처소로 때맞춰 사람을 보내리다.”
“네.”
이튿날 아침, 날이 밝자 객당으로 안내했던 시녀가 식사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의 뒤에는 다른 하인 둘이 큼직한 꾸러미를 들고 서 있었다.
풀어낸 꾸러미에는 여러 벌의 옷과 장신구가 담긴 상자가 들어 있었다.
“우선 식사를 하시고 나서, 단장을 하시어요. 정초시가 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준비해 두었으니 취향대로 고르시고 나머지는 그냥 방에 두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그럼...”
당난영은 식사를 마치고서 옷을 고르고 화장을 했다. 옷들은 전부 금릉(金陵)의 운금(雲錦)으로 만든 고급품이어서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단장을 마친 그녀가 나선 뜰에는 푸른 예복 차림의 남궁익이 서 있었다.
“남궁 소협?”
“아, 하 낭자.”
“어쩐 일이신가요?”
“배가 뜰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길래, 같이 가자고. 내가 안내하지.”
“어머나, 남궁세가의 소가주께 안내를 받다니 크나큰 영광인데요?”
남궁익의 뒤를 따라가자, 장원 앞으로 흐르는 강에는 커다란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더 커다랗게 보이는 배의 이모저모가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배는 정원을 통째로 얹어 놓은 듯한 모양새를 했다.
2층 갑판의 중앙에는 팔각정을 세우고 그 주변에는 때늦은 매화가 만개했다. 은으로 된 가지에 옥으로 깎은 꽃을 엮은 매화에는 무슨 조화인지 강렬한 향기가 가득했다.
배 위에서의 점심 식사는 담소와 함께 가벼운 음식을 들었다. 하지만 저녁의 연회는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연회가 끝나고 난 갑판에는 당난영와 남궁익, 팽준호만 남아 정자에서 술잔과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후아, 술기운이 도는군요. 저는 조금 걷다 오겠습니다.”
붉어진 얼굴을 한 당난영이 자리를 떴다. 그녀는 강바람을 느끼며 느직이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네가 제정신이냐!"
조용히 가라앉은 밤공기를 가르는 호통.
당난영은 호기심이 동해 그쪽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방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헌과 그 동생인 남궁최호의 것이었다.
그녀는 문설주에 붙어 섰다. 하늘거리는 옷자락을 쥐어 잡고서 장지문 너머의 말싸움에 집중했다.
"우리는 작금의 황제 폐하를 옹립한 무림맹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너는 어찌 나에게 불충하라 권하느냐?"
"형님, 그런 게 아닙니다. 좀 진정하세요. 게다가 진심으로 충성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보다 우리 가문의 근거지는 오왕의 세력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좀 협력하자는 건데 뭐가 그리 불쾌합니까?"
"그러나 강북에는 황제가 있다. 명분도 갖춘 데다가, 갈까마귀를 부리는 전신(戰神)이라는 진왕의 협력을 받는."
"그래 봐야 강 건너 북방의 일입니다. 오왕이 이 강남을 평정한 것은 더 오래 되어..."
남궁최호의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늘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퍽!
한 자루 장검이 장지문을 비스듬히 뚫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