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부터 그녀가 사는 곳은 5층 빌라의 맨 꼭대기였다. 1층에는 인심 좋은 건물 주인 내외가 살고 있는데 그녀에게 잘 대해주는 편이라 가족이 없이 혼자 사는 그녀에겐 운이 매우 좋았다. 워낙 들쑥날쑥하게 집에 드나들어도 집에서 쉬는 날엔 가끔 먹을 것이 있다며 나물이며 김치며 누룽지 만든 것들을 종종 갖다 주었다. 딸이 하나 있데 직장 때문에 멀리 부산에 살아 잘 만나지 못한다며 같은 또래의 그녀를 보면 딸 같다고 잘 대해주었다. 지윤은 마음 따뜻한 그 분들에게 간혹 선물을 사다 드리기도 했다. 그러면 그들은 무척 고마워 했었다.
주인집 내외를 보며 그녀에게도 부모가 있다면 이렇게 아니 남들과 사이는 비교도 안되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여리고 순수해 보이는 외모에도 빈틈없고 강해 보였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엔 외로움과 상처를 안고 살고 있었다.
지윤의 집에서 창 밖을 내려다보면 저 건너편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단독주택이 하나 보였다. 자신이 어릴 적 살던 부모님과 살던 집이었다. 저 집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녀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곳에 사는 이유였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 만 세 살 때부터 살던 집, 이사 오는 날 잔디가 깔린 마당이 있다며 아빠의 손을 붙잡고 팔짝 팔짝 뛰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살짝 보이는 그 집 마당을 보면 그 때 기억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좋은 추억이 다 하나씩 떠오르다 그 집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나면 웃던 얼굴이 어느덧 슬픈 얼굴로 바뀌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의 기억이 또다시 그녀를 붙잡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그녀는 유복하지는 않았어도 부모와 함께 행복했었는데... 행복은 그녀 옆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차례로 그녀를 두고 모두 떠나 이제 곁에 없었다.
그 때는 지윤의 10살 생일,
평소 바쁜 형사였던 그녀의 아빠 서정국 형사가 오랜만에 집에 들어왔다. 지윤은 생일에 꼭 같이 있어주겠다는 아빠가 약속을 지킨 것에 펄쩍 뛰며 기뻐했다. 그렇게 부모님과 같이 생일 축하 파티를 하고 선물을 받고는 기뻐하는데 정국이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리곤 심각한 대화를 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전화 상대였던 김형사를 불렀다.
“김형사! 김형사!”
정국은 대답이 없는 상대방을 애타게 부르더니 집안의 모든 전깃불을 끄고는 그녀의 엄마와 지윤을 벽장으로 밀어넣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어, 미안한데 지윤이하고 잠깐만 들어가 있어. 나 금방 올게. 별일 아니야. 그런데 나 오기 전까지 절대 여기서 나오지 마. 알았어?”
어린 그녀임에도 정국의 표정에서 뭔가 불안한 기운을 느끼고 지윤은 정국에게 물었다.
“아빠, 언제 와요?”
“곧 올거야. 지윤아,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엄마하고 꼭 여기 있어.” “네...” 안심시키는 정국의 말에도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은 불안감이 지윤을 휘감았다.
정국은 영문도 모르고 벽장에 들어가 겁을 먹은 수희와 지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벽장문을 닫았다. 벽장문을 닫기 전 본 아빠의 표정이 비장해 보였다.
한참을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벽장 속에 숨어서 수희가 어린 그녀를 꼭 껴안고 있기에 매우 답답했다.
“엄마, 아빠는...”
“쉿, 조용히 해.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런데 바깥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수희는 지윤을 더 꼭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눈을 감았다. 하지만 지윤은 무서운 마음에 앞서 바깥이 너무 궁금했다. 우리만 이렇게 숨겨놓고 오지 않는 아빠도 궁금하고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들어와 구두를 신은 채 돌아다니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꼭 붙잡혀 있지만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오른 팔을 뻗어 벽장문을 살짝 열었다.
키가 아주 큰 검은 옷을 남자 한 명이 안방을 마구 뒤지고 있었다. 그러다 벽지와 같은 색깔이라 잘 티가 나지 않는 벽장문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어린 지윤은 아주 조금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다가오는 무서운 남자의 얼굴을 보고 겁에 질렸다. 하지만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긴 얼굴에 가느다랗게 찢어진 눈과 오른쪽 뺨에 가로로 칼자국이 길게 나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지윤은 공포감에 휩싸여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남자는 서서히 벽장문 앞에 다가와 문을 막 열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때 남자를 부르는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남자가 방으로 들어온 남자에게 어떤 장부를 넘겨받았다.
“음, 수고했어.”
얼굴도 소름 끼치지만 쇠처럼 갈라지는 목소리도 소름 끼치는 기분 나쁜 남자였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안방을 획 둘러보더니 카드 하나를 던지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집 앞에서 울리더니 경찰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수희는 그때까지 덜덜 떨리는 몸으로 눈을 감고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있었고 지윤은 계속해서 바깥을 보고 있었다.
벽장에 숨어 있던 모녀는 경찰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지윤이 담요로 둘러싸여져 앞이 보이지 않게 되기 전 바닥에 떨어진 이상한 그림 그려진 카드 하나를 보았다. 발이 세 개 달린 독수리의 그림, 왜 새가 발이 세 개인지 의문도 잠시 아빠가 생일 선물로 준 아기 사자 인형을 꼭 끌어안고 온몸과 눈이 가려진 채 지윤은 누군가에게 안겨 응급실로 실려갔다.
위험에서 구출되었지만 그 날 이후 지윤은 다시는 아빠를 볼 수 없었다. 몇 일 뒤 다시 장례식장에 한 가운데에 있는 사진 속에 있는 아빠를 보았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수희의 손을 붙잡고 지윤은 엄마처럼 울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수희는 지윤을 데리고 그 집을 떠나 외할머니가 있는 청주로 갔다. 거기서 지윤이 고등학교를 들어갈 무렵 외할머니에게 그녀를 맡기고 한국을 떠났다. 아빠가 돌아가신 사건 이후 내내 공황 장애와 우울증 등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어했던 수희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끔찍한 기억이 있는 한국에 싫다며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된 딸을 두고 뉴질랜드로 가버렸다. 지윤에게도 같이 떠나자고 하였지만 지윤은 자신은 가야할 길이 따로 있기에 그러지 않겠다고 하고 한국에 남았다.
그 후 수희는 언니 부부가 하던 한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를 하며 일을 돕다가 그 곳에서 백인 현지인과 재혼을 했다. 지윤은 수희와 가끔 연락을 하고 지냈다. 수희가 뉴질랜드로 떠난 뒤 그녀는 한국에 온 적이 없었고 지윤은 그곳에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수희가 떠난 뒤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재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수희는 아버지가 다른 아이를 하나 낳았다. 그녀에게 보낸 남편과 어린 딸과 함께 찍은 사진 속의 엄마는 한국에서처럼 우울했던 모습을 많이 벗어내고 행복해 보였다. 그러면 되었다. 엄마가 행복하다면 정말 다행이었다.
수희는 경찰대학에 들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그녀의 직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길이니 그녀를 두고 멀리 떠나 다른 가족을 만들어 버린 수희는 더 이상 다른 간섭을 할 수가 없었다. 수희는 지윤이 지금이라도 경찰을 관두고 자신가 함께 살자며 뉴질랜드로 오기를 바랬지만 지윤은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미제의 사건으로 남은 아버지의 죽음을 뒤로 하고 여기를 뜰 수 없다. 적어도 아버지가 왜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셨는지 밝혀내고 진범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 그녀가 경찰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지금 수희는 그녀가 강력계 형사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지윤은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교통계에서 일한다고 거짓말을 해 놓은 상태였다. 아마 아버지처럼 강력계 형사가 된 것을 알면 정말 결심하고 한국에 들어와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희는 지윤에게 전화할 때마다 널 거기 혼자 두고 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처음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와 같이 눈물을 흘렸지만 지금은 괜찮다며 잘 지낸다며 지금도 가끔 울먹일 때가 있는 엄마를 걱정 말라고 다독였다.
지윤은 거실 한 쪽에 놓인 부모님과 자신이 찍은 사진과 엄마가 재혼한 가족 사진을 놓고 가끔씩 들여다보았다. 그녀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녀의 동생, 두 사진 속의 여자아이들은 이제 얼추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그녀는 의문에 묻혀버린 아버지의 일을 해결하고 동생이라는 이 아이를 만나러 갈 날이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