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두파의 은신처 근처에서 잠복근무를 하다 강형사와 이형사에게 자리를 넘기던 재욱은 진동으로 울리는 전화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가라 앉아 있었다.
“네. 네... 네...”
그렇게 단 세 마디를 하고 전화를 끊고 간 곳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하영만 국회의원의 집이었다. 그는 재욱은 큰아버지였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재욱의 친아버지였다. 재욱이 그의 호적에 올라가지 못한 이유는 재욱이 하영만의 사생아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재욱의 할아버지부터 국회의원을 지내고 영만 역시 젊은 시절부터 정치에 야망 큰 정치가였는데 한때의 불장난으로 혼외자식이 태어난 것이었다. 재욱의 어머니는 고급 살롱 마담이었다. 그녀는 재욱을 낳고 이 집안에 아이를 넘겨준 채 곧바로 영만의 곁을 떠났었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 이 집안 식구들만 아는 공공연한 비밀인 하영만의 혼외 자식. 이미지가 생명인 정치인인 영만에게 재욱은 존재 자체가 재앙덩어리일 수도 있었다. 홍길동 마냥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재욱은 집안 사람들의 눈치를 받으며 자라왔다. 어릴 때부터 태어난 것에 대해 자신을 저주했었지만 그나마 자신을 거두어준 양모인 지금 어머니가 그를 차별하지 않고 따뜻하게 대해주어서 삐뚤어지지 않고 견디며 바르게 자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쯤 체격도 좋고 타고난 싸움꾼 기질이 다분한 그는 형사가 아닌 조폭 두목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영만은 여당의 실세 중 한명이며 차기 대권을 노리는 거물이었다. 아들이지만 아들이 아닌 재욱은 그에게는 너무 가까이 있으면 불편하지만 또 멀리하기엔 아까운 잘난 녀석이기도 했다. 재욱이 사생아가 아닌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 친아들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재욱을 보면서 매번 했었다.
지금도 자신을 만나러 온 재욱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 잘난 녀석을 형사 나부랭이가 아닌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요즘 뭐 하고 지내는 거냐.”
영만 앞에서 굳은 듯이 정자세로 앉아 있는 재욱에게 물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개인적인 일을 묻는 게 아니었다. 요즘 무슨 수사를 하고 있는지 일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재욱은 표면적인 일만 말할 뿐이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비밀임무는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굳이 자신이 말하지 않도 영만은 다른 정보통을 이용해서 언론에 나타나지 않아 기자들이나 대중들은 모르는 요즘 주요 사건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항상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강력 범죄를 다루니까요.”
“허! 녀석! 항상 말이 짧구나.”
영만은 언제나 그렇듯 말을 아끼는 재욱에게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그래, 넌 언제까지 그러고만 지낼 생각이냐.”
이 질문에 재욱을 고개를 돌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영만을 보았다.
“36살이다. 너도 이제 혼기가 차다 못해 넘치니 결혼을 해야 할 것 아니냐.”
“... ...”
“왜. 결혼하기 싫으냐. 남자가 혼자 지내는 것이 과히 좋지 않으니 이젠 너도 네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거라.”
처음이다. 여느 집안의 아버지처럼 이렇게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걱정해 주듯이 말하는 것이. 낯선 모습을 보이는 영만의 말에 아무 대꾸가 없자 영만이 혀를 끌끌 찼다.
“언제까지 나라에 충성한다고 일만 할 작정이냐. 네가 여자를 싫어하는 놈도 아닐테고. 혹시라도 독신주의라면 내가 그런 꼴은 못 보니 조만간 결혼할 계획을 세우고 너무 늦지 않게 장가를 가거라.”
“큰아버님, 그건 제가 알아서...”
“중이 자기 머리 못 깍는다고 내가 나서줄 수도 있다. 우리 집안에 큰 도움이 될 여자이면서 너를 잘 보필 참하고 조용한 색시감으로 구해주마.”
“전 결혼 생각 없습니다. 설사 한다고 해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흠...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있는거냐? 그렇다면 한 번 데려와 봐라.”
아무래도 영만이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그는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 꼭 밀어붙였다. 재욱도 자식이기에 아무래도 인생에 있어서 큰 일인 결혼에 대해 더 이상 두고만 보고 있지 않겠다고 선포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저택을 나온 재욱은 차에 올라타서 영만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곱씹어 보았다. 자신도 자식이라고 사는 모양이 걱정이 되나 보았다.
“훗! 허허허...”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친아버지란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 권력을 위해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영만이 최대의 치부인 자신을 걱정하고 생각해 준단다. 이건 너무 생소해서 오히려 코메디 같았다. 그렇게 한참 헛웃음을 짓다가 영만이 괜히 꺼낸 얘기는 분명 아니기에 재욱의 눈빛이 언제 웃었냐는 듯 다시 싸늘해졌다.
영만의 결혼하라는 말에, 여자가 있냐는 말에 재욱은 지윤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생각해 본 적 없는 결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이런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준다면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면 결혼은 꼭 그녀와 하고 싶었다.
마음 속에만 담아 둔 말을 이제 할 때가 온 것인지. 그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든 되지 않든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표현을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시동을 걸고 핸들을 꺽었다.
재욱은 차를 몰고 지윤이 사는 집 앞으로 갔다. 가끔 여기에 올 때마다 그리 좋은 동네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혼자 사는 그녀가 이런 곳에 사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직장 상사일뿐인 그가 그녀에게 이사를 가라느니 다른 곳에 집을 알아봐준다느니 할 수는 없으니 잠자코 두고만 보고 있었다.
틈을 보이지 않는 그녀 때문에 더 다가가기 힘들었다. 예쁜 외모 때문에 타부서에서도 은근히 인기가 많은 그녀이지만 아무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일종의 철벽녀 스타일인 지윤. 그녀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남자들의 접근을 쉽게 불허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들 사이에서 지윤에게 붙여진 별칭이 하나 있었다. 눈송이 같은 여자. 워낙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차갑지만 손에 쥐고 싶은 의미의 눈송이 같은 여자. 하지만 손에 쥐면 그냥 녹아내려 사라질 것 같아 다가가기 힘든 그녀에게 붙여진 별명.
눈송이라 불리던 함박눈이라 불리던 다른 남자들 입에서 그녀가 오르내리는 것이 싫었다. 이젠 그냥 하재욱의 아내로 불려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아까 낮에 그녀에게 좀 심하게 대한 것 같아 사과도 할 겸 지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반장님."
언제나 깍듯이 그녀가 부르는 호칭에 그의 이마가 조금 찌뿌려졌다 펴졌다.
"집 앞인데 좀 볼 수 있을까."
"... 네, 알겠습니다."
잠시 침묵 뒤에 알겠다는 대답이 나왔다.
자려고 막 샤워를 끝낸 지윤은 전화를 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검은색 세단이 하나 서 있다. 지윤은 서둘러 옷을 입고 머리를 재빨리 말렸다.
차에 오른 지윤에게서 향긋한 비누향이 났다. 항상 하나로 묶고 다니는 머리가 어깨 위로 늘어져 봉긋한 가슴 위로 흘러내려 촉촉하게 빛났다. 그가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그와 눈을 마주치고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재욱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이렇게 좁은 차 안에 좋아하는 여자와 단 둘이 있으면 남자가 어떤 상태가 되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자려고 했나. 불러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녀에게 직속 상사이자 9년이나 선배인 재욱은 가까이 하기엔 어려운 상대였다. 그래서 그 앞에서는 항상 긴장이 되었다. 아까 낮에는 어떻게 그렇게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한 가지 목표가 너무 분명해서 그랬을 것이다.
“아직도 네 생각 포기 못한건가?”
“그냥 반장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지윤은 그의 앞에서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안 그러면 그는 그녀가 시도도 하기 전에 주저앉게 만들테니까.
차 안에 퍼지는 은은한 그녀의 향기에 그녀에게 손을 뻗고 싶은 걸 꾹 참으며 핸들 위로 손을 올렸다.
“서지윤, 내가 널 못 믿어서 아니야. 그냥 네가 위험에 처하는 것이 싫다. 남자로서 내가 널 보호해 줄 순 없는건가?”
재욱의 말에 놀란 지윤이 그를 보았다. 그녀에게 남자로 다가가려는 재욱도 용기를 내서 그녀와 마주보았다.
“아버지 일 때문이라면 내가 되도록 나서서 꼭 해결해 주지.”
“... 어떻게 아셨습니까...”
“얼마 전 네 프로필을 다시 보고 알았다. 17년 전 돌아가신 서정국 형사님 딸이라는 것을.아버지께선 억울하게 돌아가셨더군.”
그의 말에 지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아버지의 죽음이 언급되면 이런 반응이 나왔다.
“힘든 일 있으면 그렇게 혼자 아파하지 말고 나에게 나눠주지 않을래? 지윤아?”
재욱은 핸들 위에 있던 오른 손을 뻗어 지윤의 말캉한 뺨 위을 만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의 손끝에 눈물이 묻어났다. 그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 안에 안았다.
“이제 그래도 되지 않을까? 내가 널 지켜줄게.”
직장 상사가 아닌 남자로 지켜준다는 말이었다. 항상 맴돌며 그녀를 지켜보기만 하던 그가 드디어 그녀에게 다가왔다. 지윤은 갑작스런 그의 고백에 어떨떨하면서도 정말로 든든한 그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재욱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안고만 있어도 좋은데 조금 더 욕심을 내어 언제나 맛보고 싶었던 지윤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첫키스라 어떻게 할지 몰라 그가 하는데로 가만히 있는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솜사탕 같이 달콤한 그녀의 입술 때문에 키스만으로도 욕망에 불꽃이 타오르며 허리를 배회하던 손이 어느새 가슴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지윤의 머릿속에 위험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을 여자로 생각한다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평생 기대고 싶을 만큼 든든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였지만 그녀에겐 해결해야 할 큰 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를 남자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윤은 그를 세차게 밀어내고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더 이상 차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차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재욱은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보고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 차를 출발 시켰다.
집으로 올라 온 지윤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침대 위에 앉았다. 침대에 누워 첫키스를 한 자신의 입술을 만져보았다. 서늘한 손가락이 열기 가득한 입술을 조금 시원하게 했다. 지난 3년 동안 상사로서 딱딱하게 대하며 행동했지만 그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고 그녀도 알면서 모르는 척 지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그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줄 몰랐다.
지윤은 사랑이라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부모 중 아빠는 갑자기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내내 힘들어하던 엄마는 자신을 두고 결국 다른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보았고 또 다른 사랑을 만나고 금세 그 사람과 살고 아이도 낳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어차피 끝이 보이는 사랑인데 시작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재욱이 남자로 다가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 사랑에 회의적인 생각을 바꿔 자신도 조심스럽게 사랑을 키워가도 될지.
하지만 그것은 정말 나중에 생각해야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런 하찮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지윤은 좀 전에 그와 있었던 일을 떨쳐버리려 머리를 흔들며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 위로 푹 뒤집어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