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은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걸 현관에서부터 그를 부축해서 침대 위에 눕혔다. 무엇인가 무척 힘든 일이 있었는지 그가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처음 봤었다. 자켓도 벗겨주고 양말도 벗겨주고 셔츠의 단추도 좀 더 편하게 몇 개 풀어주었다. 그리고 옷가지를 들고 일어나려는데 그에게 꼼짝없이 붙들려 안겨졌다. 그리고 불려지는 이름. 서지윤. 자신을 그 여자로 아는지 술 때문에 이성이 마비된 그는 그 날 밤 자신을 가졌다.
자신을 붙들어 놓고 내내 부르던 이름. 지윤아. 서지원이 아닌 서지윤이었지만 지원은 눈물이 나는 가운데서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자신의 몸이라도 그에게 위로가 된다면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는 아침에 깨어 간 밤에 몸을 나누었던 여자가 그녀임을 알고 굉장히 미안해했었다.
그녀가 집에 들어온지 6개월이 지나자 이렇게 선을 넘는 일도 생기고 더 이상 한 집에 남녀가 같이 사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독립을 하는 것이 좋겠다며 재욱은 그녀에게 작은 꽃 가게를 선물해주었다. 지원은 그의 끝없는 배려에 눈물이 났고 떠나기 전날 밤 다시 한 번 그에게 자신을 주었다. 재욱은 정말 괜찮다며 옷을 벗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지만 지원은 그의 등을 꼭 껴안고 빈털터리인 그녀가 해줄 게 없다며 이렇게라도 고마움을 표현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녀의 진심이 통했는지 아니면 젊고 어여쁜 여자의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는지 고심하던 그는 등을 돌려 그녀를 안았다. 그 날 재욱은 자신의 욕심만 채우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여자인양, 소중한 사람인양 그녀를 대해주었다. 지원은 그를 사랑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 고마웠다.
꽃가게를 하는 일은 노동이 많이 가는 일이라 힘들었지만 즐거움도 컸다. 원래 꽃가게 하던 곳을 인수한 거라 가게를 열 때 그녀가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었다. 틈틈이 원예 상식 책을 보며 이름도 외우고 키우는 방법도 익히고 거래하는 곳도 잘 뚫어 때에 따라 예쁜 꽃화분들을 갖다 놓았다. 장사는 이것 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던 경험이 있어서 손님 대하는 법을 알고 있어서 나름 잘 하였다.
하지만 제일 힘들었던 건 역시 사람을 대하는 것이었다. 동네 양아치나 총각들이 그녀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것이다. 상처가 많은 그녀이기에 이런 상황이 무척 난감했다. 특히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남자들이 있었는데 자신이 잘 있는지 한 번씩 들렸던 재욱이 그것을 알게 되어 힘 있고 재력 있는 남자 친구 행세를 해주어서 다행히 더 이상 가까이 접근은 하지 않았다.
지원은 그런 그가 너무 든든했다. 고마운 은인, 사랑하는 사람, 생명의 은인 등 그에게 붙여주고 싶은 수식어가 많았다. 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아끼고 아껴서 돈을 모으고 있었다.
이층에 올라와 자기 전에 그녀에게는 제법 큰 돈이 쌓인 가계부와 통장을 보았다. 그리곤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공부하던 책을 들고 이불 위에 엎드려서 펼쳤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가 가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밤늦은 시간에 어떤 남자가 이렇게 가게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나쁜 기억들이 다시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못하고 밤새 덜덜 떨며 곤욕을 치른 적이 있어서 지원은 놀란 가슴을 쓸어안고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가게 문은 단단히 잠겨 있으니 주변 사람들 다 깨어나도록 문을 부수지 않는 이상 들어오지는 못했다.
전등불을 켜고 보니 가게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오랜만에 찾아 온 재욱이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복잡하게 잠긴 문을 성급하게 열었다.
“왠일이세요. 이 밤중에.”
지원이 그를 보고 좋아 수줍게 웃었다. 그녀는 그가 많이 보고 싶지만 그럴 투정을 부릴 위치가 아니다. 그래서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연락도 못하고 지냈었는데 이렇게라도 불쑥 찾아와주니 너무 반가웠다.
그가 눈물이 맺히며 미소를 짓는 지원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지원아, 미안하다.”
그녀는 그가 무슨 의미로 미안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 이용해도 괜찮아요. 다른 여자라고 생각하고 안아도 괜찮아요. 당신이 날 어떻게 대하던 상관없어요. 당신은 내가 죽어서라도 은혜를 갚고 싶은 사람이에요. 모질고 무서운 세상에서 나에게 방패가 되어 준 사람이에요. 너무 고마운 사람이에요. 감히 입 밖에 꺼내어 표현할 수 없지만... 당신을 사랑해요.'
재욱은 그녀를 안아들고 윗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딛었다.
한쪽에서 웅크리고 잠이 든 지원의 몸에 이불을 덮어준 재욱은 팔을 이마에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이 어리고 불쌍한 여자를 이렇게 다루는 자신이 정말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자신을 사생아로 태어나게 한 아버지란 사람의 두 얼굴을 보면서 사춘기가 지나 20대 후반까지도 경멸했었는데 지금 보니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는 나쁜 놈이었다. 결국 이중적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인가. 밖에서는 정의로운 형사인 척 하면서 남모르게 이런 어리고 갈 곳 없는 여자나 취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고 와서 다른 여자를 찾다니.
처음이 힘들었지 이젠 정말 쉽게 생각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찾아와서까지 이렇게 짐승 처럼 욕구를 푸는 도구로 이용해 버리고 말았다.
경찰서에서 보게 된 사정 딱한 사람을 구해 주고 돌봐 준 건 지원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만 집으로까지 데려가서 돌봐주게 된 것이 처음이었다. 그 때부터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그는 분명 혈기왕성한 남자인 것을 어쩌자고 여자 꼴을 다 갖춘 이 아이를 데려왔던 것일까. 하지만 다른 여자들처럼 보호시설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때 신참이었던 지윤과도 닮고 사진으로만 본 친어머니하고도 닮았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집으로 데려왔다. 그녀는 지윤과는 이름까지도 비슷한 서지원. 자신보다 한참 어린 이제 갓 성인이 된 상처 많은 여자였다.
그가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들여다보니 아직도 얼굴에 솜털이 뽀송뽀송했다.
“후... 이런 젠장.”
욕이 나왔다.
갈 곳이 없어 보이는 그녀를 무작정 집에 데려다 놓고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만 춥지 않고 굶주리지 않고 위협당하지 않도록 집에 둘 뿐. 바쁜 와중에도 잠시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 내면과 싸우느라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심리치료도 좀 받게 하고 바람도 쐬게 해주었다.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너무 두려워하던 상처 가득했던 어린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청소를 한다, 집안일을 한다하는 모습이 이제 죽지 않고 살겠다는 희망을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집에서는 되도록 같은 공간에 있지는 않았다. 자신처럼 늑대의 피가 흐르는 남자라는 동물은 믿을 수 없기에. 하지만 너무 오래 데리고 있었나. 어쩌다 한 번씩 스트레스가 가득차면 자신도 모르게 폭주하는데 결국 그 술 때문에 나쁜 놈이 되고 말았다. 술에 힘을 빌려 지윤을 안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어보니 지원이었다. 지윤을 안았을 리가 없었다. 틈도 보이지 않는 그녀 옆에는 다가가지도 못했으니까. 이성이 술에 먹혀 현실인지도 모르고 아마 꿈을 꾼다고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더 이상 그녀를 데리고 있을 수 없었다. 한 번도 웃지 않던 지원이 산책을 하며 봄꽃이 핀 것을 보고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었다. 그래서 언제나 싱그러운 꽃을 보라며 꽃집을 하나 장만해 주었다.
사실 내쫒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가 친오빠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남편은 더더욱 아니니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것도 남들이 모르게 말이다.
그렇게 잘 적응하면서 사는 지원에게 가끔 들러서 힘 쓰는 것이나 고칠 것이 있으면 도와주고 집적대는 놈들도 쫒아주었다. 이 여자가 활기차게 웃으며 사는 것이 보기 좋았다. 그가 좋아하는 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지윤을 많이 생각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지원도 가끔 생각이 났다. 지원을 보는 그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녀를 여자로 보는 것인지... 그러면 안되는데.
오늘처럼 이렇게 찾아와서 지윤을 갖고 싶은 욕망을 이 여자에게 대신 풀면 안되는데. 그럼 자신이 얼마나 나쁜 놈이 되는가. 경멸하던 친아버지와 별다른 게 없지 않은가.
재욱은 잠이 든 지원을 남겨두고 가게를 나오면서 다시 여기를 찾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