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혼(魂)과 백(魄)의 안내자
#6. 장마가 끝나던 날
“젠장! 유치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용! 수룡! 나와랏! 수룡!!!!!”
선우명은 용(龍)을 좋아한다. 옛이야기 속 수호신(守護神)이나 상상의 영수(靈獸) 중 단연 최고는 용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부적 삼아 개발새발 용을 그리기 시작했었고 지금까지도 계속 기록에 남아있는 용에 과한 설명이나 이미지 같은 건, 아무리 잡다한 거라도 다 찾아보곤 했었다.
그렇기에 선우명은 그 어떤 것보다도 선명하게 용을 그려낼 수 있었다.
“용!!!!!!”
선우명은 이미 기를 뺏길 대로 뺏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기운을 담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용’을 불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짧은 ‘말’은 거센 폭풍우를 뚫고 퍼져나갔다.
이번엔 즉각 반응이 있다. 땅이 울리고 공기가 흔들렸으며 굵은 빗줄기들과 바닥에서 흘러넘치던 물방울들이 엄청난 속도로 크게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용의 파란 비늘 하나하나, 기다란 수염 하나하나, 강인한 발톱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빛났다. 커다랗고 부리부리한 황금색 눈망울과 그것만큼이나 커다랗고 영롱하고 투명한 진주 빛 여의주.
항상 상상만 하던 전설 속의 용이 선우명의 ‘말’을 받들어 선우명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
용의 커다란 입과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결과 굉음은 선우명이 만들어 낸 용이 단순한 홀로그램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즉 가짜가 아니라 진짜다. 그것은 실제로 살아서 숨 쉬며 자유로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용은, 선우명이 상상하고 원했던 것 그대로, 거대한 토네이도처럼 휘몰아치며 선우명에게 우글우글 붙어있던 수백의 귀신들을 모두 끌고 갔다.
그 무섭고 역겨운 바퀴벌레 같은 잡귀들이 용의 커다란 콧김에 의해 후루룩 빨려 날아오르고, 마지막엔 그 커다란 용의 입안으로 쏙쏙 들어갈 땐, 선우명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흔들었고 ‘아자’ 소리까지 흥겹게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내 손을 내리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선우명의 하늘을 찌를 듯 높아가던 쾌감과 만족감은 거대한 푸른 용의 거칠고 무지막지한 움직임이 잡귀들뿐만 아니라 주위의 나무들과 건물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것을 보자마자 지하 바닥까지 떨어졌다.
“깔깔깔깔깔깔깔깔, 하하학, 깔깔, 크크큭크크큭큭큭, 깔깔깔.”
그 많던 바퀴벌레 괴물들을 고새 다 먹어치웠는지, 어느 순간 선우명이 익히 알고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애가 미친 듯이, 허리까지 부여잡으며 숨넘어가듯 웃고 있었다.
*
“으아아아아악!!”
선우명은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면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온 몸은 식은땀으로 끈적이고 있었고 숨은 가쁘게 달아올라 있었다.
잠시 헉헉거리며 당황했지만, 자신이 알 수 없는 그 고약한 악몽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물론 오늘도 그 꿈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 어라? 오늘은 웬일이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선우명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탐색했다. 어쩐 일로 오늘 아침에는 자기 근처에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아애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땀에 젖은 채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훌훌 털고는 몸을 일으켰다. 등 뒤에서 그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깔깔깔깔깔, 역시 오늘도네, 오늘도야. 그 ‘까아아아아악’, 어떻게 한 번을 안 빠지냐? 큭큭크크큭.”
앙칼진 목소리가 비아냥대는 것과 동시에 잔뜩 젖은 수건이 명의 얼굴 쪽으로 거세게 던져졌다. 수건이 던져진 쪽으로 째려보려던 명은 막 잠에서 깬 자신의 두 눈을 다시 급하게 감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악! 진짜! 이 미친! 아오, 진짜로! 정말! 너, 너, 너, 내가 제발 옷 좀 잘 챙겨 입고 나오라고 몇 번 이나 말했냐고! 얼른 안 입어?”
한 박자 늦게, 선우명은 버럭 고함을 내지를 수 있었다.
욕실에서 막 나와 명에게 수건을 던진 것은, 역시나 언제나 골칫덩어리인 ‘아애’였다. 꼴 보기 싫은 밥벌레 식객인 주제에, 제 주제를 모르고 항상 지맘대로인 그 녀석은 이번에도 또 알몸으로 거실에 당당하게 서있었다.
“크킄큭. 야, 야,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지, 뭘 그리 매일 신선하고 새롭게 놀래는 거야?”
선우명은 아애를 외면한 채 다시 소파에 풀썩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저 ‘안하무인’ 그 자체인 미친 존재가 알몸으로 집안을 휘저으며 돌아다닐 때,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아. 내가 미친다, 미쳐. 내가 너 때문에 아주 늙는다고, 늙어.”
“우쭈쭈, 우리 애기 도련님 많이 놀랐어? 누나가 빨리 끝내줄게. 후후후훗”
이번에는 평소답지 않은 간들거리는 목소리를 내며 명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선우명은 소름끼치는 여자의 애교에 진저리를 치며, 다시 한 번 아애를 집으로 끌어들인 날 밤의 일을 후회하면서 자신의 머리를 낡은 테이블에 아프게 쿵쿵 박아댔다.
“깔깔깔, 그나저나 오늘 날씨 진짜 짱 좋네. 다 너 덕분이지, 킄큭크큭. 야, 야, 어젠 진짜 짱! 너, 너~무 멋졌다. 크크크크큭.”
아직도 알몸 상태 그대로인 아애가 창문을 활짝 열고 밖을 보며 말했다. 역시나 새벽 5시, 이른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어제와는 확연하게 다르게 공기가 산뜻하니 맑았다.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사실 비는 어제 선우명이 용을 불러낸 직후에 그쳤었다.
선우명의 소원대로 용은 휘온동 뿐만 아니라 신문구 일대의 모든 잡귀들을 속속들이 다 잡아들였고, 그 모든 일을 마친 후 유유히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시커먼 비구름과 바람, 천둥번개까지 모두 용의 꼬리를 타고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어느 새 드러난 밝고 따뜻한 햇살 아래에 남은 것은 쑥대밭이 되어버린 지상이었다.
나무는 다 꺾여 넘어졌고 낡은 집들의 지붕과 담들도 반은 폭삭 허물어졌다. 도로도 일부 파손 되었고 여기저기 차량들도 부서졌으며 온갖 잡쓰레기들이 거리 구석구석을 다 뒤덮은 상태였다. 인명피해가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오후 내내 유래 없이 강렬했던 강풍과 폭우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도시에 관한 뉴스가 쏟아졌다. 그리고 이 비정상적인 폭풍우를 끝으로 장마전선이 물러나 기나긴 장마가 끝이 나리라는 소식도 함께였다.
아마 서울 도심 한 가운데에서 발생한 용오름에 관한 기사는 일주일이 넘도록 반복 될 것이다. 이미 진짜 용을 본 것 같다는 경험담이 인터넷을 뒤덮고 있으니 말이다.
“크크큭. 그나저나. 너 저것들 다 어떡하냐? 니 덕분에 이 난리난 걸 일반 사람들은 몰라서 그렇다지만, 너네 사부는? 아무 말 안 할까? 이거, 이거, 이런 건, 모른 척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데 말이지? 깔깔깔깔깔.”
사부님은 주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한 채 어설프게 사용하느니, 아예 사용 안 하는 게 더 나은 것이라고 항상 경고했었다. 이번처럼 힘을 완벽히 다스리지 못해 사람이나 건물 등에 피해가 생겨버리면, 보통은 아무것도 모르는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에게 그 뒷감당을 하게 만드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사부님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조직 내의 제1규칙이, ‘일반인은 모르게! 피해는 최소한!’ 이라고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다 보상하고 싶었다. ‘수해돕기모금함’에 몰래 돈 한 무더기라도 넣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살던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빈털터리 신세 주제에 그런 거창한 꿈을 꾸는 것도 민망했다.
“하아. 미친.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옷이나 입지?”
“에이, 안 입고 있는 게 시원하고 좋은데?”
“아우, 진짜. 야, 너, 누가 보면 풍기문란으로 고소당한다고! 아니다, 그러고 다닐 거면, 차라리 여자 말고 남자 해! 사내놈으로 변신하라고!”
아애가 앞으로도 내내 저런 식으로 행동할거라면, 차라리 같은 남자의 몸을 한 아애와 사는 게 자신도 민망하지 않고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선우명은 이내 머리를 좌우로 내저었다. 건장한 남자가 알몸으로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꼬락서니도 볼 게 못된다.
“하아, 아니다, 아니야. 제발, 그냥, 옷 만 제대로 입고 있으면 안 될까?”
“깔깔깔깔깔. 야, 전화 온다. 전화나 받아.”
정확히 그 말이 끝나는 그 순간에 선우명의 휴대폰에서 시끄러운 록 음악이 흘러 나왔다.
“넌 저런 시끄러운 소리가 뭐가 좋은데? 크크큭크큭.”
“시끄러.”
몇 달 만에 울려오는 휴대폰 전화벨 소리에, 명은 잔뜩 기대에 찬 채 전화기를 들었다. 어쩌면 사부님이 드디어 길거리의 공중전화박스를 우연히 눈여겨보게 되었고, 마침내 집에서 외로이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유일한 제자를 떠올렸을 수도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잔뜩 들떠서 튀어 나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음……, 여보시오?”
“네? 아……, 저기, 누구시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나이 지긋한 남자 노인의 목소리에 선우명은 잔뜩 실망했지만, 짐짓 안 그런 척 목소리를 다듬고선 되물었다.
대충 옷가지를 걸치고 온, 재수 없는 눈동자와 얄미운 목소리의 주인 아애가 꼴좋다는 듯, 낙심한 선우명의 눈앞에서 혀를 날름날름 내밀었다.
“음. 그쪽이 우운(雨雲)선자(仙者)의 하나 뿐인 제자라는 그 ‘선우 명’군인가?”
“네?”
오랜만에 듣는, 아니 사부님을 처음 만났던 날 말고는, 그 이후 다시 들어본 적이 없었던 말이었다. 사부님의 정식 호칭, 그러니까 그 쪽 조직에서 서로를 호칭하는 단어를 듣자 선우명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우운(雨雲)선자(仙者).
사실 사부님이 그 호칭으로 자신을 소개했을 땐 반 장난이려니 생각했었다. 케이블 TV에서 여름마다 흉가체험을 다니던 엑소시스트들처럼, 실제로도 서로를 진짜 ‘무슨 선녀’니 ‘거시기 도사’니 ‘머시기 선자’니 ‘뭐뭐 도령’이니 하면서 부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어색한 호칭을 자신의 사부를 지칭하는 데 사용하는 다른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아니, 솔직히 그가 사람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일렀다. 사부가 알고 지내는 자들 중에는, 인간들보다는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존재들이 더 많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사부를 처음 만났던 2년 전의 그 날부터 선우명은 잘 알고 있었다.
하여튼 사부가 거의 충동적으로 자기를 제자 삼았다는 것을 잘 아는 선우명으로선, 사부가 자신을 당신의 제자라고 누군가에게 소개를 했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무한한 감동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우운(雨雲)선자(仙者)의 제자’라고 표현해 주는 그 상대가 어쩌면 또 다른 도사님이거나 아니면 이계(異系)의 존재일수도 있다는 것에 호기심도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 네, 뭐, 음, 제가 그 제자이긴 한데요. 그런데, 저기, 사부님은 출타중이신데요.”
조금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잘 말했다고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하며 선우명은 노인의 반응을 기다렸다.
“음……, 그건 알고 있다네. 사실은, 우운 선자가 길 떠나기 전에 나에게 자네 전화번호를 주었다네. 자신의 일이 좀 늦어질 수도 있으니, 뭔가 혹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자기 대신 자네에게 연락을 하면 될 거라고 말이지.”
“네?”
“그나저나 뉴스에서 난리가 아닌가? 우운 선자의 집이 있는 곳에서 요란하게 물난리가 났다고 하니까, 걱정이 되는구먼.”
“아? 음음, 아, 뭐, 저희 집 쪽은 전혀 문제없으니까 걱정 하지 않으셔도…….”
“그렇군. 수리오래 못 쪽도 매일 가보고 있는 거겠지?”
“…네에. 그런데 저희 사부님이랑은 어떤 사이신지……?”
“왜? 크크큭. 너네 사부랑 친하면 돈이라도 빌리게? 밥값이랑 월세 좀 달라고 하려고?”
아애가 이번에는 선우명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와서는 놀리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로 그 면상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전화기 너머의 노인이 자신의 지금 심정을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그가 사부님과 같은 정도의 고수라면, 지금 자신의 마음속에 치받아 오르는 잔인한 분노를 눈치 챌 것이고, 그렇다면 나중에 돌아올 사부님에게 고스란히 일러바칠 수 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직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냐며, 사부에게 된통 기합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명은 얼른 마음을 다 잡았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셨듯이, 혹시 저희 사부님 대신에 제게 뭔가 부탁하실 것이 있으신 건지……?”
순간 무례한 말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었지만, 빙빙 말을 돌려하는 것은 자신의 성격과는 맞지 않다는 것을 선우명도 잘 알고 있었다.
“흠흠. 좋네. 본론을 바로 말하는 게 좋겠지. 그게 나나 자네에게나 다 편할 테니까. 미안하지만 심부름 좀 해 줬으면 하네.”
“심부름이요?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 사부에게 허락을 먼저 구하는 게 옳은 일이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그 사람과는 도통 연락이 닿지 않는다네. 그래서 아직 자네에겐 좀 무리라는 걸 알지만……, 이리 자네에게 직접 부탁하는 것일세. 이 늙은이의 작은 부탁 좀 들어주겠나? 물론 사례금은 충분히, 제대로 쳐 주겠네.”
“네에? 사례금이요?”
선우명의 입속에서 빛보다 빠르게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네, 그러니 이 늙은이 대신에 일 좀 해주지 않겠나? 사람 하나 찾는 일인데….”
“하겠습니다!!!”
물론이지. 설령 찾는 게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라 해도, 기꺼이 찾아내 그 앞에 대령하겠노라고 선우명은 속으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