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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과 함께하는 나날
작가 : ghostS
작품등록일 : 201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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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마천루
작성일 : 17-12-18     조회 : 279     추천 : 0     분량 : 9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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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4. 가제: 억울한 죽은 자와 억울한 산 자

 

 #16. 마천루

 

  “야, 빨강이 너 왜 이렇게 늦게 와? 너 때문에, 내가 밥 못 먹고 있잖아?”

 

  홍란의 등장에 먼저 입을 연건 홍단도 선우명도 아닌 아애였다. 날카롭게 따져 묻는 아애의 눈빛이 칼날처럼 매서웠다.

  사실 하루 종일 너무 바빴던 홍란은 급하게 온다고 나름 서두른 거였다. 하지만, 못 말리는 식탐 요괴인 아애 입장에서는 늦어도 너무 늦은 등장인 셈이다.

 

  홍단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자신에게 떨어진 아애의 불호령에 그만 몸이 굳었다. 처음 보는 이상한 여자가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떽떽 거리는 것도 기분 나빴고, 자기를 빨강이라고 부르는 것도 짜증이 났다. 자기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도 또 처음이었다.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 당신, 나 알아요? 언제 봤다고 반말이에요? 선우명씨, 이 사람 뭐에요?”

 

  “아, 저기, 미안합니다. 하아, 아애, 너 미쳤냐?”

 

  부들부들 거리는 홍란의 눈치를 보며 선우명이 아애를 말렸다. 물론 아애가 선우명이 화를 낸다거나 혼을 낸다고 해서 신경을 쓸 위인이 아니지만 말이다.

 

  “늦은 거 맞는데, 뭐. 홍란이 너도 그냥 얼른 앉지?”

 

  무심한 표정의 홍단은 다시 손을 들어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요구하면서 말했다.

 

  “레드!!! 홍란이도, 빨강이도 아니고, 레드!”

 

  자신의 머리카락 색 만큼이나 잔뜩 붉어진 얼굴로 홍란이 씩씩대며 외쳤다. 얼굴 한 가득, 억울함이 담겨져 있었다.

 

  “레드님, 미안해요. 저 녀석 아애가 조금 싸가지가 없어서…, 아니 인간의 예의범절을 몰라서……, 하하핫.”

 

  선우명이 쩔쩔매며 홍란을 달래자, 홍란이 마지못해 겨우 앉았다. 그리고 계속 열 받게, 깔깔깔 웃고 있는 아애를 째려보며 외쳤다.

 

  “아니, 나도 바빴다고요. 내가 진짜, 사고 수습하고! 선우명씨 대신에 장우진 찾아내느라고! CCTV 계속 보느라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온 건지나 알아요?”

 

  “깔깔깔갈깔, 다 빨강이 니 팔자지, 뭐. 크크큭크큭. 어서 빨리 고기나 내 놔. 어제 내가, 니 닭 고거 그대로 꿀꺽 잡아먹을 수 있었는데 특별히 냅뒀으니까. 지금 당장 그 닭만큼 맛있는 고기를 내놓는 게 좋은 걸? 크크큭큭큭.”

 

  아애의 말에, 열을 받아 잔뜩 붉었던 홍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그리고 선우명 쪽을 바라보았다.

 

  “하하, 아, 그게, 아애도 그 닭을 볼 수 있긴 하고요, 하하하하. 또 먹을 수도 있긴 한데요……, 절대로 못 먹게 하겠습니다. 레드님은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홍란은 이번엔 천천히 홍단을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 홍단은 담담히 말해주었다.

 

  “응, 맞아. 이 녀석은 니 닭도, 너도, 심지어 나도, 다 먹을 수 있는 녀석이야. 응, 맞아. 쟤가 요괴야. 그러니까 덤비지 말고 조용히 밥 먹이는 게 좋을 걸. 배부르면 그나마 좀 조용해지니까.”

 

  아애의 눈빛이 심각하게 변하는 것을 느낀 홍란은 서둘러서 웨이터에게 최고급 코스 요리와 큼직한 스테이크 요리도 추가로 주문했다.

 

 *

 

  다행히 식사시간은 나름 평화롭게 흘러갔다.

  아애는 무식하게 보일 정도로 허겁지겁 계속 추가된 모든 음식을 흡입했고, 선우명은 처음 먹어보는 고급 레스토랑 음식의 고급스러움에 감탄을 했다. 다이어트를 하는 지 홍란은 별로 먹지를 않았고, 특히 홍단은 와인만 한 병 더 추가 했을 뿐 다른 음식은 손도 대지 않았다.

 

  “홍단님은 왜 안 드세요? 엄청 맛있는데?”

 

  “난 원래 평범한 인간들이 만든 음식은 안 먹어. 비려.”

 

  “에? 아침에는 잘 드셨잖아요?”

 

  “너 같은 기운을 가진 사람이 직접 만든 건, 좀 괜찮더라고. 그건 맛있었어. 내일도 부탁한다.”

 

  “크크킄큭. 생긴 대로 까칠하게 구네. 크크큭.”

 

  “말조심 좀! 아애 넌, 맛을 못 느끼는 게 분명해. 그냥 허겁지겁 채워 넣는 데에만 급급한 걸 보면, 넌 미각은 못 느끼고 허기만 느낄 줄 아는 게 분명하다고.”

 

  “뭐 어때~? 깔깔갈깔깔.”

 

  “하아, 그리고 아애 너 진짜 그 무식하게 먹어대는 모습 고쳐야 할 것 같다. 집이면 모르겠는데, 집밖에선 곤란해, 정말.”

 

  “깔깔깔깔, 웃기고 있네~. 근데 우리 선우명씨? 너 홍단 새끼 만나고 나서 나한테 잔소리가 늘었다? 뭘 잘못 먹고 간이 부은 거니? 크크큭큭.”

 

  “아우, 이 미친. 나한텐 막 그래도 돼. 하지만 홍단님에게 새끼가 뭐냐? 새끼가?”

 

  “저 자식 나한테 진다니까? 크킄큭.”

 

  “야, 아애, 너. 조만간 다시 한 번 붙자. 그땐 제대로 승부를 보지 못한 거잖아? 니가 내 팔 뜯어내고선 그 후에 내가 공격할 타이밍에 딱! 갑자기 멍이 피 냄새 난다고, 니가 갑자기 끝내고 간 거잖아?”

 

  이번엔 아애의 말을 내내 무시하던 홍단도 울컥한 모양이었다.

 

  홍란은 세 사람이 하는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한 채 숨죽이며 지켜보기만 하다가 홍단의 반응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애가 홍단을 ‘홍단 새끼’라고 부르는 것과 팔을 뜯었다는 말에도 당황했지만, 홍단이 저렇게 짜증을 부리고 게다가 버럭 화까지 내는 모습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깔갈갈깔깔, 오구오구, 그래서 억울했어? 크크큭. 그럼 당장 한 판 붙어볼까? 여기 장소도 딱 좋네. 어제 거기보다 훨씬 더 높고. 크크큭ㅋ큭, 밥도 먹었겠다, 저 꼭대기로 올라가? 어때? 크큭ㅋ큭.”

 

  “하아, 아애 넌 좀 조용히 해. 이 타워빌딩 전체 다 정전 나는 꼴 보고 싶냐? 제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얌전히 좀 있지? 홍단님도 너그럽게 이해하시고 넘어가 주시고요. 그것보다, 홍…, 아니 레드오어키드님? 장우진에 대해서 좀 자세히 말해주세요.”

 

  선우명의 개입에 홍단이 표정을 가다듬었고 아애가 우스꽝스런 표정으로 혀를 쏙 내밀더니 잠잠해졌다. 그 모습을 보자 홍란은 이들 세 사람의 관계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음, 이 선우명씨, 알고 보면 진짜 거물인건가? 홍단 새끼가 아까 자기가 질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면, 아애라는 저 여자가 더 세다는 건데. 게다가 요괴라며? 그런 여자한테 선우명은 어떻게 저렇게 겁 없이 대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또 홍단 새끼한텐 왜 저렇게 깍듯해?’

 

  “레드님? 장우진에 대해서요.”

 

  “아? 아! 그러니까요,······.”

 

  홍란은 자신이 어떻게 장우진을 떠올렸는지에 대한 것부터 CCTV를 뒤졌으나 그 장우진의 뒷모습만 겨우 찍혀있었다는 것, 그리고 병원에 실려 간 사람들 중엔 장우진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제일 어이없고 기가 막혔던 김삼재 노인에 관한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뭐라고요? 김삼재님이요? 죽어요? 진짜에요?”

 

  선우명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홍란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선우명의 충격에 호응해주었다.

 

  “진짜라니까요. 선우명씨도 황당하죠?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는 건지. 그 김삼재 할아버지가 선우명씨, 장우진, 그리고 나, 전혀 상관없는 세 사람을 이상하게 섞어놓고는 혼자 맘 편히 돌아가신 거라니까요.”

 

  잔뜩 흥분한 선우명와 홍란을 내버려 두고 홍단은 혼자 추리를 해나갔다. 물론, 아애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흐음, 신기(神氣)가 있는 노인이 죽기 전날에 홍란이 장우진을 클럽에서 만나는 걸 봤다는 거잖아? 일종의 예지 능력인건데. 멍아, 그 노인이 정확하게 뭐라고 말했다고.”

 

  “네? 그냥, 장우진을 찾아달라고요. 주소를 알려 줄 테니 꼭 26일 밤에 그 장소에 가서 홍란 여사님을 만나라고 신신당부했어요. 그 장소란 게 막상 도착해보니 클럽 [RED]여서 저도 황당했었어요. 그리고 홍란 여사님을 만나면, 여사님이 그 장우진에 대해서 알려줄 거라고도 하셨어요.”

 

  노인이 했던 표현 그대로, ‘홍란 여사님’이라고 표현하면서 선우명은 계속 홍란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하지만 의외로 지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들어보니 완전 수수께끼 같네요. 설마, 그 할아버지가 오늘 새벽의 그 난리를 예지한 걸까요?”

 

  “글쎄.”

 

  “아니, 따지고 보면 그 김삼재 할아버지가 선우명씨를 우리 클럽으로 보내지만 않았으면, 그 난리법석을 치르지 않았을 거잖아요? 선우명씨가 저·····, 저분이랑 들어오면서 우리 결계 다 찢어놓은 거잖아요? 그래서 그 잡귀들도 들어온 거고. 정전도 난 거고. 뭐야? 그럼 그 영감쟁이, 날 망하게 하려고 보낸 거야?”

 

  “아, 결계 찢은 거 이 쪽 아니래.”

 

  “아니에요?”

 

  홍란이 황당한 표정으로 홍단을 바라보았다. 홍단은 고개를 살짝 끄떡여 긍정의 표시를 해주었다. 선우명이 급하게 덧붙였다.

 

  “아니, 그게, 레드님,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결계는 부서져 있었어요. 진짜에요.”

 

  “즉, 아애네가 오기 전에 이미 다른 침입자가 있었다는 거지.”

 

  “아애 말로는, 다른····요괴는 없었대요. 자기 말고는!”

 

  홍단이 아까 자기 정체를 밝히지 말라는 말을 기억하며 선우명이 말했다.

 

  “자기는 결계에 상관없는 사람이면서 일부러 결계를 깼다는 건, 벌레 괴물이든 악귀들이든 클럽 내에 들어와서 일단은 난리가 나길 바랐던 거겠지?”

 

  “그렇담, 역시 홍탁이를 노리고요?”

 

  “뭐, 가능성이 높지?”

 

  “그렇담, 그 할아버지가 선우명씨를 저에게 보내서 저랑 홍탁이를 구해주려는 거였을까요? 선우명씨 덕분에 위기를 뭐, 어느 정도 넘길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유독 ‘어느 정도’를 강조를 하며 홍란이 외쳤다.

 

  “글쎄다. 꼭 그렇지도 않은 게, 나 혼자서라도 그 괴물들이나 잡귀들을 상대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금방 해치우고, 바로 니 옆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깔깔갈깔깔. 그럼 그 인간이 대단한 놈인가 보네. 니가 없는 아주 잠시만의 틈만 있다면, 그 둥뚱한 돼지 닭 정도야 잽싸게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크큭.”

 

  처음으로 아애가 끼어들었지만, 홍단은 무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딴 데 눈을 돌릴, 그 짧은 시간을 벌기 위해 결계를 깨고 벌레 괴물을 몰고 왔다? 그건,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 망할 자식이 날 너무 우습게 본건데? 난 절대로 홍란이랑 홍탁이를 죽게 냅두진 않았을 테니까.”

 

  “어쩌면요······.”

 

  한동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던 선우명이 입을 열었다. 나머지 세 명은 동시에 선우명 쪽을 바라보았다.

 

  “어쩌면요. 김삼재님은 장우진을 살리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뭐?”

 

  “분명히, 홍단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레드님이나 홍탁이는 구할 수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요? 구하실 거에요?”

 

  “글쎄다. 굳이?”

 

  “나랑 아애가 없었을 그 시간, 그 장소에, 괴물들이 나타나요. 사람들은 난리법석을 떨 테고, 그러다 어쩌면 다칠 수도, 죽을 수도 있었겠죠. 홍란님과 홍탁은 어떻게든 무사하겠지만요. 어쩌면 그 때 장우진이 죽었을 수도 있는 거였다면요?”

 

  “헉! 그렇담, 장우진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나한테 마지막으로 말을 걸고 나선, 그 직후에 괴물들에게 습격을 받아 그대로 죽었을 수도 있었다고요? 내 클럽에서?”

 

  “하아, 뭐, 솔직히 저도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요. 저야말로 진짜 궁금해요. 김삼재 할아버님이 왜 저를 이렇게 레드오어키드님에게 보낸 건지. 정말로 뭔가를 보신 건지, 아니면 의도하신 건지.”

 

  잠시간 네 명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선우명은 그토록 눈치 없는 아애마저도 분위기를 읽었다는 사실에 속으로 몰래 놀라고 있었다.

 

  “뭐, 진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신기 충만했다던 점쟁이 노인이, 자기가 죽는 날 너에게 꼭 찾으라고 부탁한, 그 장우진 이라는 사람이 엄청 궁금해지기는 하네.”

 

  홍단의 말에 선우명도 홍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뭐 어쨌든, 어제 우리 클럽에서 죽어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어딘가에 살아있겠죠?”

 

  “깔깔깔깔, 찾든 말든, 명이 너 돈 다시 돌려줄 필요가 없어져서 좋겠다. 킄큭크크큭.”

 

  “하아, 미친. 그게 말이냐, 빵구냐? 나한테 일을 맡기신 분이 돌아가셨다는데, 그것도 나랑 통화하고 나서 몇 시간 뒤에 그러셨다는데, 내 맘이 편할 것 같냐? 좋겠냐고, 내가? 여튼,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장우진 이라는 남자, 내가 꼭 찾을 거라고.”

 

 *

 

  남자는 막 샤워를 끝냈는지 젖은 머리카락과 알몸에 맺힌 굵은 물방울들을 그대로 방치한 채, 차가운 창문 유리에 밀착하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상공 600미터 높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정말 좋았다. 비록 투명한 유리를 통해 보는 것이어도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뛰어 내려 온몸으로 추락의 쾌감을 느끼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남자는 가볍게 혀를 차며 짜릿한 쾌락을 포기해야만 했다.

  저 아래로 징그러울 정도로 깨알 같은 빌딩 숲이 눈을 아프게 한다. 그나마 시원한 한강을 바라보는 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올림픽 대교, 한강 대교 등등의 한강 다리들, 석촌 호수와 놀이공원이 오밀조밀 귀엽게 느껴졌다.

 

  남자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올해 6월 초에 개장한 아시아 최고층 건물인 레테타워의 호텔 ‘오블리비안’이다. 이곳에 머물 때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도 걱정하지도 말 것이며, 오직 편하고 아늑하게만 지내라는 의미로 ‘망각’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OBLIVION'을 호텔명으로 한 것이라고 했다.

 

  값비싼 값을 제대로 하는 호텔의 전망과 디자인, 음식, 그리고 갖가지 용품들 모두 남자의 마음에 들긴 했다. 단 한 가지, 정작 호텔이 입점한 위치가 상당히 거슬리긴 했지만 말이다.

  레테타워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곳에, 그 옛날 신에게 용감하게 반항하던 바벨탑처럼 당당히 솟아있었다.

 

  “뭐, 어리석은 인간들이 하는 일이란 게 원래 다 그런 거겠죠?”

 

  “네? 저한테 무슨 말씀이라도?”

 

  알몸의 남자가 혼잣말을 하자, 그가 얼른 옷을 챙겨 입기를 바라며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남자가 얼결에 대답을 해 버렸다. 그제야 창밖을 보던 남자가 소파에 앉아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던 나이 지긋한 남자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 미안합니다. 경치가 너무 보기 좋아서 제가 정신을 좀 놓았나 봅니다. 역시 여기에선 그 이름대로 저절로 망각을 하게 되네요. 죄송합니다, 진회장님.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편하실 대로 하세요.”

 

  남자는 느긋하게 룸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젖은 몸을 타월로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속옷과 정장 바지와 하얀 와이셔츠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선 초조해 하는 진회장이라는 남자의 마음을 모르는 척, 천천히 여유를 부리며 로션과 크림까지 발라댔다.

  진회장이 불안해하면 할수록, 남자는 더 유리했다.

 

  마침내 몸단장을 끝낸 남자가 진회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신의 초조한 마음을 숨기려는 듯, 진 회장은 흰색 와이셔츠 남자의 안부부터 먼저 물었다.

 

  “호텔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네,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진회장님 덕분에 당분간 이 곳에서 편하게 지내게 됐으니, 제가 더 감사드려야 하겠네요.”

 

  “별말씀을요. 참, 어젯밤에 나가신 일을 잘, 되셨고요?”

 

  “아, 아니요. 일이 제대로 잘 진행되지는 못했습니다만, ……대신에 재밌는 구경거리를 실컷 보고 와서요. 그래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외출이었습니다.”

 

  남자는 클럽 [RED]에서의 일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생각 외로 더 많은 걸 보고 온 날이었다.

 

  어젯밤, 새로이 천계의 관리자가 된 그 빨간 머리 여자가 클럽[RED]에 간다는 걸 알아낸 건, 우연이었다.

  여자의 주변에는 클럽 소유주의 딸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자랑해대는 철딱서니 없고, 입 가벼운 사람들이 차고 넘쳤고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이 호텔 라운지에서 떠들었을 뿐이다.

  또 여자의 위치를 알게 된 즉시, 천계를 잡으러 가기로 결정 한 데엔 아무런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지겹도록 내리던 장맛비가 마침내 그쳤고, 그래서 간만에 밤 외출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여자가 주로 간다는 클럽이나 술집 대부분에는, 귀신이나 괴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결계가 쳐져 있다는 것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사 풍이 쳐놓은 게 분명한, 풍 특유의 투박하면서도 강력한 그 결계를 파쇄(破碎)하는 건 남자에겐 오히려 즐거움이었다.

 

  결계를 부수고 나선, 괴물들도 꾀어낼 준비를 했다. 자신의 피는 좋은 미끼였다. 클럽의 옥상에 자신의 피를 발라놓은 인형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변형시켜놓았으니 냄새를 맡은 녀석들이 금세 몰려들 거였다.

 

  분명 거의 100년 만에 다시 나타난 천계를 보호하기 위해 풍은 그쪽의 초고수를 여자에게 붙여 주었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자신이 모아 온 괴물들은 그 고수의 시선을 끌기엔 충분할 것이었다. 괴물들이 난동을 부리는 사이에 천계를 잡아내는 건, 남자에겐 정말로 ‘식은 죽 먹기’처럼 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니었다.

  여자와 천계를 지키는 것은 술법을 부릴 줄 아는 인간 남자 하나뿐만이 아니라, 거의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던 ‘신’급의 능력을 가진 정괴가 둘이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정괴들이 본체를 드러내고 남자가 불러 모은 괴물들을 물어뜯기 전까지는, 정괴들이 그 클럽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다는 것조차도, 남자는 알 수 없었다.

  남자는 궁금했다. 정말로 여자와 천계를 지키기 위해서 정괴가 둘이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날 그 곳에 특별한 다른 이유가 있어 나왔던 것인지 말이다.

 

  “뭐, 일종의 작전 상 후퇴를 하고 왔죠. 기회야 언제나 다시 생길 테니까요.”

 

  “하하하. 무진님이 하시는 일이야, 결국은 다 잘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입니다, 무진님. 이번에 저희 그룹 계열사 하나가 또다시 특검의 눈에 걸린 모양인데요, 이걸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복형제라도 동생은 동생이니 확 짤라 버릴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래서요, ……….”

 

  진회장의 넋두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남자, 무진은 이젠 언령조형술을 부릴 줄 아는 청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청년은 어떠한 매개체를 사용하지 않고서 오로지 ‘언령’ 그 자체로 화火와 목木을 불러낼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서유기의 손오공도 분신을 만들어 낼 때 자신의 털을 매개체로 만들어 내듯이, 보통은 주술자의 정기가 담긴 피나 머리카락을 이용하기 마련이었다.

  아무 매개체 없이 오로지 자신의 정기(精氣)를 변형시켜 형체가 있는 유형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그런 어린 주술자가 쉽게 할 수 없는 경지였다.

 

  ‘흐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수련을 한 자인가? 풍의 제자 중에 그 정도의 주술자가 있었나?’

 

  하지만 무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미 언령술의 최고 경지에 다다랐다고 칭송되어지는 우운 선자였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제자를 받아들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무진님?”

 

  이제 거의 애걸복걸을 하고 있는 나이 지긋한 남자의 얼굴을 보며 무진은 사람 좋은 밝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물론, 진회장님, 모든 일에는 다 대응방법이 있는 법이랍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것을 욕심을 낸다. 두려운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두려움의 크기는 더욱 더 커지듯이 말이다. 진 회장처럼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또 두려운 것이 많은 사람을 다루는 것은, 무진에겐 정말로 쉬운 일이었다.

 

  무진이 몇 가지 대응책을 일러주고 또 다정한 말로 위로를 해주고 나서야, 진회장은 가뿐한 마음으로 무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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