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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록
작가 : 강지인
작품등록일 : 201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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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무녀와 막내딸 그리고 손자
작성일 : 17-11-16     조회 : 286     추천 : 0     분량 : 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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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로 식솔을 모두 잃은 무녀는 하나남은 막내딸을 애지중지 키웠는데,

 막내딸만큼은 자신처럼 흉화한 삶을 살지않게 하기 위하여 지리산의 도사며, 통도사의 스님이며, 종로의 신부며, 신사동의 목사며 가릴 것 없이 영특하기로 소문난 자는 죄다 찾아뵈며 어린 막내딸을 등에 업고 반 년동안 답을 찾다가 결국 한 귀인을 만나 한 숟가락에 찰랑말랑한 요약을 손에 넣었다.

 어릴 때부터 큰 감기알약이며 회충제는 넙쭉넙쭉 곧 잘 받아먹던 막내딸이 단향이 풍겨나오는 몇 방울 정도의 요약은 당최 입에 넣으려 하지않아 왠종일 씨름하듯 들들 볶고 싸워 이겨낸 끝에 막내딸의 입에 요약을 밀어넣었다.

 그제서야, 밤이면 동네 온갖 잡귀와 말동무하며 중얼중얼대던 잠버릇이, 낮이면 불타없어진 옛 궁궐을 보고, 하늘에 뜬 달과 해님의 이야기를 훔쳐들었다며 쪼르르 달려와 흥얼대던 어린 것이,

 드디어, 온 우주 속 고요에 홀로 갇힌 듯, 깊은 침묵 가득한 눈동자를 좌우로 살피더니 그대로 고꾸라져 잠이 들길 나흘,

 혹여 막내딸에게 문제가 생긴건지, 서울 시내 용하다는 한의사며 양의사에게 아이를 업고 미친년처럼 달려들어가 아이고선생님선생님우리아이좀 봐주시라요 물어대도, 의사들은 아이의 호흡을 보고, 맥박을 재고, 혈색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도통 병을 알 수가 없어, 잠든 것 같다 라는 답만 얻다가. 서울대학병원에서 꼬박 이틀 밤을 샌 새벽녘에 막내딸이 겨우 눈을 떠 첫 말 한다는게

 엄마 여어디오, 하니, 무녀는 막내딸을 부여안고 해가 뜰 때까지 울기에 같은 병실의 환자들은 짜증 속에 잠을 깨었다가

 어이구 무녀님 딸 살아났습니까 하며 덩달아 웃어주었다.

 그렇게 한해 두해, 무녀는 어린 딸에게 혹여 부정이라도 탈까. 무녀 업을 벗어던지고,

 한 날은 이쪽, 또 한 날은 저쪽에서 식당일, 식모일, 어느 때는 공사장에서 벽돌도 이고 지고 서울의 허드렛일이란 허드렛일은 죄다 하며

 금이야 옥이야 딸을 키우니, 식사 때에는 귀신같이, 아니 귀신이니까, 찾아오던 종주신이

 어찌그러느냐 어찌 업을 벗느냐 두렵지 않은게냐.

 겁도 주고 박도 하고 애걸도 할량이면

 무녀는 눈을 부라리다가 주위에 사람이 없다 싶으니

 게 어딨었소 지아비 죽어나갈때 무어하시다가

 우리엄니 아버지 고꾸라지실때

 우리장남 우리 장녀 죽어 송장되어나갈땐

 무어하다가 이지와서는 게 그 잘난 낯짝 들이밀고

 신입네하고 재는게요 내 이제 무설 것 없소

 내 이제 신령님 하나도 겁 안나오 저리 꺼지시오

 저리가시오 마지막 굿으로 신령님 모가지에 신령님 작두 들이밀까봐 두렵소 그래야 속이 후련하시겠소

 하니, 신도 화내다가 울그락 불그락,

 소리도 지르고 화를 내려다가 침울해하면서

 인신이 천신 곡행에 무어어찌하느뇨

 하며 사라지더라.

 그 고집이며 억새기가 보통남자 네다섯이 덤벼도 재간이 없을 정도니, 무녀가 막내딸을 잘 키워낸 건 두말해서 무어할까.

 건실한 집안에서도 왠만해서는 보내기 어려운 명문대며, 해외대학원이며 거칠게 없이 단아하고 곱게 자란 막내딸이 어느새 혼기가 꽉 차 시집 갈 나이가 되자, 중매서겠다고 줄을 선 뚜쟁이들이 일렬이요, 막내딸의 요염한 미모에 반해 줄을 선 남정네들이 일렬이라. 이 두 행렬이 무녀 집 대문 한 쪽씩 꿰차고 척 달라붙어 문간을 부지런히도 드나드니 대문이며 행랑채며 문지방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더라.

 사주도 재보고, 궁합도 보고, 관상도 보고, 집안에 우환은 없는지, 본가 풍수는 또 어떠한지 요목조목 살피어 사윗감 하나를 봐 어느날 어느시 어느곳에서 집안 식구끼리 상견레나 봅시다 해 인상 좋은 부모며 형제며 죄다 모여 단촐히 둘만 온 무녀와 막내딸을 빙 둘러싸고 하하호호 즐거이 식사들 하다가, 식사 막바지쯤 밖에서 종업원이

 손님이 한분 더 오셨는데요.

 라고 문을 여니까, 덩치는 산 같고 인상은 선비같은 청년 하나가 들어오니 상견레를 보던 사윗감 쪽 식구들은 객식구 대하듯 분위기가 차가워져 "사촌동생입니다." 급히 소개하고는 시선도 주지않았다. 사촌동생은 제집 안방인냥 뒤에서 반치나 드러누워 후식으로 나온 떡을 한 점 씩 손으로 집어먹고, 양가 식구끼리의 대화는 무르익어 "그래서 게 어느 집안 어느파 누구씨요" 라 질문이 오가더니 홀어미께선 젊을 적 무얼하였소 질문에 무녀가 우물쭈물대며 별 대답을 못하자 막내딸이 턱을 치켜 들고 하는 말이 "무녀셨소".

 사윗감 식구들은 안색이 희게 변하고, 온화하던 어른들도 표정이 어두워져 무녀는 '아 내 젊을 적 업이 내 딸 혼삿길을 막는구나.' 싶었다. 성을 내는 어른도 있고 허탈해 허허 웃는 어른도 있고, 너나할것없이 엉덩이를 들어 식당을 나서니, 그 큰 상 앞에 무녀와 막내딸만 덩그러니 앉아 휭한 공기를 마시며,

 무녀는 살아온 세월이 억울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막내딸은 과연 굳센 피를 이어받은 지라 무녀의 늙은 손을 두 손 가득 꽉 잡고 싱글싱글 웃으며

 " 어머니, 어디 괜찮은 남자가 저 이 뿐이겠어요? 괘념치 말으시고 일어납시다. 맛있는 식사하시고 청승맞게 왠 눈물이셔요."

 손수건으로 손수 눈가의 눈물마저 닦아주다가 저도 서러웠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울먹거리려 할 때에

 " 거 그럼, 나랑 합시다. 결혼."

 맞은 편에 드러누워, 모녀의 신파극을 조용히 지켜보던 그 사촌동생이다.

 히죽 대는 표정에도, 종주신을 잃어 영력 떨어진 무녀지만, 알 수 있었다.

 저 남자 범상치 않다. 저 집안에 보인 흥한 기운이, 어미 손에 끌려가듯 쫓혀나간 사윗감 것이 아니라, 응당 저 사내의 것이로구나.

 울음을 뚝 그치고.

 " 그러시오! 내 딸 잘 부탁하오!"

 한마디 우렁차게 내뿜고 막내딸을 둔 채 홀로 벌떡 일어나 집으로 가버렸다.

 딸은 어리둥절하여 미처 무녀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가 늦게 집으로 갔는데,

 집 앞 대문이 잠기어

 " 내 너를 그 이에게 맡겼으니, 다신 이 집에 발 붙일 생각일랑 말거라. 문 앞에 종이와 펜을 두었으니, 그 이의 주소를 써두면 네 옷가지와 짐은 보낼테니 인사도 말고 떠나거라."

 하길래, 막내딸은 그 어미의 단호함을 알기에 대문 앞에 대고 크게 절 한 뒤에 떠났다.

 그렇게 갑작스레 결혼한지도 수 해, 이후로 친가를 찾아도 무녀는 어딜간건지 멀리가오. 이웃집에 편지 한 통만 남기고 종적을 감추기에 막내딸이 그 편지를 읽으니,

 ' 내 종주신께 부정한 일이 많아 사죄하러간다. 지키진 못하여도 종주신이 내 삶이며 우리 가문이며 많은 은혜를 주셨는데, 내 옹졸한 마음과 인간사의 좁은 식견으로 큰 무례를 끼쳤는데도 해코지 한 번 없이 재물이며 운수며 이제는 귀한 사윗감까지 주어 내 남은 삶은 종주신께 공양하다 갈테니, 너는 네 어미가 죽은 줄 알고, 그리 지내라. 혹여 후사를 얻으면, 아들놈 이름은 비록이라 짓고, 딸년 이름은 차라리다.' 라 쓰여있어,

 이 막내딸이 마흔즈음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 신 비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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