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도 문득 들은 기억이 있다.
미소엔터의 주식을 사재기한 왠 미친놈이 있는데 할아버지에다가 중국재벌이라고, 변태라서 조심해야한다고. 이리저리 부풀어진 이야기겠거니 싶어서 무시하고 넘겼는데, 더 최악의 상황이다.
며칠 전의 만남은 뭐였을까. 우연을 가장한 사전조사같은거였나. 아니면 진짜 변태스토커인걸수도.
윤 상무는 여배우의 등장에 화색이 돌았다.
회의 내내 강은로의 반응은 시원찮았고, 게다가 최 이사는 기절, 주변은 어수선해, 미소엔터 경영진이 이같은 위기를 또 겪을까.
그 때 등장해준 이 여인은 그야말로 구원의 여신이였다.
최 이사는 정문으로 들어선 여배우에게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달려가 손목을 붙잡고 강은로 앞으로 이끌었다.
중국재벌2세건 일본재벌3세건 미소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연예인도 모르고 50.01%나 되는 주식을 샀을 리 없다.
아니면, 이 여배우가 목적이려나.
뭐가 되었건 윤상무는 화제전환을 위해 여배우를 강은로 코 앞까지 세워놓았다.
최이사가 실려가고, 옆에 앉아있었다는 책임감때문일까, 업혀가는 최이사의 엉덩이에 시선을 꽂은 채로 걱정하는 척하며 은로는 로비 중간까지 걸어나왔다.
검은 정장의 아저씨들은 '최 이사가 원래 몸이 약하다. 허하다. 종종 있는 일이다. 심려하지않아도 된다.' 며 강은로를 빙 둘러싸고 안심시켰지만, 은로는 이 귀찮은 상황에서 정작 신경쓰이는 건 바로 앞에서 떠들어 대는 임원의 앞니 사이에 끼인 과일껍질이다.
검은색 과일껍질인데, 꽤나 큰데도 불구하고 인식하지 못하는게 더 놀랍다.
119 구급차량이 필요이상으로 요란하게 사이렌까지 윙윙울리며 주차장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연회장에 들어가 음료수나 마시려는데,
눈에 익숙한 벤 차량이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두번봐도 놀라운 큰 덩치의 단발머리 여성이 내리더니 차를 빙 돌아 중간문 쪽으로 향한다.
문이 열리자, 아, 그녀다. 백만송.
백만송은 붉고 노란 체크 치마를 입고 있었다.
노란 스웨터는 개나리꽃을 입은 듯 따듯해보였다.
마치 동네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난 듯 기자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정문으로 들어서는 모습에 보통 남자라면 시선이 꽂혀 바보처럼 보였을테다. 은로는 그런 실수는 하지않고 짐짓 모르는 척하며 임원의 앞니에 끼인 과일껍질에 더욱 집중한다.
키가 작고 안경을 쓴 아저씨 하나가 뛰어가더니 백만송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는 은로의 앞까지 데려온다.
서로를 서로가 알지만 서로 서로의 과거는 말하지 않기로 합의된 분위기.
백만송은 은로에게 가벼운 미소를 건낸다.
은로도 이런 유명인을 만나 영광이라며 인사하지만, 고개는 숙이지않는다.
백만송이 주변의 경영진들과 반갑게 인사하기 전까지 몇초동안 눈을 마주치며 강은로는 결국 깨닫고 말았다.
이건 최악의 상황이다.
밍크고래보다도, 솔개보다도,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보다도 더 최악의 상대로 바람의 신이 현신한 것이다.
은로는 여배우에게 반해버렸다.
은로는 추스릴 수 없다.
인간적인 약점, 그래 이 표현이 좋겠다.
꽃은 언제부터 꽃일까.
줄기가, 이파리가,
초록빛으로 돋아난 꽃망울이,
붉고 노란색을 덧씌우기 전,
초록잎의 돌연변이로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순간?
기껏 색을 띄우고 둥글게 꽃잎을 펼치는 순간?
도대체 언제가 꽃의 시작이란 말이냐.
위대한 시인이 말하지 않았나.
꽃은 꽃이라 불리는 순간, 비로소 꽃이 된다고.
은로는, 뭐, 그 유치한 두뇌로 논리정연한 과정을 거쳐 이론을 정립해 꽃으로 비유된 사랑을 이해한건 아니다.
은로는 본능적으로, 감성과 정욕을 달고 태어난 짐승의 마음으로 느끼고 만 것이다.
은로는 도망치려한다.
그 꽃을, 스스로 꽃이라고 인정하는 순간이 다가올까봐.
은로는, 오래된 늙은이의 피처럼 진득하고 탁할거라 믿어온 자신의 피가, 온몸의 혈류가, 쿵쾅대는 심장고동소리를 숨기기위해 스스로 소란 속으로 뛰어든다.
성인답지 못했고, 미래지향적이지 못했고, 어린애 같고, 금방 후회하겠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업보에서 도망치려는 그 옛날의 작은 무녀처럼 은로는 허둥대며, 변명같지도 않은 변명을 아기 옹알이하듯 중얼거리고는 쳐다 보는 것조차 싫던 빌딩의 정문으로 나선다.
엘리뇨냐 기상이변이냐, 따스할 것 같던 밝은 날씨에 비해 공기는 차가웠다.
새삼 이 날씨에 이렇게 몰려와 준 취재진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은로는 지하주차장에 둔 자신의 자가용도 잊고 정문을 지나 지상주차장을 가로질러 아무 대로변까지 걸어갈 생각이다.
은로의 이동경로는 이 세상 모든 흐름에 역행하듯 비정상적이고 알 수 없는 행위였다.
기자들은 머릿속으로 아무런 이해가 되지않아, 레드카펫을 역주행하는 검은 옷의 청년을 질문 하나 던지지않고 통과시켜주었다.
카메라맨들은 직업병적인 습관으로 셔터를 눌러댔다.
여배우와 임원진도 유리문 건너편에서 은로의 뒷모습만 지켜볼 뿐 따라가지도, 제지하지도, 손을 흔들며 인사하지도 못했다.
얼핏 "사골냄비를 끓이다가 그냥 나왔네요." 라는 마지막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사교계의 여왕인 여배우조차, 아직 그 말이 인삿말인지 농담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중이다.
벙쪄버린 모두를 뒤로하고 은로는 대로변 가로수를 지나 사라져 버린다.
택시? 버스? 지하철?
아마 택시 일 듯하다.
은로는 버스노선을 외우지도 못하고, 지하철 교통카드도 없다.
은로는 술이라도 취한듯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기억이 없다.
이럴 땐 정말 빛의 신이 필요하다. 그가 옳을지도.
은로는 정원 벤치에 앉아있다.
봄의 슬리퍼때문에 급작히 자랐던 식물들이 초봄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의 잎과 가느다란 줄기를 떨궜다.
정원은 엉망진창이다.
드문드문 추위에 견디어낸 식물이 푸르게 자라있지만, 그 모습이 정원 나머지를 더 처량히 보이게끔 한다.
은로는 발치에 놓인 낙엽을 밝는다.
니야옹, 고양이 소리가 들린다.
"금동아?"
은로는 화색이 되어 지붕 위를 쳐다본다.
아무도 없다.
"금동아, 금동아."
금동이는 거대하고 노란 고양이다.
은로의 집이 도심 속의 정원이다보니 예전에는 은로의 집이 길고양이의 아지트였는데, 금동이가 모습을 나타낸 이후부터 길고양이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고양이소리에 밤잠을 설쳐대던 은로에게는 은혜로운 존재다.
막연히 뿔과 굽의 신이 보낸 선물일거라 예상하지만, 확실하진않다.
은로는 금동이가 나타날 때면, 신을 모시던 재능을 한 껏 발휘해 금동이에게 먹을 걸 대접하거나 햇살 좋은 곳에 푹신한 방석을 놓아둔다.
은로가 아무리 불러도 금동이는 덤불 속에서 노란 빛깔의 털만 비출 뿐, 나오진 않는다.
"금."
즐겁게 금동이를 불러대던 은로는 입에서 새어나오는 금동이의 이름을 도로 집어넣는다.
자신의 모습이 애처롭게도, 사랑을 갈구하는 사춘기 소녀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은로는 심통난 듯 덤불 속에서 뒤적이던 몸을 곧게 세우고 뒤로 돌아 힘차게 걸어가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늦은 밤, 여배우는 침대위를 뒹군다.
창립기념회에서는 자신이 능수능란했다고 생각된다.
임원 중 하나는 쓰려져 입원했고, 과반수주주놈은 줄행랑을 쳤다.
회사는 파산위기를 겨우 넘겼고, 창립기념회 분위기는 밝은 음악이 켜진 장례식장과 진배없었다.
그렇다고 여배우가 무대 위를 뛰쳐올라가 열정적으로 춤을 추며 신들린 디제잉으로 분위기를 한 껏 달군 건 아니다.
여배우는 연회장으로 들어섰고 가벼운 인터뷰를 했으며 그저 마이크에 대고,
"한두명 정도 쓰러지고 도망쳐줘야 진짜 파티죠?" 라고 답했다.
이 대답과 연회장을 가득 채운 폭소, 신나는 음악, 좀처럼 모이기 힘든 유명인들, 최이사와 과반수주주는 잊혀지고 떠들썩한 연회가 이어졌다.
창립기념회 파티는 인터넷 방송으로 생중게되어 동시시청자수가 수십만을 넘겼으니, 왠만한 주말드라마보다 흥했다.
센스넘쳤고, 예뻤고, 오늘도 팬클럽가입자는 또 수 만명, 그런데도 찜찜함이 가시질 않는다.
인생에 미친놈이 차고 넘친다.
벚꽃스토커, 그 미친놈하나 더한다해도 여배우생애의 색채는 전혀 변함이 없다.
유명하다는 것,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억단위로 존재한다는 것.
그 중 1%만이 미친놈이라면 수백만 단위다.
그 수백만명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지구위를 쉼없이 굴러다니며 자신 주위를 지나칠 적마다 미친 짓을 한다해도 매일 쉼없이 미친 짓을 보게되고 역사적으로 미친놈의 비율은 항상 1%보다 컸음으로 여배우의 삶에서 피로도라는 건 시커먼 유리창 코팅이나 두꺼운 블라인드따위로 차단될 만큼 간단한게 아니다.
여배우는 머릿 속으로 은로의 이미지를 되새길 적마다 지긋지긋한 두통이 인다.
경험적으로 학습된 꽤미친놈에 대한 반사작용이다.
이번 미친놈은 극복가능할 것인가. 여배우는 미소엔터와의 남은 계약기간을 셈해본다.
제기랄, 일곱계절, 그리 길지않다면 길지않지만, 그 미친놈이 자신의 꽃같은 20대의 마지막을 송두리째 쥐고있다, 는 생각에 도달한다.
여배우는 몸을 굴려 침대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올려진 스마트폰 쪽으로 몸을 옮긴다.
"애인이랑 통화할래."
"애인이님과 전화연결중입니다."
스마트폰의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끝맺고 미처 통화연결음이 들려오기도 전에 수신자가 전화를 받는다.
"네, 언니, 안주무셨어요?"
걸걸한 목소리, 은로에게 인생의 조언을 건내주던 단발머리 매니저다.
"어 잠안와 안와"
"저도 안오네요 언니, 그래도 내일 오전에 분당. 알죠?"
"알지알지, 애인아 너 그 인간"
"강은로 주주님이요?"
"주주님? 호칭이 변했다너"
"어쩝니까. 회사에 속한 몸, 근데 그 분은 왜요?"
"그 미친, 아니, 그 강씨한테 좀 보자고 해."
여배우는 엎드린 채로 스마트폰을 문질러댄다.
인터넷 뉴스 토픽, 최하위 순위에 '정체불명의 사나이, 미소엔..'를 누른다.
여배우와 미소엔터임원을 뒤로하고 도망치는 강은로의 사진이다.
이름도 생소한 신입연예부기자가 영화예고편 캡쳐라도 되는 듯 여러장의 스틸컷으로 인터넷기사를 써놨다.
마지막에는 아예 gif파일로 움짤을 만들어뒀다.
"왜요? 그분이 또? 연락이라도 왔어요? 그거 진짜 미친"
"아니아니 너 기사체크했어?"
"기사요?"
"통합연예기사 목록가서 마지막꺼봐봐."
"네..잠시만요.10위요? 신화컴백예고이거요?"
"어?"
여배우는 뭔가 싶어서 새로고침을 누른다.
아뿔싸, 기사가 지워졌다.
"아.. 칠층 일잘하네.."
"무슨 내용이였는데요 언니?"
"그 주주, 사진, 찍힌거, 나가리네. 어? 아니지, 칠층 책임자가 누구지?"
"최이사님이요. 오늘 실려간분.."
"퇴원했데?"
"글쎄요. 제가 한 번 물어볼께요."
"어어, 물어보고, 강은로, 쪼인, 처음한거"
"벚꽃나무? 여의도?"
"응, 그 이야기도 해, 뭐 어쩔건지 물어보고."
"네, 언니 주무세요. 자정넘었어요."
"너도 내 나이 되봐라, 잠이 안온다. 외로워서."
"대한민국 남자들 다 뒤집어질 말씀마시구요."
"나 진짜 확 결혼이나 할까."
"얼씨구, 좋구요. 저도 한가한 유부녀 매니저좀 해보구요."
"농담 아닌데."
"누구랑 하시려구요. 누굽니까. 연정훈 정지훈을 잇는 그 대한민국 남성들의 숙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