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별관, 조사실.
백열등 하나만이 좁은 조사실을 비춘다.
실내는 철제 책상과 철제의자 한 쌍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빈 의자 반대편, 청년이 홀로 앉아있다.
철제문이 열리며 특유의 쇳소리를 낸다.
형사가 터덜터덜 들어서며, 빈 의자에 앉는다.
"많이 기다렸죠.."
상대방을 걱정하며 던지는 질문인지, 피곤한 자기자신에게 던지는 위로의 말인지.
우중충한 인삿말에도 청년은 가볍게 미소를 짓는다.
"아뇨, 괜찮습니다."
형사는 들은건지 만건지, 답변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시선은 손에 든 신원확인서류를 넘기며 건성이다.
"햇볕보고 이야기하면 좋은데, 사안이 사안인지라.. 어차피 참고조사차 소환되신거니, 별걱정마시고."
형사는 청년의 눈은 쳐다보지도않는다.
서류와 인주를 내밀며 지장을 찍으라는 듯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청년은 노란 전구 불빛에 서류를 비추어 보며 차근차근 읽어간다.
뭘, 또 하나하나 읽고 있나, 새끼. 형사는 귀찮은 티를 팍팍내며 손톱으로 솝톱을 튕긴다.
콘크리트로 된 밀실은 형사의 손 끝에서 튕겨나오는 소음으로 채워진다.
청년은 내용을 다 확인하고서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지장을 찍어 서류에 찍는다.
그제서야 형사는 손버릇을 멈추고 낚아채듯 서류를 받아 낸 뒤, 벌떡 일어나 벌컥 문을 열고 나선다.
"저기.."
"네?"
형사는 짜증섞인 대답을 한다.
"물티슈좀.."
"아,네네."
청년은 붉은 인주로 물든 엄지손가락을 재롱부리듯 흔든다.
형사는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공허한 대답만 남긴채 밀실을 떠난다.
청년은 저 형사가 물티슈를 가져다주지않을 것임을 직감한다.
다시 청년 홀로 남겨진 방 안,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청년은 입술을 굳게 닫는다.
환청이 아닌 실제 웃음소리가 밀실에 울려퍼진다.
이 퀘퀘한 방 안에 스피커나 기타 음향기기는 없다.
청년은 지긋이 눈을 감고 그 비웃음을 듣는다.
"크흡, 흐흐.. 물티슈..."
사다리꼴로 내려쬐는 백열등 빛 속으로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노인은 쥐어짜내는 듯한 웃음을 내뱉으며, 철제책상 위에 드러누워 청년을 올려다본다.
"왜 올 때 짜장면이랑 탕수육은 안 시키고?"
노인의 외향은 고급정장을 차려입고 단정하게 뒤로 넘긴 흰머리와 다르게, 수염은 덥수룩히 자라있다.
노인의 가느다란 체구를 타고 밑으로 쭉 내려가면, 맨발에 신긴 우레탄 소재의 싸구려 고무신이 보인다.
노인은 청년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우습다는 듯 놀려댄다.
"얼마나 멍청해야 그 정도 시키는 것도 못해서 여기까지 굴러들어와. 너 완전 찍힌거야. 어? 어이. 들려? 여기 녹음기 그런거 없다 대답해봐. 니가 한거 다 까발려지고 여기 들어왔
으면, 벌써 끝났지 게임. 인정? 응 인정?"
청년은 노인의 얇은 팔목을 휙 부여잡으며 눈을 뜬다.
"어쭈 이 말뼈다귀같은게, 치겠다? 아주 치겠어? 어?"
노인은 눈을 부라리며 청년의 이마팍을 손바닥으로 퍽소리가 나게 친다.
청년은 뒤로 넘어갈 정도로 갸우뚱했다가 겨우 의자를 바로 잡고 앉는다. 벌떡 일어나 노인을 내려다본다.
"아! 채제공!"
"뭐 임마?"
채제공도 씩씩거리며 일어난다.
어둠 속에서 건장한 남성 하나가 나와 채제공의 어깨를 부여잡는다.
"고만하이소 어르신. 마 야도 이라카고싶어가 이켔능교."
"저저, 하여간 어린놈의 새끼가."
"아, 뭐 내가! 뭐!"
청년은 버럭 질러댄 소리가 너무 컸다싶었는지 작은 목소리로 이어말한다.
"걸리고 싶어서 걸렸냐고.."
건장한 남성은 붉은 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을 뒤로 한 번 크게 쓸어넘기고 청년을 다독이며 의자에 다시 앉힌다.
"마, 함보니까네 니는 용의선상에 아예 없고 진짜 그냥 사실 확인차 부른갑드라. 그니까 이래저래 쉰소리말고 모름쇠하고 이따가 걍 가믄댄다. 알긋나."
"알겠어요."
"마, 사나이목소리가 와그르노. 크게 모타나?"
"아! 알았다고!"
"저..싹바가지없는!"
채제공은 고무신이 날아갈 정도로 크게 발길질을 하며 청년에게 달려들었지만, 붉은 단발머리의 남성이 우악스럽게 굵은 팔뚝으로 채제공을 번쩍 들어 떼어놓는다.
"놔봐, 곽장군, 놔보라니까. 저저저런놈은 좀 두들겨맞아야."
채제공과 곽장군이 몸실랑이를 벌이는동안, 또다른 신사 하나가 나타나 맞은 편 빈의자에 앉는다.
"그! 안선생도 그러는거 아냐. 말짱황 될 뻔 했다고!"
채제공은 비난의 화살을 신사에게로 돌린다.
안선생이라 불린 신사는 싱긋 웃는다.
"물을 채우다보면 넘치기 마련입니다. 과하게 흐른 물이라면 저절로 마르기 마련, 잔을 넘어뜨리지않는 선에서 마무리된걸 다행으로 여깁시다."
"안선생, 안선생, 그 성미를 누가 이겨먹나. 하여간 앞으로 직접나서는 이런 일. 난 무조건 반대요. 알겠소?"
"예,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네도 그만 기운 차리게."
안선생은 청년의 어깨를 다독이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곽장군도 웃으며 체재공을 들쳐업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다.
채제공은 끝까지 찡그린 얼굴로 못마땅한듯 청년을 노려보며 함께 사라진다.
"아...내인생! 인생! 좀! 아악!"
청년은 머리카락를 양손으로 헤집어 뒤섞으며 승질을 낸다.
벌컥 열리는 철제문, 형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와요. 끝났습니다. 집가셔도되요."
살짝 열린 철제문 사이로 종이티슈를 내민 형사의 손이 보인다.
청년은 형사가 물티슈를 가져다주지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밖은 어둠이 깔렸다.
청년은 손목시계를 본다.
회사 퇴근시간은 지나있다.
청년은 출입소에서 방문증내고 신분증을 돌려받는다.
빵-.
"빵대리님!"
자동차 경적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빵대리라는 소리에 청년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경찰서 맞은 편 도로에 누군가 테슬라차량에 기대어 서있다.
임재욱 사원이다.
빵대리는 손을 들어 인사한다.
빵대리는 무단횡단을 할까하다가 뒤에 서있는 경찰서를 깨닫는다. 도로를 빙둘러 횡단보도로 건너간다.
"재욱씨! 기다리셨어요?"
"아뇨 방금 대리님 데리러왔죠. 대리기삽니다. 빠대리닳으니까 빨리 타시죠 빵대리님 크 라임좋쿠요."
"아..네.."
빵대리는 테슬라의 운전석에 앉는다.
임사원은 조수석에 앉는다.
"미안해요.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에이 좋습니다. 사무실에 틀어박혀있는거보다 이 핑계대고 빨리 나와서. 바로 가실거죠?"
"아직 하고 계세요?"
"아 그럼요. 차장님이랑 부장님이랑 번갈아 전화와서. 어후. 아까도 전화왔어요 빨리 오라구."
"보자.. 치킨집이."
"네비에 찍어놨어요. 대리님 조사받는데 두 분은 신나셔서. 부하직원을 이렇게 팽쳐도 됩니까?"
"하하. 괜히 그러는거죠. 아무것도 아니였어요. 목격자같은거니까"
"빵대리님 걱정은 사장님만 하시고."
출발하려던 빵대리는 임사원을 쳐다본다.
"사장님이요? 우리 사장님이요?"
"네 빵대리님 빵대리로 만든 그 사장님이요."
"별 일이.. 출발합니다."
"네!"
빵대리는 액셀을 밟고 차를 운전하자, 그제서야 경찰조사가 끝난 걸 실감한다.
"아! 맞다.거기 사장님도 오셨다던데요."
"네?"
치킨집, 직장인들로 가득하다.
홀의 길다란 테이블에 번암방산직원들이 쭉 앉아있다.
치킨집 정문으로 빵대리와 임사원이 들어온다.
테이블 중앙에 자리잡은 부장에게 차장이 귓속말을 한다.
"부장님! 몸을 숨기시지요! 범죄자 왔습니다."
모양새는 귓속말이지만, 다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다.
"아 그게 정말인가? 아니 그럼 이거 자리를 옮겨야. 어! 빵대리! 이리오게!"
"부장님! 아니됩니다! 제가 말씀드린 범죄자가 저 빵대리입니다!"
"아니 자네! 그게 정말인가? 우리 성실하고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빵대리가 정말 범죄자라고?"
"그러믑죠 그러믑죠! 오늘 형사들한테 잡혀가는 꼴을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답니다!"
"회사에 경찰차가 들낙거린다더니, 그게 빵대리였다니! 이런 세상에나.."
부장과 차장의 익살에 테이블 전체에서 웃음꽃이 핀다.
빵대리는 차장 맞은 편 빈 자리에 앉는다.
"고만하십쇼. 부끄럽습니다."
"방금 들으셨습니까 부장님? 그..놈..목소리를.."
부장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차장의 등을 톡톡친다.
"김차장. 고만하지. 살아돌아왔으면 됐지 뭐. 거 여기 맥주 한 잔 더 시키지."
"사장님 여기 맥주 한 잔주세요. 어이, 빵대리. 그 자리 괜찮아?"
"네?"
빵대리는 등 뒤의 서늘한 기운을 느낀다.
부장과 차장이 빵대리 뒤 쪽을 향해 목례를 한다.
빵대리가 슬며시 뒤를 돌아본다.
"누군가했더니 대리님이셨네요."
채지수가 서있다.
"사,사장님."
"어이, 빵대리 비켜비켜 거기 사장님 자리셔."
빵대리는 일어나려 짐을 주섬주섬 챙긴다.
"아뇨 괜찮습니다. 가보려던 참이였거든요. 앉아계세요."
빵대리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한 어정쩡한 기마자세로 서있다.
채지수 뒤에 서있던 윤비서가 카드를 내민다.
차차장이 양손으로 공손히 받아든다.
"내일 회사에서 뵙시다. 다들 나오지마세요."
채지수는 어깨 위를 감싼 버버리코트를 나풀거리며 치킨집을 나간다.
모든 직원들은 전원 기립해서 지나가는 채지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부장과 차장은 뛰쳐나가다시피 따라간다.
"사장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안전운행!"
"오늘도 무척이나 아름다우십니다!"
가게 안에서도 들릴 정도로 부장과 차장의 아부성 인삿말은 우렁차다.
폭풍이 지나간듯 고요해진 치킨집. 다시 시끌벅적해진다.
부장과 차장이 어깨동무를 하고 치킨집으로 들어온다.
서로 채지수의 골드카드를 한 귀퉁이씩 잡고있다.
둘은 싱글벙글하다.
"얘들아~ 얘들아~ 먹자먹자~."
"부장님 되게 행복해보이십니다."
"넌 이게 행복한 얼굴로 보이니? 내 돈으로 직원들 닭 못먹여서 억울한 얼굴이 아니라?"
"어어, 여보, 오늘 저녁에 치킨어때 치킨."
빵대리는 그제서야 의자에 제대로 앉는다.
임사원이 의자를 들고와 빵대리 옆에 앉는다.
"보셨지않습니까 빵대리님, 사장님."
"봤지 봤네 잠깐."
"사장님 괜히 빵대리님 걱정해서 오신겁니다. 그러니까 빵대리님 얼굴보고 바로 가시잖아요."
"얜 또 소설쓴다."
"그건 재욱이 말이 맞지. 안그래?"
"맞습니다 부장님. 이거이거 아무리봐도 신데렐라로맨슨데요. 잘부탁해 빵대리."
"거 참.. 아니라니깐요."
"아니긴! 둘 아니 사장님이랑 너, 첫 만남부터 아주 드라마였잖어."
빵대리는 차장의 말에 쓰디 쓴 기억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