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년 전,
남성 사업가가 주류를 이루는 방위산업체 시장,
그 중 손 꼽히는 번암방산에 젊은 여성의 사장 취임소식이 들리자, 온 메스컴이 들썩였다.
보통은 비공개로 진행되는 사장 취임식도 언론에 대대적으로 공개하며 치루어졌다.
취임식은 단촐했지만, 채지수가 미모의 재원이였기에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행사성으로 진행된 직원들과 신임사장 간의 만찬자리.
취임식 의전 담당은 빵대리를 신임사장 옆 자리로 배치했다.
어린 나이에 급속 진급을 이뤄낸 고학력의 빵대리가 신임사장과 대칭되는 이미지를 주어 신임사장이 더 능력있어 보이게 하려는 심산이였다.
그 당시 빵대리는 딱히 좋은 컨디션이 아니였다.
인신들의 부탁이 날로 도를 넘어서 며칠 전 한바탕 했기 때문이다.
취임식 직전, 채제공이 위로하듯 나타났다.
"주왕이, 좀따 내 손녀딸본다지?"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빵대리는 컴퓨터 화면에 글을 써 답한다.
'네'
채제공은 허리를 구부리고 눈쌀을 찌푸리며 모니터 화면을 본다.
"응응 그치. 잘해줘 걔가 어릴때부터 고생이 많았어. 알긴 알지?"
빵대리는 다시 인터넷주소창에 '네'라고 쓴다.
채제공은 빵대리의 뒤통수를 때린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거 글을 쓸거면 글자라도 키우던가 콩알만하게 글 써놓고 이 노인네보고 읽으라고?"
빵대리는 입술을 깨물고 채제공을 돌아본다.
채제공은 화를 삭히듯 눈을 감고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다시 방끗 웃는다.
"우리 평강 채씨 집안에 걔처럼 참하고 착한 애가 없어요. 우리 지수가 보기에는 쌀쌀 맞아 보여도.. 그게 다 아픈 과거가 있으니 그러려니하고 넘어가고 너가 늘 응? 친동생 보살핀다는 마음으로."
빵대리는 무시하고 서류 작업에 열중이다.
채제공은 빵대리의 귀를 손가락으로 끌어당긴다.
"어르신이 말씀하시는데 어? 너 나따라 천당갈래?"
빵대리가 악 소리를 지른다.
사무실의 직원들이 빵대리를 쳐다본다.
"아, 아 괜찮습니다. 스탬플러에 찍혀서요."
빵대리는 화가 난 듯 컴퓨터 문서프로그램에 큰 글씨를 쓴다.
'어쩌라고요!'
채제공은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빵대리의 어깨를 조근조근 주무른다.
"우리 인신주왕께서 뭐 어째달라는게 아니오라~ 아시잖나 그 늘 응? 손녀를 걱정하는 할애비의 마음을. 그 손녀가 아무리 범팽이짓을 해도 무마시켜 줄 오라버니하나 있으면 또 이 할애비 마음이 얼마나 편안할지.허허"
빵대리는 타이핑한다.
'번암그룹 상속 후계자를 뭘 돌봐줍니까. 피는 못 속인다더니 성격은 또 개차반인가봅니다.'
채제공은 광대근육을 올리고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걔가. 우리 지수가 어릴 때부터 참 고생이 많았어요. 너같은건 모르시겠지만. 재벌이라고 다 좋고 좋은게 아니랍니다."
'본론이 뭡니까. 저 바쁩니다.'
"그래 본론, 역시 우리 인신주왕이 일처리 하나는 신속정확하지."
채제공은 재킷 가슴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빵대리의 코 앞에 가져다 댄다.
빵대리는 쪽지를 읽고 벌떡 일어나 채제공에게 따라오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다.
비상계단, 빵대리가 계단 난간에 목을 쭉 내밀고 위아래칸에 사람이 있는지 살핀다.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빵대리는 채제공을 벽으로 민다.
"제정신이에요? 손녀딸이라면서요. 뭔 이런."
빵대리는 쪽지를 손 안에 넣고 주먹 쥐어 구겨버린다.
"아니 내가 뭐랬나?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어? 또 너가 어? 내 손녀딸이랑 또 언제볼줄알고 겨우 쥐꼬리만한 대리주제에 사장을 바로 옆에서 볼 일이 또 있어? 어? 그니까 오늘 하루만 아니 한 시진이면 충분하다니까!"
"한시진이고 일분이고 일초고 나발이고 그런 일 없습니다. 요새 분위기 어떤지 몰라서 이런 부탁하시는거예요?"
"알지 알다마다. 자네 심정이 어떤지도 알고 그그 귀신노무새끼들이 자네한테 좀 박하게 굴었나 잘 알지. 하지만 그런 자네에게 부탁하는 이 할애비의 심정도 좀 이해해주면 안되겠나? 이런 기회가 또 오겠냔 말 일세."
"아 이거였구만. 이거였어."
"응?"
"아무 생각도 없는 순진한 애 꼬드겨서 무기재료공학부에 넣더니 기여코 번암방산에 밀어넣은 이유가 이거였어."
"아닌데? 그건 전부 안선생작품이고. 난 그냥 조력자 역할이지. 잘 흘러가라고 니 인생."
"됐고 이제 그거 안하니까. 다른데 알아보십시오 번암선생"
"예끼이놈 네 놈 똥기저귀차고 다닐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않았는데 한 시진 네 몸 빌려주는게 그리 아까우냐."
"네~네~ 아깝습니다 격려와 조언같은 말씀하시네요. 어떻게 2002월드컵사건부터 하나하나 다시 읊어봐요?"
"너..이..그.."
"빙의? 빙의! 빙의 절대 안할거니까 마음 접으세요. 이게 무슨 사랑과 영혼이야. 그리고 제발 성불 좀 하세요. 왜 이렇게 이승에 미련을 못 버려요."
"아이고..아이고.."
채제공은 비상계단에 걸터앉는다.
"미련한 후손놈들이 좀 잘해야 걱정없이 가지.. 별 머저리같은 놈들이 순서대로.."
"채제공 안 통합니다. 약한 척도 하루이틀이시죠. 조선팔도를 쥐락펴락하셨던 분이 이게 무슨 추탭니까."
채제공은 벌떡 일어나 빵대리를 올려다본다.
"거래..하겠나?"
"허허허허허"
빵대리는 숨이 넘어갈듯 웃다가 벽에 머리를 박고 기댄다.
"할아버지"
"어어"
"저랑 알고 지내신지가 벌써 이십년입니다 이십년. 스무해, 저 채제공 댁에 있던 팬티 갯수까지 다 알아요. 무슨 거래요."
"진급. 진급 어떠냐."
"진급요."
"내가 잘 말해주어 네가 사장 최측근이 된다 생각해보거라. 그거 하나만으로도 네 인생 앞날이."
"충분합니다 할아버지. 저 지금 서울대 조기졸업하고 카이스트 석사따고 번암그룹에서 최연소로 대리땄거든요? 전혀 부족할거없거든요. 전혀. 최측근 허허허허 됐어요. 정치는 할아버지 혼자 하셔요."
채제공은 계단을 세 발자국 오른다.
채제공이 빵대리를 내려다보는 형국이다.
빵대리는 채제공을 올려다보며 머리를 긁는다.
"채가의 비망록"
"네?"
"가언이다."
"네?"
"네놈을 신뢰한다하여도 피붙이보다 신뢰할까. 네놈이 중하다하여도 내 아들딸만할까. 네놈은 모르는 가언이다."
"가언이요."
"더 정확히 말하면 가서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책략서. 그걸 주지."
"그렇게 중요한걸 저한테 왜 줘요. 됐어요. 세상에 널리고 널린게 자기계발선데 또 무슨. 명심보감으로 충분합니다."
"거기 적혀있을지도 모르지않느냐. 네가 찾는게."
빵대리의 표정이 굳는다.
"장난치십니까"
"장난 아닌데."
빵대리와 채제공 간의 시선이 오고간다.
"십 분."
"한 나절"
"삼 십분"
"한 나절"
"한 시간."
"한 나절"
"아 진짜 한 시진요."
"반 나절, 더 희롱하려 들면 그걸로 끝이야."
"아쉬운건 영감님 아니신가?"
"네놈 몸에 적응할 시간도 염두해야지. 식이 밀려서 식사자리가 미뤄지면 어쩔건가. 반 나절, 그래 이 몸이 시간 약속 어긴 적 있나?"
"세 시간해요. 저 오후에 일해야되거든요?"
"내가 네 놈 보다 못할 일이 있느냐? 나 채제공이야 채제공. 정신차려 이놈아."
"반 나절요? 어딨는데요 비망록."
"나 못믿어?"
"영감님은 믿죠. 근데 그 비망록이 훼손됐으면요? 후손들이 잃어버렸을수도 있잖아요."
"기다려봐."
채제공의 몸이 흩어지듯 사라진다.
잠시 뒤, 계단 아래에서 들려오는 채제공의 목소리.
"어어, 있다 있어."
"보고왔어요?"
채제공이 아래 층에서 계단을 걸어 올라온다.
빵대리도 계단을 내려간다.
"어 잘 있더라. 퇴근시간까지다."
"반나절이라면서요."
"왔다갔다힘들었잖어 이놈아!"
"알았어요. 대신 업무시간에 또 게임하시고 그러시면 안되요. 사극 보지마시고."
"거참 빡빡하네. 일 다했으면 놀아도 되는거 아냐? 퇴근 못 시켜줄 망정."
"일 다 했다고 외출하셔서 또 나가셔서 여자들 건드리지마시고"
"알았다고"
"2002년 월드컵 때, 기억하세요. 여기 이제."
"알았다니까!"
"아.. 오랜만이라 이거.."
빵대리가 채제공에게 등을 보이고 선다.
"준비됐어요."
"퇴근할때 차 안에서 나올께. 그게 좋겠지?"
채제공의 손바닥이 빵대리의 등에 닿는다.
"아 그렇지! 운전하지마세요 면허도 없으.."
채제공의 형태가 완전히 사라진다.
홀로 남은 빵대리, 그 속에 채제공이 빙의되어있다.
채제공은 빵대리의 몸 이 곳 저 곳을 두드려본다.
"운동은 실하게 했구만."
빵대리의 바짓춤 안으로 손이 쑤욱 들어간다.
"허허허 고놈 참, 잘 컸네."
채제공이 빙의된 빵대리가 사무실로 돌아온다.
바로 탕비실로 향해 커피를 마신다.
"흐으음~"
커피를 음미하는 채제공.
채제공은 탕비실에 비치된 각설탕을 내려다본다.
"요즘 것들은 이 사당 귀한줄 모르고 말이지."
채제공은 빵대리의 재킷 안주머니에 각설탕을 한 주먹 쥐어 넣는다.
각설탕 세개를 입에 털어넣는다.
"으으음."
사무실, 기괴할 정도로 큰 타이핑 소리가 울려퍼진다.
김차장이 의자를 굴려 부장의 개인사무실 앞까지 간다.
"부장님. 부장님. 보고계시죠?"
"어어어 저거 또. 그거야?"
"오늘 내일은 몸 사리셔야할 것 같습니다. 부장님."
"그래그래 너도 몸 조심하고. 가봐가봐 눈에 띈다."
"넵."
차장이 다시 발을 굴려 제 자리로 돌아온다.
차장의 의자가 어딘가 턱 걸린다.
차장이 시선을 위로 향하면, 그 앞에 빵대리가 서있다.
"어..어. 괜찮아? 안다쳤어?"
"서류 정리 끝냈습니다."
빵대리가 한 아름의 서류더미를 차장의 무릎 위에 올려둔다.
"어..이거 내년..벌써..어 고마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던 빵대리가 고개를 돌려 김차장을 바라본다.
"차장님은 업무시간중에.. 어디 다녀오셨나봅니다."
"어? 아니아니. 보고할게 있어서 그 일해야지 일 허허."
"그렇죠. 행사있다고 헤이해지면 말이 안되는 일이죠. 자기 일을 하는건데."
"그치 그치."
차장은 진땀을 빼며 자기 자리로 의자를 굴려온다.
빵대리는 어느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보고있다.
빵대리의 자리에는 어깨 높이까지 쌓인 서류가 한가득 올려져있다.
"요즘 것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어 헝그리 정신이.. 이렇게 편하게 일할 수 있으면서 미루고 또 미루고.."
빵대리는 혼잣말로 궁시렁댔지만, 주변의 사원들 귓가에는 그대로 들려올만큼이 목소리다.
그보다 더 큰 타이핑 소리가 빵대리의 손가락과 키보드 사이에서 울려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