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파도가 밀려온다.
파도는 넓게 퍼지듯 흩어지더니, 흰 그물처럼 변한다.
하얀 그물이 은로를 묶기 위해 허공을 덮는다.
액체가 뺨, 이마, 쇄골, 하얀 셔츠가 더 하얗게 비추도록 흘러내린다.
코로 인지된 정보로는 이건 우유다.
여배우는 여신상처럼 서있다.
고고한 자태를 뿜어내며 빈 우유잔을 손에 쥐고 있다.
미처 다 뿌려지지 못한 우유가 여배우의 하얀 손가락 마디마디를 파고들며 굵은 방울을 이루어 테이블과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 프흡."
은로가 숨을 내쉬자, 우유방울이 튄다.
탁, 여배우는 우유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일냈네.'
여배우는 선글라스를 쓴다.
" 이, 이게 제 대답입니다. 확실히 알아들으셨길 바래요. 가자! 애인아."
매니저는 양손에 빵을 든 채로 멍하니 둘을 보고있다가, 여배우의 부름에 벌떡 일어난다.
" 네 어,언니."
매니저는 성큼 성큼 걸어 여배우 옆에 선다.
여배우도 일어난다.
" 앞으로, 회사에서건, 밖에서건, 마주 치는 일 없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여배우는 조각케이크 위에 포크를 콱 찍는다.
" 이거나 드시라그러셔요. 그 높으신 분은"
우연일까, 며칠 전 은로의 집에 방문했던 죽음의 신이 신나게 먹었던 생크림케이크다.
은로는 상황을 이해못하고 여배우를 올려다본다.
은로와 여배우 사이에 시선이 교차한다.
시선을 마주치려는 은로와 흘리려는 여배우의 술래잡기로 변한다.
술래와 아이처럼. 그리 진하지않은 선글라스 렌즈에서, 여배우의 시선이 은로의 코 끝을 스칠 때마다 은로는 저릿저릿한 심장의 혈류를 느낀다.
여배우는 몸을 휙 돌려 출입문으로 향한다.
은로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여배우는 오만상으로 얼굴을 찌푸린다.
저벅저벅 걸어가 손잡이를 잡는다.
햇살 가득한 빵집의 창가, 통유리문.
그 손잡이를 잡은 여배우,
여배우는 막 나가려던 참이다.
찝찝함, 무언가 놓친게 있나.
우유는 시원하게 뿌렸고, 대사도 통쾌했다.
뭐가 더 남았나.
여배우의 머릿 속에 계속 신경쓰였던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여배우는 문의 손잡이를 꼭 잡고서 은로를 부른다.
" 강은로씨"
은로는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온 몸에서 풍기는 우유향을 맡으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한 채로 여배우를 본다.
" 아까부터 백만송 백만송하시는데, 애저녁에 망한 드라마 이야기는 왜 계속 하는건데?"
은로는 갸우뚱한다.
'백만송이잖아 너.'
" 언제적 백만송이야 백만송이, 아저씨, 제 이름은요."
은로는 눈을 살짝 찡그린다. 창 밖의 햇살은 강렬하다.
'네 이름이 백만송이잖아.'
" 차라리예요. 차라리. 진짜 모르는거 아니죠? 뭐."
여배우가, 아니, 자신의 이름이 차라리라는 이 여자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문을 연다.
햇살뿐만 아니었다.
이 날의 공기는 예상치 못하게 따스한 훈기를 지녔다.
이 날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팔에 걸치고 햇살을 맞으며 기분 좋게 걸었다.
아침 일찍부터 빵집에 앉아있던 은로는 그제서야 그 날의 공기를 맡는다.
봄바람이 그녀의 향기를 안고서 더 따사롭게 스며든다.
은로는 눈을 깜박인다. 천천히 감았다 천천히 뜬다.
한 번의 깜박거림으로,
귓가에 들린 그녀의 이름으로,
신의 장막이, 눈앞에 깊게 쌓여있던 장막이 걷어지는 걸 느낀다.
얇고 어두운 검은 천이 그의 눈앞에서 걷어진다.
보통사람은 느끼지 못할 짧은 시간의 재빠른 움직임. 넓게 퍼져 은로의 얼굴과 목과 어깨를 감싸던 천은 봄바람에 휘날려 공중으로 치닫는다.
세상 만물 중 그 얇음을 비교할만한 것이 있을까. 흐르듯 펄럭이며 바람의 모양새를 그대로 본떠 공기 중에 펼쳐져있던 검은 천은 스스로 둥그런, 위아래로 긴 타원형의 형태를 띄우더니 어느새 큰 키의 인간처럼 보인다.
검은 천을 두른 남자가, 중절모를 뒤집어쓴 이 자가, 망각의 신이다.
세상의 모든 허투름과 안식이 그의 손에 달려있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피부의 신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이고 차라리가 열어놓은 문 틈 사이로 흐릿하게 빠져나간다.
신의 직물이 걷히자, 은로의 시야는 청아하고 밝아져, 차라리, 차라리라는 여인에 대한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망각의 신이 은로에게서 막아섰던 기억이 하나씩 스며든다.
차라리, 그 이름에 망각의 천을 씌워놨다.
' 어떻게 이 이름을 잊을 수 있었지..'
"잠깐, 잠깐만!"
은로가 소리지른다.
가게문 나가려던 차라리가 비틀거린다.
"뭐 뭐, 왜요. 왜."
은로는 여배우를 만나고서도 쭉 고민했다.
죽음의 편에 서야하는가, 바람의 편에 서야하는가.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리고 차라리라니, 결국은
" 살려드릴께요."
" 네에?"
차라리는 빵가게 문을 잡고 기대어있다.
" 어머머 진짜 미친사람인가봐. 살리긴 뭘 살려요. 뭐야이거. 애인아! 저 사람이 막."
매니저는 차라리와 은로 사이에 서서 양팔을 벌려 여배우를 보호한다.
" 절대, 죽음이 손 못대게해야겠어. 당신."
" 와.."
여배우는 빵가게 문을 재껴 열어둔다.
그리고 박수를 친다.
" 살다살다 별의 별 미친놈 다 봤지만, 강은로씨. 당신이였군요. 미친놈의 기준점은 당신이였어요. 제가 아직 부족했네요. 수양을 덜 쌓았었어요."
은로는 이제 아무런 상관없다.
" 지금 무슨말을 하는지, 이해 못할거 알아요. 그래도, 난 결심한건 안 바꾸거든. 잘 모르겠어요. 후회할거같긴한데, 백만송씨. 해볼께요. 최선을 다."
" 어휴, 애인아 가자. 뭘 하시든 선생님댁 무사평안하시고 항상 신체건강. 그 정신적으로는 언제든지 상담 한 번 받아봐요. 우유 그거 세탁비..어휴.. 그냥 본인 돈으로 해결하세요. 난 무서워서 더 다가갈 자신이 없어."
은로는 입을 크게 벌려 웃는다. 작은 빵가게가 웃음 소리로 꽉찬다.
" 어머머머 진짜 무서워 나 지금, 애인아 내 팔봐봐 닭살 돋았지 지금?"
" 네 언니 진짜 돋으셨어요. 피하실래요?"
" 어어 피하자, 너도 쟤. 아니 저분이랑 싸우지말자. 우리 인생에 더 이상 저분을 출연시킬 틈을 만들지말자. 애인아 얼른가자. 스케줄 꽉 채워 나 지금 일이 필요해. 무슨 일이든 여기만 아니면 될거같아."
" 언니의 그런 결심이 내일도 이어진다면 전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것같네요. 나가시죠."
" 어어어 애인아. 늘 말하지만 난 니가 너무 좋다."
" 저도 좋아요 언니. 가시죠."
" 해외스케줄부터 잡아 해외스케줄."
풍경소리가 들린다. 빵가게 문이 닫혔다.
가게 밖 거리의 소음도 사라진다.
유리창 밖, 빠른걸음 걷는 차라리와 매니저의 모습이 보인다.
순간 은로와 차라리가 눈이 마주친다.
차라리는 기겁하듯 놀라며 매니저의 팔짱을 끼고 더 빨리 걷는다.
시야에서 완전히 둘의 모습이 사라진다.
흠뻑 젖은 은로는 다시 의자에 걸터앉는다.
확신에 찬 얼굴로 행복한 듯 웃으며 우유가 살짝 섞인 밀크쉐이크를 쭉 빨아마신다.
옆에 인기척이 느껴진다.
남자점원이 빨간수건을 건내준다.
은로는 웃으며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는다.
" 고마워요. 땅선생님."
남자점원은 팔짱을 끼고, 창밖을 보며, 무어라 중국말로 말한다.
은로는 피식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