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우울한 소나기
작가 : aoike
작품등록일 : 2017.11.16
  첫회보기
 
의문의 여자
작성일 : 17-11-16     조회 : 390     추천 : 0     분량 : 4968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우리는 살면서 세상은 넓다고 귀청 떨어지게 듣지만, 정작 그걸 경험해 본 사람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적다. 물론 이 말을 하는 나조차도 그렇다. 그건 결코 이상한 게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리라. 대다수의 사람들을 보라. 지금 현재의 삶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이들이 어찌 세상이 넓은 걸 보러 갈 수 있을까? 그럴 여유조차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우리의 이상이요, 삶이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리고 난 이 지긋지긋한 일상을 관두려고 한다. 임아! 난 이 강을 건너야겠소. 잘 지내시오. 그럼 이만.

 

   엘리베이터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나는 그녀를 보았다. 대부분 각자의 애인을 기다리는 젊은 여자와 남자들뿐인 이곳에서 몇몇 사람이 로비에서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바로 그 몇몇 사람들 중 한 명이 그녀였다. 순간 날 아프게 만든 그녀는 뭔가 싶었다. 그녀는 그들 속에 서 있었고, 자의인지는 모르겠으나 날 현혹하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목이 빠져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와 그녀 사이에는 공식적으로 아무 볼일도 없었고 더군다나 초면인데 할 이야기가 있을 리가. 그녀는 돌아서서 로비 끝에 있는 유리문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기다리는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오다가 차에 치인 것처럼 묵묵히 걸었던 것이다. 뭐랄까? 회전문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소매치기를 당한 것 같은 애처로움이 묻어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바깥은 비가 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일기예보에서도 그랬듯이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추잡한 날씨였으니까. 나는 비 때문에 거리의 소음이 얼마나 더 크게 들리는지를 알아차렸다. 밖으로 나오기도 전부터 온갖 잡소리가 내 귀를 자극해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횡단보도 없는 도로를 향해 동쪽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교통은 꽉 막혀 있었고 저만치 앞쪽 간선도로에서는 차들이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가로질러 가는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싶은 걸까? 그것도 아니면 초인인 걸까? 저만치 보이는 횡단보도는 사람들로 붐볐다. 설마? 사람으로 꽉 찬 불편하기 그지없는 저걸 걷기 싫어서 목숨을 걸었단 말인가? 나는 그녀가 아까부터 무엇인가를 자꾸만 흘끗 쳐다보는 것에서 심각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행위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했을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자기를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잡으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녀의 뒤꽁무니만 겨우 쫓을 뿐이었다. 잘못된 거다. 분명 어딘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나는 이 악물고 뛰는데 그녀는 유유히 걷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건장한 성인 남성이 여자 한 명을 쫓지 못하는 이 바보 같은 상황을 난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보이는 그녀는 비 오는 날의 퇴근 무렵 도시의 가호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그 누구에게 어떠한 방해조차 받지 않고 있었다. 성질 더러운 차들 역시 그녀에게 자기들의 영역을 양보했다. 이 세계로부터 그녀의 발소리를 구별해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만물이 그녀의 여행에 간섭은커녕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내 두 눈앞에서 연달아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기 앞쪽 길 건너편으로 연이어 늘어선 빌딩들의 벽에 갈라진 틈이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뭔가가 헐렸고 다른 무엇인가가 새로 올려지고 있었지만 그 철제 구조물은 보도의 방책보다 약간 더 올라가 있어서 그 틈새로 햇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길 이쪽 맞은편에 멈춰 서서 어느 상점의 쇼윈도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내 예상이지만 카페 아니면 옷가게 쇼윈도였다. 그녀는 거기서 무려 5분을 허비했다. 그 덕에 난 신호등이 다시 파란 불이 들어오고도 그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재빨리 도보를 횡단한 나는 이제야 그녀와 같은 도로에 서있는 걸 다시금 확인하고 안도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녀와의 거리가 좁혀졌으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달렸다. 그녀의 어깨에 손 뻗으면 닫을 듯한 거리에 도달했을 순간, 몸이 비틀어졌다. 비틀어진 몸은 아까 그녀가 뚜렷이 바라보던 쇼윈도였다. 그곳 커피 테이블에는 컵들과 잡지책들이 놓여 있었고 꽃병에는 꽃들이 꽂혀 있었지만 꽃은 말라 비틀어졌고 컵은 비었고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쇼윈도 유리에 비치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판유리에 뚜렷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과 뒤로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도 가까이 있어서 기겁할 정도였다. 그녀는 겨우 한두 발짝 뒤에 서 있었다. 나는 돌아서진 못하지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을 수도 있었고, 살려 달라고 애원할 수도 있었다. 내가 그렇게 곧잘 알은체할 걸 그녀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그대로 나를 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녀는 나를 해치려는지도 몰랐다. 마음만 먹으면 나 같은 건 손쉽게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마음을 먹지 않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그냥 두고 갔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심장조차 멈춘 채 온몸이 긴장하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돌아선 탓에 쓰고 있던 모자챙에서 빗물이 떨어져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몹시 긴장했을 때의 식은땀처럼 오싹했다. 차가운 물이 내 얼굴과 맨손에 떨어졌고, 젖은 도시의 불쾌함과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달갑지 않은 냄새가 느껴진 것 역시 한참 후였다. 내 발이 젖기 시작해서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의식이 돌아온 것도 그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그녀는 자기를 뒤쫓는 사람에게 무한한 두려움을 고조시켜 그가 누구든 자신의 체력이 형편없고 그래서 쉽게 상해를 입을 수 있다는 섬뜩한 인식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 집에서 약간 멀리 떨어진 동네까지 왔지만, 앞쪽으로 갈수록 불빛이 더욱 밝아지는 ‘빗발치는 불꽃 거리’의 모퉁이가 보였다. 나는 만일 그녀를 쫓다 완전히 엉뚱한 곳에 이를 수 있지만 그래도 본능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였다. 어차피 결과는 괜찮아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고, 난 살아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그 모퉁이에 출입구가 두 곳 있는 제과점이 하나 있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 단골 중 한 명이 바로 나니까. 나는 간선 도로 쪽으로 나 있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서 여느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커피랑 빵을 하나 산 다음 ‘오늘이 지나서’ 가로 나 있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내가 거기를 따라 걷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신문 가판대 옆에서 나를 몰래 지켜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녀는 영리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위압적인 힘과 공포가 느껴진 달까? 중요한 건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는 소리다. 내가 간선도로 쪽으로 나갈 거라고 그녀는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던 나는 반대편 모퉁이에서 그녀가 나타난 걸 알아챘다. 다시 한 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히 공포에 질린 하루살이가 된 기분이었다. 여차하면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어찌 됐든, 여기에서는 그녀를 쉽사리 따돌릴 수 있을 터라고 자신했다. 어차피 빵집 맞은편 버스 정류장엔 항상 택시가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운이 좋다면 버스가 올 것이고 그걸 타고 도주할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택시에 올라탔다가 아예 멀리 도망가서 다른 입구에서 이곳 동네로 들어가면 그만이다. 만에 하나 앞선 두 가지가 모두 실패할지언정, 반대편 문으로 내릴 수도 있다. 택시에 탔다가 페이크로 반대편 문으로 내리는 플랜A, 신경전 끝에 빵집의 반대편 문으로 나가는 플랜B가 있겠다. 그냥 경찰에게 알릴 수도 있었고 또 육상으로 다져진 내 주력을 믿고 달아날 수도 있었다. 만일 달아난다면 내 느낌이지만 그녀가 계획해둔 달갑지 않은 최우선이 바로 내가 주력을 이용한 도주라는 생각이 든다. 왠지 나를 분명한 이유에 한해 폭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언제 그녀에게 폭행을 유발할 수 있는 행동을 했나. 로비에서 썩은 동태처럼 그녀를 쳐다본 게 설마 그건가? 아니면 로비에서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그런 건가? 여하튼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나를 두렵고 머리 아프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사는 이 썩을 도시에서 익히 알고 있는 구역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지상의 미로들과 지하 통로들, 복잡한 건물 내부들, 그리고 사람들로 짜증나게 붐비는 로비들이 있어서 추적자를 따돌리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향긋한 커피와 달콤한 빵을 보면서 하니 믿음이 갔다. 솔솔 풍겨나는 기분 좋은 온기가 뭐랄까 나에게 용기를 돋워주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공격을 받는 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상상일 터였다. 그녀는 아마도 앞서 말했듯 어리석거나 판단을 잘못했거나 정신이 잠깐 나갔을 것이고, 그래서 결국에는 이런 짓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만일 내 추측이 적중한다면 종말로 치닫는 그녀를 모른 채 할 순 없는 일이었다.

  왠지 그녀는 중요한 것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내가 중요한 인물이라서 누군가 내 사무실에서 역까지 미행을 할 이유라고는 없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빵을 한 입 베어 먹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알아차린 걸 아마 모르고 있을 거다. 그러니 아직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그대로 생각에 생각을 이은 나는 오늘 아침부터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천천히 어두운 밤 골목을 걸었다.

  혹시 점심시간에 내가 낯선 사내와 부딪혔는데, 그 사내의 서류가방과 내 가방이 뒤바뀐 걸로 알고 내가 들고 있는 이 서류 가방을 노리고 있는 건가? 낯선 남자의 서류 가방 속에 들어있는 보고서들은 전쟁이나 암살, 마약 밀수나 수소폭탄 혹은 여타의 국제적 음모 같은 것들과 깊은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서류 가방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작가의 말
 

 처음으로 웹소설에 작품을 올립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1 의문의 여자 11/16 39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