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이별
(1) 스토커 친구
잠시 주춤했던 놈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여지없이 앞의 놈을 반으로 가르자 보름달이 핏 빛으로 물들었다. 윌리엄은 붉게 젖은 눈가를 얼른 닦아내며 시야부터 확보했다. 아직도 수십 명의 복면인(覆面人)들이 그와 베로니카를 노려보았다.
“괜찮아?”
“도대체…?”
숨을 헐떡이던 그녀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미친놈이 감히 ‘루벤스 제국’의 초특급가문인 ‘알프레드 가(家)’에 도전장을 던진단 말인가? 그것도 장남을 죽이려고 환장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더는 버티기 힘들겠는데.”
복면들이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에고, 지지리 복도 없지. 첫 데이트 장소가 내 묘지(墓地)터라니. 이게 말이 돼?”
베로니카가 호리호리한 애인을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미안. 나 때문에.”
데이트 장소를 정한 윌리엄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런데 왜 이리 잘 생겨 보이는 거야? 사랑하면 눈꺼풀에 콩깍지가 쓰인다더니…이런 상황에서도 윌리엄의 환한 얼굴만 그녀의 주변을 둥둥 떠다녔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놀랄 일이다.
“알…알긴 아네!”
속마음이 들켰을까봐 괜히 민망하다.
“예뻐.”
윌리엄도 그녀와 같은 마음인가보다.
“정말?…호호호.”
“웃으니까 더 예쁘네.”
검지를 펴서 콧등을 톡 친다…이…이런…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아무리 봐도 너무 잘 생겼어…온몸에서 힘이 빠지려고 한다.
“이…이게 웃는 거로 보여?”
자존심 강한 여자로서 한 번 튕겨보았다.
“그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거지.”
“어쨌든 우는 건 아니잖아.”
윌리엄은 접근하는 놈들을 칼로 겨누면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 기가 막힌다. 이렇게 멋진 애인까지 생겼는데 숫처녀로 죽어야 한다니.”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나?”
1시간 전만 해도 둘만의 달콤한 러브신을 그렸었다. 드디어 25년 만에 진짜 남자가 될 수 있었는데 어찌 이런 날벼락이…으드득!
“그건 그렇고 내가 언제는 안 예뻤어?”
“엉?”
윌리엄이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았다…느닷없이 뭔 소리야?
“웃는 것만 예쁘냐고?”
“아하! 당연히 아니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아무튼, 여자들이란!
“그럼 또 언제 예쁜데?”
“항상 예쁘지.”
“진짜지?”
새삼스럽게 확인까지 한다.
“당연히 정말이지. 그래도 입 벌리고 잘 땐…….”
“뭐라?”
눈 끝이 싸-악 올라간다.
“아…아니….”
“다시 말해 봐.”
손에 쥐고 있던 그녀의 애완 도끼가 턱밑으로 천천히 기어들어왔다.
꿀꺽!
잘못하다간 저놈들보다 내가 먼저 죽을 수도. 그의 발밑으로 처참한 몰골들이 굴러다닌다. 특히 그녀의 손도끼에 머리통이 빠개진 시체들은 더욱 비참했다.
“아…아니, 자긴 입 벌리고 자는 모습이 제일 예쁘다고…하하하.”
“추호도 거짓이 없겠다?”
“물론이지!”
슬쩍 그녀의 손도끼부터 옆으로 밀어냈다…그런데 어쩌다 이런 여자를 사랑하게 된 거야? 옆집 살던 주근깨 말괄량이 꼬맹이를…하기야 전쟁터에 여자라곤 베로니카뿐이었는데 별수 없잖아? 그냥 그렇게 눈이 맞은 거지. 또 소꿉친구라서 편했으니까.
“이것들이?”
“죽여라!”
둘의 사랑 놀음은 복면들을 더욱 자극했다. 등을 맞대고 방어를 하던 윌리엄과 베로니카의 손놀림도 덩달아 빨라졌다.
“으악!”
“큭!”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윌리엄과 베로니카의 실력은 혀를 두를 정도로 대단했다. 더욱이 등을 기댄 합공(合攻)은 각자의 실력과 더불어 서로의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전술이었다. 하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죽이고 죽여도 끝이 없었다.
“에잇!”
“어딜?”
놈들의 공격을 겨우 막아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손아귀의 힘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복면들도 둘의 상태를 눈치 챘는지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듯했다.
“정신 바짝 차려!”
베로니카가 윌리엄의 손을 잡아준다.
“으…응.”
허리에 힘을 주며 그녀의 등에 더욱 바짝 붙었다.
“내 곁에서 떨어지면 안 돼!”
제국 최고의 여(女) 전사가 신신당부를 한다.
“알고 있어.”
순간, 윌리엄의 대답이 신호인양 놈들이 달려들었다.
“죽어라!”
날렵하게 생긴 한 놈이 윌리엄을 덮쳤다.
쨍!
금속성이 귓가를 스치면서 한쪽 다리가 휘청했다. 겨우 놈의 공격을 막았지만, 몸이 기우뚱거리며 가슴 아래로 빈틈이 생겼다.
“마지막이다!”
복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로 걷어찼다. 윌리엄이 외마디 비명도 못 지르고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떼구르르.
놈이 칼을 들어 그를 찌르려 했다.
“지옥으로 가라!”
“아직은 아니야!”
대답은 윌리엄의 뒤쪽이다.
“……?”
“내 허락 없이는 절대도 안 된다!”
어느 새인지 허공에서 베로니카가 날아왔다. 그러나 놈은 미처 칼끝을 돌리지 못했다.
퍽!
시뻘건 도끼날이 놈의 목을 찍었다. 그 사이 다른 놈이 윌리엄을 덮치려 한다. 그녀의 비어있는 자리를 넘어선 것이다. 아직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는 애인이 위험했다. 그러나 달려갈 시간이 없었다.
뚝!
그녀의 도끼날에 잘린 목이 땅바닥에 닿기 전이다. 싸움터에선 모든 게 무기였다.
“에잇!”
베로니카는 서슴없이 발을 들어 공을 차듯이 떨어지는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그녀의 발을 떠난 둥그런 무기는 일직선으로 정확하게 날아갔다.
퍽!
예상치 못한 공격에 윌리엄에게 칼을 들이대던 놈이 옆으로 쓰러졌다. 베로니카가 얼른 달려가 애인을 덥석 안았다.
“괜찮아?”
“실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나보다 먼저 죽지 마.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눈물까지 글썽이려고 한다.
“후후…죽고 싶어도 저놈 때문에 못 죽을 거 같은데.”
윌리엄이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혹시…스토커?”
베로니카의 젖은 눈동자가 애인의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돌아갔다. 저만치에서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온 덩치 큰 사내가 암살자들을 장난감처럼 다루고 있었다. 그는 마치 산책을 나온 학자(學者)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내가 조금 늦었지?”
“슈턴!”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