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계약
삼 일이 지났는데도 황제의 추격은 잡히질 않았다. 텔레포트로 어둠의 마법에서 벗어난 곳은 ‘산타고’라는 국경 도시의 외곽이었다. 터벅터벅 산길을 걷던 슈턴이 우뚝 멈추어 선다. 그의 시선은 발아래 펼쳐진 거대한 마을을 훑어보았다.
“여기에 머물러도 괜찮을까?”
“일단은 황제가 추격을 하지 않으니까.”
“무슨 꿍꿍이속이지? 우리들의 심장을 자그마치 5년이나 노렸다면서 이렇게 쉽게 포기하다니.”
“우리가 찾아갈 줄 아는 거야.”
“우리가?”
“복수할 거로 보는 거지.”
슈턴의 몸속에서 일곱 여자의 목소리가 재잘거렸다.
“정말 찾아가려고?”
“미쳤어! 우리가 인간을 찾아가게. 만일 그랬다가는 여신님 손에 먼저 죽어. 하지만….”
여신은 악녀들에게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결계를 씌어놨다. 이를 어기면 존재자체가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뭐?”
악녀들이 잠시 숨을 고른다.
“우리의 새 몸은 어떨지 모르지. 슈턴은 필히 복수하려고 할 테니까.”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잘못하면 우리의 존재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고.”
“걱정하지 마. 아직 놈이 결정한 건 없으니까.”
멍한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슈턴은 마을을 향해서 내려갔다. 자신의 몸속에서 떠들어대는 악녀들에겐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하지만 슈턴이 황제를 찾아갈 확률은 100%야.”
“그 전에 방법을 찾아야지.”
“으음!”
갑자기 심각한 어조로 가라앉는다.
“찾긴 뭘…방법이야 어차피 협상밖에 없는 거지.”
“우리가 놈의 몸을 빌린 이상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유리한 협상을 해야 한다는 뜻이야.”
“충격이 너무 커서 자살하는 건 아니겠지?”
“용사들은 원수를 두고 자살하진 않아.”
“그래도…….”
가장 두려운 걱정이었다. 쉽게 안심이 될 리가 없었다. 놈이 죽기라도 하면 악녀들의 영혼도 사라져야 한다. 사람이 되기 위해 지금껏 기다려온 세월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이제 그만! 놈이 깰 때가 됐어.”
“벌써?”
“아직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면 곤란해지겠지.”
악녀들은 동시에 입을 닫았다. 마을의 입구에는 커다란 나무가 푯말처럼 서 있었다. 슈턴이 그 자리에 기대어 앉더니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목구멍이 터질듯 실컷 내지르더니 귀를 후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통을 통통 두들긴다. 악녀들이 숨소리까지 멈추며 긴장했다.
“다 떠들었어?”
“……!”
“협상이란 게 뭐야?”
“들…들었나? 우리 얘기를.”
슈턴이 다시 귀를 판다.
“그렇게 크게 떠드는 데 못 듣는 게 이상한거지.”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이야기를 들은 거지?”
“왜? 이상한가?”
“우리도 ‘콤바인’이란 영혼 합체를 해 본지가 오래 되서 가물가물하지만 보통은 육체를 빌려주면 삼일은 지나야 깨어나는데…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정신력까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숲에서 처음 만났던 붉은 머리 슈턴은 강력한 용사였다. 키도 보통이상이고 구릿빛 탄탄한 몸매에, 특히 꽉 대문 입술이 도도라진 우락부락한 얼굴은 감히 범접 못 할 카리스마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이다. 그 이상은 신(神)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답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혹시 신의 갑옷 때문에……?
“후후…내가 특이체질인가보지.”
“그리고 또…….”
조금 전보다 더욱 놀랍다는 말투다.
“또?”
“정말 아무렇지 않아?”
“뭐가?”
슈턴은 악녀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하지만 모른 척 간단한 대답만 했다. 될 수 있으면 상대편의 말을 많이 들어야 유리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녀들은 분명히 그하고 협상을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많이 알아야 유리하다.
“우리가 네 몸속에 들어갔는데 이상하지 않아?”
“별로.”
이 정도면 악녀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막~미칠 거 같고, 머리가 빠개질 듯 아프고…또 뭐냐…그래!…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아니.”
여전히 별스럽지 않게 악녀들의 말을 받는다.
“거참…특이체질 맞네.”
“그리고 나는 이미 죽었잖아.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너희들 때문에 다시 살아났고…당연히 내가 놀랄 이유가 없지. 인정하긴 싫지만 너희들 덕분에 부활한 것은 맞으니까.”
너무 쉽게 뱉는다.
“오잉? 그것도 기억나?”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억나…됐지? 그러니까 이제부터 협상에 대해서 말해 봐.”
본론으로 들어서는 말투가 제법 까칠하다.
“모든 걸 다 안다니까 말하긴 쉬워졌네. 협상이란 둘 다 이득이 될 수 있도록 서로를 돕는 거야. 슈턴도 우리를 도와야 하고 우리도 너를 도울 거야.”
“좋아! 너희들은 나의 목적이 뭔지 알지?”
이가는 소리를 들으며 악녀들이 잠시 숨을 고른다.
“황제에 대한 복수!”
정확히 집어낸다.
“그럼 너희들의 목표는?”
“육체를 갖는 거야.”
슈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육체를 갖는다는 말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을 죽여서 그 속에 들어가겠다는 건가?”
“호호…우리가 아무리 악녀들이라도 그럴 순 없지.”
“다른 방법이 있다?”
“먼저 우리와 협상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지.”
“그 방법을 듣는 게 먼저 같은데?”
“…….”
“…….”
기세 좋게 몰아가던 악녀들이 잠시 주춤한다. 쉽게 얘기하지 않으려 한다. 슈턴은 초강수를 두었다.
“내가 너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내가 죽으면 너희들도 같이 죽는 거 같던데…….”
“안 돼! 죽으면 안 돼!”
생각보다 겁이 많이 악녀들이다. 이럴 땐 숨통을 더욱 조여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야 한다.
“후후…나는 이미 한 번 죽었던 몸이야. 아쉬울 것도 없지. 물론 선택은 너희들이 해.”
“치! 원래 잘 생긴 것들이 머리도 좋은 거 아냐? 생긴 데로 놀아야 오래 사는 거야.”
특이체질에게 자신들의 약점이 잡힌 게 화가 나는 지 인신모욕으로 툴툴거린다. 그러나 슈턴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번 말은 못 들은 거로 하지. 원래 나는 외모 콤플렉스가 있어서 누가 조금만 내 얼굴가지고 뭐라고 하면 미치는 경우가 있거든. 너희들도 괜히 나를 건드려서 피 보지 말고 알아서 피해 다녀.”
“알았어. 그렇다고 협박은…정말 생긴 데로 지랄이야.”
“또? 이것들이…….”
“알았어! 알았다고!”
칠악녀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자칫 잘못되면 사람이 되기 위해 수백 년을 지켜온 그녀들의 목숨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뭐부터 말할까?”
“협상의 목적은 서로 알았고, 너희들이 육체를 얻는 방법부터 시작하지. 선량한 사람이 죽어나가는 건 별로라서.”
“한 가지만 하지?”
“또 생긴 데로 살라는 말 같네.”
슈턴이 으르렁거린다. 눈까지 부릅뜨니 더욱 사납다.
“아…아냐!”
“괜히 성질 뻗쳐서 다 때려 치기 전에 빨리 본론만 말하지.”
칠악녀가 동시에 침을 꼴깍 삼킨다.
“우리가 육체를 얻는 방법은…….”
“잠깐!”
다른 악녀가 설명을 막는다.
“……?”
“그전에 우리의 심장에 대해서 알아야 해.”
“아! 심장!”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사실 황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에게 죽임을 당하고, 다시 부활하면서 다른 것은 그려지지 않았다. 오로지 목숨보다 소중한 친구들…윌리엄…베로니카…살아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