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뜻밖의 소식
성(城)은 방어를 위해 해저를 넓고 깊게 파 놓았다. 그대로 달려갔다가는 풍덩!…그런데 저 놈은 뭘 믿고 저렇게 죽어라 뛰어가는 거야?
“아아아아아앗!”
슈턴은 성문을 향해 두 개의 도끼를 차례대로 힘껏 던졌다.
퍽! 퍽!
두꺼운 문이 부서질 듯 흔들거린다.
“으라차차!”
괴성소리가 절정을 달리면서 슈턴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족히 4~5미터는 될 듯한 거리를 새처럼 날아간다. 그러나 중력을 따라 포물선을 그리며 급격히 하강한다.
“이얍!”
성벽에 박힌 도끼가 겨우 한 손에 하나 씩 잡혔다.
“와아!”
숨죽이고 바라보단 모든 시선이 환호성을 질렀다. 힘깨나 쓰는 사내들도 턱이 빠져라 탄성을 보냈다.
“후우~! 어디 가 볼까?”
먼저 오른 손. 그리고 왼손. 한 번에 하나씩…두 개의 도끼는 번갈아가며 성문을 기어올랐다. 성문은 기중기로 끌어올리는 방식이라 끝이 성벽에 가깝게 맞닿아 있었다.
“으차차! 거의 다 왔다.”
성문 꼭대기를 잡고 힘을 주어 당겼다. 커다란 몸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더니 성벽으로 넘어갔다.
“멈춰라!”
성벽을 지키던 여전사들이다.
“너희 주인을 보러왔다.”
“시체라도 로리타님을 뵙지 못한다.”
“그건 너희들 생각이고.”
“으으으…이놈이…어서 저 놈을 잡아라!”
지휘관인지 닭 벼슬처럼 생긴 투구를 한 여자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여전사들은 슈턴을 어찌 할 수 없었다.
“빨리 덤벼!”
“이놈이!”
“시간 없으니까 빨리!”
성벽을 따라 이어놓은 길의 폭이 너무 좁았다. 겨우 두 사람 다닐 정도의 넓이였다. 앞뒤로 한 두 사람씩 두 세 명이 달려들어 봤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컥!”
“악!”
칼을 들고 줄줄이 덤벼들던 여전사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닭 벼슬이 노발대발 발을 동동 굴렀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런데 달려들던 여전사 하나가 걸음을 멈칫했다.
“어?”
“왜?”
얼굴만은 꽤 예쁜 소녀였다.
“저기 혹시?”
주변의 동료들을 보면서 쭈뼛거린다.
“나를 알아?”
하다하다 안 되니까 술수를 부릴 수도 있다. 슈턴이 좀 더 자세를 낮추며 신경을 쓴다.
“슈턴님 아니세요?”
“맞긴 맞는데…….”
전혀 기억이 없다. 근육질이 울퉁불퉁한 여자라…대륙을 돌아다녔지만 그가 아는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베로니카 아가씨의 호위 기사였던 아만다에요.”
“뭐…뭐? 베로니카…베로니카의 호위 기사였다고?”
“기억나세요?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없으실 지도…….”
가물가물하다. 분명 아만다란 이름은 들은 기억이 있는데…얼굴은 전혀 모르겠다. 추억을 잘 뒤져봐. 혹시 아누? 로리타랑 친해질 지도…악녀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봐도 전혀 모르겠다. 수십 명이나 되는 친구의 호위 기사들까지 일일이 생각할 만큼 그리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지? 베로니카는?”
“아! 아직 모르시는군요. 저는 당연히 아실 줄 알았는데요?”
오히려 왜 모르냐고 되묻는다.
“나야 5년 전에 수도를 떠났으니까 당연히 모르지.”
“황제께서 전혀 말씀이 없으셨나요?”
이번엔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도대체 무슨 일이지?”
“베로니카 아가씨는 슈턴님이 수도를 떠나고서 얼마 뒤에 윌리엄님과 결혼을 하셨어요.”
“뭐…뭐야?”
당연히 기뻐할 일이었지만 괜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베로니카 아가씨께서는 결혼과 동시에 호위 기사들에게 자유를 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여기까지 온 거구요. 다만 걱정은…….”
말을 할까 말까 머뭇거린다.
“괜찮아. 어서 말해 봐.”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황제께서 아무래도 슈턴님이 가장 아끼는 친구 분인 윌리엄님과 베로니카님에게…….” “
또 눈치를 본다. 주변의 눈과 귀가 그녀를 주목했다. 수도(首都)의 일은 멀리 있는 영주들이나 국민들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내가 황제의 원수….”
순간, 머릿속의 악녀들이 놀라며 난리다.
“야!”
“슈턴! 정신 차려!”
그녀들은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잘못해서 황제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큰일 날 수 있었다. 슈턴도 얼른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아…그니까…원수가 아니고 친구다. 누구라도 너에게 뭐랄 순 없어.”
“감사합니다.”
여전사가 고개를 푹 숙인다. 황제의 이름이 아직 통하는 걸 보니 놈의 계략은 비밀리에 진행 중인 듯하다.
“제가 수도를 떠나올 때 들리는 소문으로는 알프레드 가(家)의 스몰츠 백작께서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말도 안 돼! 어떻게 아저씨가?”
슈턴이 크게 반발하며 화까지 낸다. 괜히 잘못 말했다가 혼이 날까봐 여전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다른 소문이나 말은 없고?”
“모두들 황제의 계략이라고…개국 공신들을 없애고 혼자서 제국을 차지하려고 술책을 부린다고 했습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게 언제지?”
“2년 전쯤 됩니다.”
“혹시 나에 대한 소문은 없던가?”
“5년 전에 갑자기 사라지셔서 윌리엄님과 베로니카님도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황제께서 중요한 부탁을 하셨다고 해서 그렇게만 알고 있습니다.”
“다른 건 없고?”
“예!”
작은 입술이 안도의 한 숨을 쉰다.
“으음!”
일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칠악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여기서 사랑놀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황제가 나쁜 짓을 꾸미는 거야 놈의 손에 죽었을 때 이미 예견했던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놈의 나쁜 짓이 오래 전부터 진행됐다는 것이다. 그 말은 시간이 급박하다는 뜻이었다. 황제가 그를 불러들일 수 있는 계략은 윌리엄과 베로니카를 인질로 삼는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놈의 나쁜 짓은 생각보다 스케일이 꽤 컸다.
개국 공신인 알프레드 가(家)는 윌리엄의 집안이다. 그의 아버지인 스몰츠 백작은 선대 황제의 절친한 친구이며 제국의 존경받는 어른이기도 하다. 슈턴 역시 아버지가 전사했을 때 곧바로 알프레드 가(家)에 몸을 의지했었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목숨이 아깝지 않은 친구들이었다. 윌리엄과 슈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황제가 최고의 우군이던 알프레드 가(家)를 역적으로 몰아서 없애려한다. 다른 가문들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무슨 얘기가 그리 길지?”
닭 벼슬 투구가 둘 사이로 다가왔다. 아만다가 얼른 허리를 굽혔다.
“대장님! 이분은 제국의 최고 용사이신 슈턴님 이십니다.”
“슈턴? 정말인가?”
깜짝 놀란다.
“그렇습니다.”
“당…당신이 정말 블랙 엔젤 이반님의 제자야? 틀림없는 슈턴님이란 말이야?”
재차 확인을 한다. 이 여자가 속고만 살았나?…살기등등하던 닭 벼슬의 표정이 다소 노곤 노곤해진다.
“아저씨의 제자인 건 맞는데 최고 용사는 아니지. 제국의 최고 용사야 당연히 이반 아저씨고…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지?”
“제국의 용사라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최고의 용사와 그의 제자들은 저희에게 우상입니다.”
“말이라도 그렇다니까 고맙긴 한데…….”
“반갑습니다.”
다짜고짜 손을 잡고 흔들어댄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이제야 여자답다. 여자란 모름지기 웃어야 예쁘다니까. 닭 벼슬까지 벗어던지니 반듯한 이마와 커다란 눈이 제법 봐 줄만하다.
“저를 따라 오시죠. 로리타님을 만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만 가 봐야겠어.”
“예~에?”
닭 벼슬도 놀라고, 여전사들도 놀라고, 아만다도 놀랬다. 여기까지 와서 로리타도 보지 않고 그냥 돌아간다니…그녀들이 잘못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들보다 더욱 놀란 물건은 슈턴의 머릿속에 있었다.
“무…무슨 소리야?”
“빨리 수도로 가야겠어.”
“약속이 틀리잖아!”
악녀들이 목 맨 소리를 냈지만 귀에 들릴 그가 아니었다.
“어떡하든 계약은 꼭 지켜.”
“네가 죽으면?”
“빨간 심장이 육체를 얻기 전이니까 다른 놈에게 콤바인 하면 되잖아. 나보다 더 멋진 놈이 있으니까 걱정 하지 마.”
“그 놈이 아직 살아있다고 확신해?”
“잘못 됐을지는 몰라도 아직은 살아있을 거야. 만일 윌리엄이 죽었다면 이곳까지 소문이 자자할거야.”
슈턴은 멀뚱멀뚱 서 있는 아만다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직 살아있을 거야. 절대 윌리엄만은 죽으면 안 돼. 그리고 베로니카까지 지켜야 하잖아…말을 하면서도 착잡하다.
“네 말대로 만일에 윌리엄이란 친구가 죽었다면? 또 다른 몸뚱이를 찾으라고? 그건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육체가 없어서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는 악녀들이 씩씩거린다. 그녀들의 불만을 가만히 듣던 슈턴이 진지한 목소리로 한 가지 약속을 더 했다.
“정말로 윌리엄이 죽었다면 아무 짓도 안하고 다시 이리로 올게. 그럼 되겠지?”
말해 놓고 보니 가슴이 먹먹하다. 그가 어떤 친구인데…죽었다는 생각 자체가 슬픔이었다. 자신이 황제에게 죽임을 당한 것보다 더 커다란 아픔이 밀려왔다. 그 감정을 눈치 챘는지 쫑알거리던 악녀들이 입을 다물었다.
“좋아! 훌륭한 용사라니까 믿어 보지”
“고마워.”
지금까지 살면서 남에게 머리를 숙여 본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이제 빨리 가서 친구들을 구해야 해…갈 길이 정해지자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또 왜?”
“지금은 안 돼.”
“뭐래?”
“내 이야기를 좀 들어봐."
잘 나가는 듯하더니 웬 태클? 그래도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들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