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소립니까?”
“혼자서 연구하는 마법사 중에서는 던전에 들어가서 그곳에 근거지를 차리는 마법사가 종종 있거든. 만약 몇 백 년 전에 그런 짓을 하고, 지금 와서 우리가 그 근거지를 발견하면? 마법사가 남긴 유산을 모조리 꿀꺽할 수 있는 거지. 그 마법사는 죽었을 테니까.”
“마법사가 살아 있으면?”
“당연히 도망쳐야지! 근거지를 차려놓은 마법사랑 싸우는 바보는 세상에 없어, 리처드!”
파란드와 타칸은 뭐가 그리 웃긴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술집의 밤은 깊어갔다.
아침에 여관에서 일어난 리처드는 먼저 씻은 후 1층으로 내려갔다. 옆방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를 보아하니 파란드와 타칸은 숙취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았다.
여관의 주인장은 먼저 나와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벽난로 위에 거대한 양철 냄비를 올려놓고서 갈색 통에 든 가루를 넣던 주인장은 리처드를 보자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거…… 신입이 먼저 일어나다니. 파란드와 타칸은 반성 좀 해야겠군.”
“제가 적게 마신 것뿐입니다.”
리처드는 자리에 앉았다.
“뭔가 먹을 생각이냐?”
“뭐든지요.”
“그래, 조금만 기다려라. 닭고기로 수프를 끓이고 있으니.”
보글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향기로운 냄새가 리처드의 콧속을 찔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장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리처드는 냉큼 일어나 양철 그릇을 들고 앞에 섰다.
“자, 많이 먹어라.”
가득 부어 준 붉은색 닭고기 수프를 받고서 리처드는 정신없이 퍼먹었다. 매콤한 맛과 동시에 쫄깃하게 느껴지는 닭고기가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도시에 온 즐거움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리처드는 어제 만난 수인족 여성이 한 제안을 고민해 보았다.
일일이 파란드나 타칸에게 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 선택까지 의존할 정도로 리처드는 어리지 않았다.
‘할 일도 없으니…….’
가서 제안을 듣는 정도는 어떠냐 싶었다. 리처드는 1번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 주변은 온갖 인종들로 붐볐다.
거대한 성벽 밑에 나 있는 성문은 위로 열려 있고, 완전히 무장한 경비병들이 배치되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의외로 들어가는 사람과는 달리 성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리처드는 성문 위에 설치된 망루와 큰 돌덩어리를 깎아서 끼워 맞춘 성벽에 감탄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파 속에서 어제 본 수인족 여성이 벽에 기대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리처드는 사람들을 헤치며 다가갔다.
“왔네, 인간?”
“일단 제안은 들어보려고.”
리처드는 천천히 다가갔다. 수인족 여성은 어제와는 달리 완전히 무장하고 있었다.
검은색 가죽으로 만든 가죽 갑옷과 손에는 손가락이 열려 있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부츠는 어제 신었던 간편한 부츠가 아닌, 한눈에 봐도 묵직해 보이는 은색의 부츠였다.
그에 비해 리처드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기본적인 가죽 갑옷이었다. 갑옷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특별한 몬스터의 가죽을 사용한 것도 아닌 단순히 가죽을 강화시켜서 만든 갑옷이었다.
당연히 수인족 여성의 갑옷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싸구려였다.
그리고 리처드의 무기는 롱 소드였다. 상단의 창고에는 호위들에게 임시적으로 무장을 제공하기 위해서 무기를 쌓아놓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임시로 빌린 것이었다. 리처드는 빠르게 도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고. 밖에서 이야기하기에는 시끄러우니까.”
“그러지.”
리처드는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비교적 조용했다. 그리고 리처드는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일행들은?”
“으음……. 젠장, 없어!”
“뭐라고?”
리처드는 황당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젠장, 나도 내가 의기양양하게 말해놓고서 이런 말 하기는 쪽팔린데, 이건 어느 정도 네 탓도 있다고.”
수인족 여성은 나무 궤짝 위에 걸터앉으며 투덜댔다.
“원래 파티의 대열에서 앞을 맡아서 방어를 하는 놈들이랑 중간에서 공격을 할 놈들이 다 나가 버렸으니 뒤에서 지원하겠다고 한 궁수랑 마법사도 떠나 버렸어. 젠장, 겁쟁이 같은 놈들.”
“음, 안타깝게 됐군. 그러면 나는 가볼게.”
리처드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이제 볼일이 없는 수인족 여성과 말할 이유는 없었다.
“잠깐만!”
재빨리 앞을 가로막으며 수인족 여성이 외쳤다.
“일단 우리 둘만으로 돌자고. 그러면서 호흡을 맞춘 다음에 더 추가로 구하면 돼!”
“내가 잘 모르긴 하지만, 던전이 둘이서 돌 만큼 그렇게 만만한 곳인가?”
리처드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당연히 3~4구역 이상 넘어가면 자살행위이긴 하지만, 1~2구역에서는 둘 정도면 충분해. 게다가 네가 약한 것도 아니고.”
“구역?”
“아, 너 던전이 뭔지도 제대로 모른다고 했지?”
수인족 여성은 이마를 짚으며 투덜거렸다.
“이걸 언제 쓸 만하게 만들어서 데리고 다니지…….”
“그러면 써먹을 수 있는 놈을 찾든가. 잘 있어라.”
“……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너 정도면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했어!”
곧바로 반응을 바꾸는 그녀를 보면서 리처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 충원을 하는 건 무리일 거야. 일단 던전을 공략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청 공고를 냈지만, 며칠은 걸리겠지. 그동안 가만히 있기는 싫으니 쉬운 곳에서 합을 맞추자는 거야. 어때?”
“좋은 생각 같군.”
리처드는 동의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이름도 모르는데. 나는 타르라다, 인간.”
“나는 리처드다. 마찬가지로 잘 부탁해.”
2장
제1성문을 지나치고 나서 밖으로 나온 지 30분쯤 지났을 때, 리처드는 멀리서 각종 허름한 노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주변으로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모험가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긴가?”
“그렇지.”
타르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일단 던전은 던전이다 보니 입구에서 통제를 한다. 도시에서 보낸 인원들이 입구에서 신원 확인을 하는 거지.”
“신원 확인이라니……. 어떻게?”
“너 신분증 없어?”
“아, 그걸로 하는 거였나?”
“당연하지. 이 도시 주변에서 신분증 없이는 활동하는 데 제약이 심한 거 몰라?”
타르라는 품속에서 목패를 꺼낸 다음 노점들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 입구로 다가갔다.
3m 정도 되는 언덕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 옆에 두꺼운 철문이 연결되어 있는데, 현재는 열려 있었다.
“신분증을 주십시오.”
성문에서 봤던 것처럼 던전의 입구에서는 경비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주변에 워낙 무장을 한 자들이 많다 보니 성문과는 달리 경비병들의 분위기도 날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터진다면 곧바로 대응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경비병은 목패를 내밀자 옆에 있는 둥근 모양의 적색 돌에 가져다 대었다. 붉은빛이 살짝 뿜어져 나오더니, 목패에 닿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타르라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통해 그들 사이를 통과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래도 주변을 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은 있었다. 윤곽을 훑어가며 리처드는 어둠에 적응하려 애썼다.
“그것보다, 저기서 신분은 왜 검사하는 거지?”
“범죄자 같은 경우에 도시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던전으로 도망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뭐하러 그런 짓을? 그냥 도망치면 안 되나?”
“마르트 시의 군인들을 무시하지 마. 모험가들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으니까. 던전으로 도망치면 경비들도 쫓지 않아. 왜냐하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거든. 2구역까지는 어느 정도 괜찮지만, 3구역 이상부터는 길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어.”
“아까도 그랬지만, 구역이라는 게 뭐지?”
타르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리처드가 아무것도 모르지만 가능성이 보였기에 키워서 파티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참으며 타르라는 말했다.
“던전을 내려가다 보면 갑자기 몬스터들이 바뀌는 곳이 있어. 그걸 편의상 구역이라고 하는 거야. 1~2구역은 이제 하도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그렇게 깊은 곳도 아니라서 구역의 지형도 대강 밝혀졌는데, 3구역부터는 갑자기 확 복잡해지거든. 그때부터는 파티가 아니라 단독으로 움직이면 자살행위지. 단체로 움직여야 해. 준비도 훨씬 더 많이 해야 하고.”
타르라는 짐에서 랜턴을 꺼내 흔들었다.
“1구역까지는 빛이 어느 정도 들어와서 괜찮을 거야. 어둡지만 볼 수는 있을 테니까. 2구역부터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보면 돼.”
타르라는 말을 마친 후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입구는 많은 모험가들로 웅성거렸지만, 둘은 빠르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몇 번 길이 갈라진 곳을 지나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리처드는 어렸을 때 들어갔던 동굴이 생각났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그리 넓지 않은 통로. 들어가다 보면 또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었다.
지금 던전도 그와 비슷했다.
어디서 빛이 들어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리처드는 앞으로 나아갔다. 축축한 공기가 콧속에 와 닿았다.
이윽고 멀리서 크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놀이다.”
“놀?”
리처드는 곧바로 타르라가 무슨 의미로 말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멀리 어둠 속에서 못생긴 개의 머리가 나타났다. 침을 흘리며 눈에서는 녹색 안광을 흘리고 있었다.
놀은 이 1구역에서도 대표적인 몬스터였다.
혼자, 아니면 두셋이서 짝을 이뤄서 돌아다니는 놀은 이족 보행을 하는 거대한 개처럼 생긴 몬스터였다.
키는 대체로 인간과 비슷하지만, 거대한 놈은 2m를 넘어갔다. 다행히 지금 둘의 눈앞에 있는 놀은 리처드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가까이 다가오자 더러운 털과 가죽의 색을 볼 수 있었다. 놀은 다른 생명을 발견하자 흉포한 비명을 내질렀다.
“캬르륵!”
“인간, 내가 앞을 맡는다. 너는 옆에서 빈틈을 노려!”
타르라는 곧바로 대응했다. 등에서 클레이모어를 뽑아 든 것이다. 어렴풋한 던전의 불빛 속에서도 타르라의 검은 눈부시게 빛났다.
타르라는 앞으로 달려들었다. 양손으로 클레이모어를 들고 빠른 발놀림으로 접근하는 타르라를 보고 놀이 다시 한 번 울부짖었다.
놀은 양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손에 난 날카로운 발톱으로 놀은 타르라에게 맞섰다.
쉭, 하고 거칠게 휘두르는 놀의 공격을 타르라는 머리를 흔드는 것만으로도 피했다. 적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러자 놀은 팔을 앞으로 뻗은 채로 빈틈이 드러난 상태가 되었다. 타르라는 허리를 회전시키며 클레이모어를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베어버렸다.
날카롭게 갈려진 클레이모어의 날이 본연의 무게와 타르라의 힘을 받아 그대로 놀의 몸을 갈랐다.
타르라는 육체를 가르는 느낌을 받으며 적이 즉사했다고 확신했다. 몸의 절반이 잘려 나간 상태에서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놀은 허우적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내가 딱히 할 게 없는데…….”
“놀은 혼자서는 딱히 무서운 게 아니야. 모이면 귀찮아지는 거지. 1구역에서 가장 많이 죽는 모험가들은 놀 한 마리를 만만히 보다 죽는 경우지. 그런 모험가들은 놀한테 둘러싸이면 당황하거든.”
리처드는 놀의 시체에 가까이 다가갔다. 벌거벗은 놀의 육체는 초라했다. 냄새나는 시체에서는 무언가 챙길 만한 것이 없어 보였다.
“마나석은 어떻게 챙기지?”
“뭐야, 마나석은 어떻게 알고 있네? 머리를 쪼개봐.”
리처드는 가지고 있는 롱 소드로 놀의 머리를 후려쳤다. 묵직한 소리가 나며 두개골이 쪼개졌다.
그러자 새끼손가락 한마디 정도 되는 마나석이 나왔다. 마나석은 검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운이 좋았군. 다 나오는 건 아니거든.”
“다 나오지 않다니?”
“밑으로 들어가면 거의 다 마나석이 나오지만, 1구역 정도에서는 안 나오는 경우도 많거든.”
타르라는 주머니를 하나 리처드에게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