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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로 찬 영혼
작가 : 은발늑대
작품등록일 :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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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반란002
작성일 : 17-11-22     조회 : 364     추천 : 0     분량 : 5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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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실로 들어오는 기다란 계단 위에 작은 빛줄기가 들어왔다. 햇빛을 등진 한 남자가 그곳에 서있었다.

  그가 천천히 내려온다. 탁, 탁, 탁. 무거운 걸음 걸이였으나 소리가 경쾌했다.

  그는 내려오면서 말했다.

  “물론 찾는다고 해서 전부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답을 찾아도 그 이면에 감춰진 진실은 늘 기대한 것과 다른 법.”

  “이봐,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지?”

  한껏 즐기고 있던 힐만이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자신만의 시간을 방해한 자를 향한 경계심이 점점 커졌다.

  반면 의문의 침입자는 다 내려와서 여유 있게 힐만 앞에 마주섰다. 온몸을 가리도록 로브를 입은 남자의 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목소리로만 듣기로는 아직 조금은 앳된 느낌이 났다.

  “하지만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 영영 모른 채로 살아가야 한다. 못된 진실이라도 알아야만 다음을 기약한다. 그걸 사람들은 희망이라고 부르지.”

  “당신 누구냐고!”

  힐만이 소리치자 로브 속 시선이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시끄럽군, 강간마.”

  그가 지껄이는 동안 힐만은 몰래 쇠몽둥이 하나를 집었다. 불쾌한 침입자가 누군지 몰라도 침입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침입자가 이곳까지 아무런 소리 없이 접근했다는 걸 망각했다.

  쉭! 서걱!

  “어……?”

  무형의 검기(劍氣)가 힐만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눈앞의 남자는 어느새 칼과 칼집을 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찔한 살기가 목을 벤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고, 검기가 끝에 다다른 건 리리스였다.

  그녀의 팔을 구속하던 쇠사슬이 깔끔하게 잘려나가며 청량한 소리가 났다. 리리스가 힘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서큐버스가 아직 몸을 지배하고 있는 중이라 완벽한 통제권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서큐버스든, 리리스든,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인식은 똑같았기에. 그녀는 곧 발을 묶었던 쇠사슬을 스스로 끊었다.

  파캉!

  “이런!”

  나머지 한쪽 눈도 붉게 물든 리리스와 마주한 힐만. 모든 걸 알았을 땐 너무 늦어버렸다. 노인의 검기를 뒤늦게 알았듯이, 리리스의 손이 목을 쥐었을 땐 완전히 무방비가 되었다.

  쾅!

  “크악!”

  말도 안 되는 악력으로 힐만을 벽까지 밀어붙였다. 등골이 벽돌들을 부수며 저릿한 아픔이 전신을 감쌌다. 10년 동안 묶여 있었다는 사람으로선 믿을 수 없는 힘과 스피드였다.

  “이, 이 년이!”

  처음에는 목에서 손을 떨어뜨리려고 했으나 잘 안 되었다. 어떻게든 살겠다고 발버둥 치다보니 옆에 철퇴가 있었다. 한 번도 쓴 적 없는 고문 도구라 상태가 깨끗했다.

  힐만의 팔이 조금씩 철퇴로 향했다. 리리스, 아니, 서큐버스는 전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10년간 자신을 굶기면서 신성력으로 장난친 상대를 향한 분노만이 넘쳤다.

  순수한 살의.

  매료로 상대의 정기를 빨아들일 생각도 없거니와 분노로 찬 복수를 위해 서큐버스는 없던 힘을 쥐어짰다.

  [감히 더러운 신의 종자 따위가 나를 능멸하고 가지고 놀려고 해?!]

  “크윽!”

  서큐버스가 이렇게까지 행동한 적은 처음이었다 말을 해본 적도 없고, 그저 남자를 탐내려고 한 게 지금까지의 전부였다.

  이제는 서큐버스의 내면이 되어버린 리리스도 이 광경을 모두 지켜봤다.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 자신도 힐만을 죽이고 싶어 했던 본능이 서큐버스와 일체화되면서 통제권이 완전히 넘어갔다.

  “곤란한 짓 하지 마라.”

  다시 남자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의 몸이 잔상을 남기듯 빠르게 움직이더니 한 번 더 검이 빛을 발했다. 그때 힐만의 손은 겨우 철퇴에 닿아 있었다.

  검의 궤적이 힐만의 손목을 그었다. 다음에는 리리스의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

  힐만은 잘렸다는 느낌을 받기도 전에 손 전체가 떨어지는 걸 봐야만 했다. 그러나 정작 리리스는 재빨리 몸을 빼서 피해냈다.

  “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축축한 공기를 타고 흘렀다. 피가 솟구치면서 힐만이 바닥에 엎어졌다.

  남자는 전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눈앞의 악마만을 주시했다.

  “엄청난 기운이군. 사악하기 그지없어. 하지만…….”

  남자에게는 서큐버스의 힘만이 아니라 미미하게나마 아직 리리스의 기운도 느낄 수 있었다. 어둡고 컴컴한 그곳에서 유일하게 하얀 빛을 내는 것. 리리스가 분명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하얀 빛은 어떻게든 태동하기 위해 애썼다. 비록 방금 전까지 서큐버스에게 몸과 정신을 온전히 맡겼던 모양이지만 벗어나려고 애쓰는 모습이 남자에게는 훤히 보였다.

  “이미 너는 희망을 보고 있군.”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대로 서큐버스에게 잡아먹히는 편이 훨씬 좋았을 거다. 그러나 10년 간 리리스는 포기할 수 없었다.

  언젠가 꼭 이곳을 살아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깊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자는 작은 빛에서 이런 그녀의 마음을 읽어냈다.

  “뭐, 상관없다.”

  “캬악!”

  더 이상 독백을 들을 수 없었던 서큐버스가 괴성과 함께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가시가 된 손톱이 남자의 형상을 찢었다. 남은 건 시체가 아니라 작은 천 조각이었다.

  이미 남자는 허공을 날아 서큐버스의 뒤로 돌아간 뒤였다.

  푸욱!

  이번에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피하기 위한 행동을 끝으로 노인은 그대로 멈췄다. 그런데도 리리스의 어깨에는 날카로운 것이 꿰뚫었다.

  동시에 리리스의 뒷목을 가볍게 쳐서 기절시켰다. 이내 그녀가 쓰러지면서 붉은 눈동자가 차츰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검게 물들었던 머리카락도 남자가 보았던 빛과 같은 색으로 변했다.

  “이익! 이 쥐새끼들이 어딜!!!”

  괴로움이 몸부림치던 힐만이 또 다시 덤볐으나 같은 결과를 맛봤다. 남자는 검집으로 힐만의 쇄골을 내려쳐 부셨다. 데굴데굴, 그가 힘없이 구른다.

  남자가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지만 오늘은 값싼 손목만 받아가도록 하마.”

  “너 이 새끼……!”

  “흥분은 명을 재촉할 뿐이다. 나가는 즉시 사람들을 불러올 테니 그때까지만 참도록.”

  남자는 자신이 입고 있던 망토를 리리스에게 둘러주고는 그녀를 끌어안아 잽싸게 감옥을 빠져나갔다. 사라지는 그들을 향해 힐만의 악소리만 맴돌았다.

 

 

 

 

 

 

  서큐버스가 완전히 몸을 지배해버리면서 리리스는 간만에 지친 마음을 쉴 수 있었다. 비록 캄캄한 어둠이었으나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이리도 행복한지 몰랐다.

  웅크린 몸이 따듯하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색무취의 공기가 싱그럽기까지 했다.

  그럴 만도 하지.

  고문을 당하며 본 풍경과 냄새들은 늘 끔찍했다. 익숙해졌다 싶어도 막상 들이닥치면 온몸이 거부감부터 들었다.

  그런 와중에 서큐버스는 계속해서 힐만을 탐하려고 했다. 이 녀석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상대는 신성력으로 무장한 이단심문관인데.

  매료 따윈 통하지 않는데다가 이미 10년 동안 당해오면서 정기를 빼앗지 못했거늘.

  하지만 이제 알았다.

  서큐버스는 힐만을 죽이고 싶었던 거였다. 성욕도, 식욕도, 정기도, 뭣도 상관없이. 자신과 자신의 숙주를 괴롭힌 그를 어떻게든 죽이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이는 리리스도 같은 심정이었다.

  ‘아아, 그래. 얼른 죽여. 그러면 더 편할 거 같아.’

  의문의 남자가 감옥을 쳐들어오면서 힐만을 죽일 기회가 생겼다. 리리스도 서큐버스와 같이 그를 죽이려고 했다. 서큐버스만의 의지가 아닌, 통합된 의식이 하나의 살의로 뭉쳤다.

  그때 남자가 다시 간섭했다. 힐만의 손목이 날아가고 서큐버스, 아니, 리리스를 제압했다.

  이후 꿈속에서 옛날 일들이 잘 그려진 수채화처럼 스쳐갔다.

  서큐버스임을 알았을 때, 서큐버스에게 빼앗긴 몸이 멋대로 남자를 탐하던 때,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으로 끌려갔을 때.

  있는 기억이라곤 이 세 가지가 끝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진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다. 대부분 리리스가 서큐버스로서 정기를 빼앗은 남자들이었다.

  그때마다 하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던 기억도 있다. 서큐버스의 영혼에게 빌고 빌어서 제발 사람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거듭 말했었지. 물론 들을 리가 없다.

  자기 손으로 죽어간 사람은 남자들뿐만이 아녔다. 방해하거나 그녀를 붙잡으려 했던 사람들도 더러 죽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서큐버스가 되고 2년 만에 힐만에게 붙잡히긴 했지만. 그 후로의 기억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감옥과 힐만에게 당하던 시간들.

  “헉! 헉…… 헉…….”

  거기까지 기억의 파편들이 올라오자 악몽을 꾼 사람처럼 리리스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동안 꽉 막힌 듯한 숨이 입을 통해 간신히 오고갔다. 전신이 식은땀으로 젖어서 축축했다. 덮고 있던 이불도 젖어서…….

  ‘이불?’

  이불이라니. 한 번도 덮어보지 못했던 매끄러운 감촉이 왜…….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리리스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은 침대 위에 있었고 바로 앞에는 나무틀로 만들어진 창을 통해 햇살이 쏟아졌다. 창가에는 작은 꽃이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널찍한 거실이 있었다.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으며 그 위로 테이블이, 그 위로는 누군가가 짜다간 만 털실이 굴러다녔다.

  “집……인가?”

  입 밖으로 말해놓고도 웃긴 의문이었다. 누가 봐도 가정집이었으니까.

  “일어났느냐.”

  때마침 현관문을 열고 한 노파가 들어왔다. 마른 체격에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할머니였다. 회색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은 한 곳에 둥글게 묶어서 둥근 이마와 뺨에 깊은 주름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는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그걸 리리스 옆에 있는 작은 탁자에 올려놨다. 안에는 빵과 과일, 육포, 먹을 것들이 가득했다.

  “먹으려무나.”

  사나운 인상과 달리 인자한 말투와 지긋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반면 리리스는 좀처럼 경계심을 풀지 못했다. 굳어버린 인상은 계속해서 노파를 주시했다. 시선을 느낀 노파는 그녀의 곁에 앉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혼란스럽겠지. 안다. 허나 시간이 없는 관계로 간단한 이야기만 해주마. 우선 내 이름은 비구루. 앞으로 널 돌볼 사람이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비구루는 빵과 육포를 먹기 좋게 찢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가지 목적을 갖고 너를 구했단다. 바로 반란이지.”

  “반……란?”

  비구루는 별달리 돌리는 말없이 바로 설명해줬다.

  현재 리리스가 있는 이곳은 분타그라시아스 제국이란 나라, 그녀가 태어났던 곳이었다.

  제국은 이 땅에서 가장 강한 군사 국가이자 감히 어느 나라도 넘보지 못할 강대국에 속했다.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가 덤벼도 이기지 못할 최강의 군사집단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통솔하는 황제와 황족들도 모두 하나 같이 엄청난 강자로 알려졌다.

  “허나 지금의 제국은 다르다. 부패하고 더러운 세력들이 나라를 좀 먹고 있지.”

  비구루에 설명에 따르면 최근 제국에서는 기득권의 횡포가 나날이 커지고 있단다. 황제라는 강한 권력을 등에 업은 귀족도 문제지만, 이를 방관하는 황제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이에 제국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반란을 도모하는 중이었다. 여기에 도움을 얻고자 리리스를 데려왔다는 것이 비구루의 설명이었다.

  “아직까지 무슨 말인지 모를게다. 하지만 알 필요 없다. 그저 우리를 도와줄지 말지가 중요하단다. 만약 우리를 도와주면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마.”

  필요한 것…….

  리리스는 한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제국이니, 반란이니 그딴 단어보다도 황홀한 표현거리였다. 마치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신의 달콤한 속삭임 같아서 듣기 좋았다.

  “뭘 믿고요?”

  매력적인 제안이긴 해도 먼저 의심부터 튀어나왔다. 비구루는 먹거리를 작은 접시에 옮겨 담아 줬다.

  “우리를 믿지 못해도 상관없다. 우리도 널 믿지 못하니까. 그러나 너를 쓸모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싸우는 방법을 가르칠 거다. 먹을 것과 잘 곳도 제공해주마. 바라는 바를 말하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마. 만에 하나 지금이라도 도망치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굉장한 방관주의네요.”

  수상쩍은 제안만 가득했으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들이라는 존재가 감옥에서 구해줬고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무런 보증이 없기로는 서로가 똑같은 입장이기에 딱히 거부감이 안 들었다.

  “반란을 도와주겠어요.”

  “…….”

  예상보다 빠른 결정에 비구루가 놀랄 틈도 없이. 리리스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요구했다.

  “대신 자유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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