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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로 찬 영혼
작가 : 은발늑대
작품등록일 :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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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반란004
작성일 : 17-11-24     조회 : 321     추천 : 0     분량 : 6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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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뒤에서 들려온 그 소리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가면의 남자가 이쪽을 바라봤다.

  “류? 당신이 왜 여기 있죠?”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어도 그가 내뿜는 특유의 차가운 기운은 확연했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안 그래도 암살자로서 예민해진 감각이니 보이지 않아도 확신을 가졌다.

  그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평소에 끼고 다니던 가면이 어렴풋한 달빛 아래 드러났다.

  “제 5황자 폰 프란시스 헤테카와 제 3황녀 쥴 프란시스 헤테카가 도주했다.”

  “예? 그, 그럴 리가요! 분명 제 손으로 죽였는데!”

  “뿐만 아니라 몇몇 다른 황족들에게도 이미 정보가 노출되었더군. 수도성 밖에서 귀족들의 사병이 몰려오고 있다.”

  “함정이군요! 어쩐지 이상 했어……!”

  그제야 상황을 알아챈 리리스가 입을 떡 벌렸다.

  이래서는 반란이 실패로 돌아갈 판이었다. 황제가 죽었더라도 살아남은 황족이 있다면 그들을 중심으로 다시 귀족이 뭉칠 가능성이 높았다.

  “어떡하죠, 이젠?”

  “나머지 황족들은 내가 쫓을 거다. 그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

  “저는 뭘 하죠?”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리리스의 목소리도 덩달아 급해졌다. 정작 류는 여유를 부리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접근한 그가 리리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지난 두 달간 너를 가르치며 솔직히 놀랐다.”

  “류? 가, 갑자기 무슨…….”

  “검이라곤 일절 잡아본 적 없는 네가 이렇게 황성 내에 홀로 잠입하는 임무를 맡게 될 정도로 강해질 줄이야. 나는 그저 전선에 세우고 그만둘 계획이었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어, 얼른 황족들을 잡아야―”

  “솔직한 감상이다. 순수하게 강한 네가 아깝다는 표현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무슨― 읏!”

  캉!

  눈 깜짝할 사이 류의 검이 움직였다. 목표는 리리스의 목. 암살용 단검을 들고 있던 리리스가 재빠르게 방어했으나 리치 차이가 심해서 반격이 불가능했다.

  아무리 강해졌어도 상대는 가르침을 준 스승. 고작 두 달 동안 검을 배운 사람이 이길 상대가 아녔다.

  카캉! 카캉! 카카캉!

  순식간에 전광석화 같은 검격이 수십 번 오고갔다. 류는 훨씬 유연한 검술을 펼치면서 리리스의 검격 하나하나를 물리쳤다. 도저히 리리스가 상대할 수가 없는 힘과 스피드였다.

  왜 류가 싸움을 걸었는지 생각할 틈 따윈 없었다. 방금 전까지 피어올랐던 의문들도 잠들었다. 그저 여기서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윽!”

  그러나 결국 힘만 뻗치던 검격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그으면서 약점을 노출시켰다.

  피피픽!

  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혈을 짚었다.

  모든 게 허무하리만치 어이없이 끝났다. 리리스의 몸뚱어리가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지자 얼굴이 땅에 닿기 전에 류가 그녀를 부축해 끌어안았다.

  “다행히 다친 곳 없이 멀쩡하군.”

  “그냥 기절시키면 되는 것을 굳이 싸우다니. 실력 가늠이라도 하려고 했나, 류?”

  걸걸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이 류를 불렀다. 어둠 속에 숨어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비구루가 물안개처럼 흐릿한 형상으로 튀어나왔다. 점점 선명해진 형체는 류 앞에 멈춰 섰다.

  그때 성 밖이 시끄러워졌다. 아마 반란군이 쳐들어 왔으리라.

  “그녀는 앞으로 도망자로서 살아야 한다. 실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금방 죽겠지.”

  “그래서 판단은?”

  “실력으로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감정이 걸림돌이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

  “본인을 유별나게 믿었다고는 생각 안 하나?”

  “……그보다 비구루, 어째서 그대가 여기 있는 거지. 지금은 나타날 시기가 아닐 텐데.”

  “궁금해서 말이지.”

  “무엇이 말인가.”

  비구루는 안쓰러운 시선의 끝에 리리스를 두었다.

  “과연 리리스를 살려둘지.”

  “바보 같은 호기심이군. 설마 내가 이 여자를 죽일 거라 생각했나?”

  “반란이 성공하고 나서 반란군의 중심에 악마가 있다는 얘기가 나돌면 곤란하니까. 악마의 도움을 받은 반란을 누가 인정하겠어.”

  “그딴 건 상관없다. 어차피 황족이 도망친 시점에서 반란은 실패다. 그리고 설령 악마가 아니라 마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 나라를 엎어야 했다.”

  “빌리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거 아니었나?”

  “…….”

  “이런, 정곡을 찔렀나?”

  비구루는 쿡쿡 웃음을 참았다. 그런 그녀를 류가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비구루, 그대는 누구의 편인가.”

  “나 같은 도둑놈에게 편을 묻나? 좋아, 대답해주지. 나는 제국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류가 리리스를 비구루에게 넘겨줬다. 비구루의 진짜 역할은 지금부터였다. 이대로 리리스를 데리고 멀리 도망치는 것. 그리고 그녀를 보살펴 주는 것.

  “반드시 그녀와의 약속을 지켜라. 나 또한 약속을 지키는데 일조할 테니.”

  강압적인 태도에 비구루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이더니 조용히 어둠 속으로 몸을 녹였다.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모든 건 계획대로…….”

  “그래, 계획대로…….”

  드디어 적막이 찾아왔다. 무뎠던 코끝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에 눈물이 가득 고이면서 시야가 흐릿했다.

  그러나 지체할 틈은 없었다. 류는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얼른 도망간 황족들을 죽이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반란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패배의 원인으로는 중간에 새어나간 정보 유출이 가장 컸다.

  다행히 반란군이 대부분의 황족들을 추격해서 죽였지만, 폰 프란시스 헤테카와 그의 오누이 동생 쥴 프란시스 헤테카가 도주에 성공했다. 그들은 지방 귀족들과 결탁, 흩어진 병사와 귀족들의 사병, 기사단을 집결해 수도성을 점령한 반란군을 공격했다.

  그나마 황족들이 도망치거나 다른 귀족들의 반격쯤은 반란군의 예상 시나리오에 있었다. 문제는 폰의 존재였다. 황족의 혈통답게 그는 말도 안 되는 검술 실력을 뽐냈다. 그의 검이 한 번씩 빛을 내면 10명씩 피를 봤다.

  오합지졸에 가까운 반란군이 폰과 잘 조직된 군대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했다. 반격이 시작되고 며칠도 안 돼서 반란군들이 흩어졌다.

  암살이 주요 임무였던 리리스는 비구루의 손에 의해 수도성을 빠져나왔다. 도주를 도왔던 류는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약속과 달리 리리스는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다. 반란자 낙인이 찍혔으니 별 수 없이 타국으로 도망가야 했다.

  오히려 그녀는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바랐던 건 반란의 성공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구속을 풀고 자유를 얻는 것이기에. 제국의 감시망을 피해 여러 국가를 전전하며 도망치는 삶은 고달프긴 했어도 나쁘다고 할 건 아녔다.

  아니, 좋았지.

  이렇게 직접 발을 움직여 걷는다는 자체만으로도 리리스는 행복했다.

  하지만 10년 지나고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우욱, 추워. 여긴 여전하네.”

  백발이었던 그녀는 검게 색으로 물들인 채 오랜만에 제국의 국경에 다다랐다. 시간이 꽤 지났으나 그녀는 예전 그대로였다. 이미 3살에 성장기를 마쳐버렸으니 당연했다.

  다만 얼굴이 많이 바뀌었다.

  “푸석거려…….”

  며칠 동안 북부 국경을 따라 움직이다보니 건조한 날씨 탓에 피부가 온통 거칠었다. 이럴 줄 알고 신국에서 크림을 사갖고 왔지만 전혀 무소용이었다.

  빌어먹을 장사치들. 어쩐지 싸게 팔더라.

  하지만 날씨보다 더 짜증나는 건 인피면구였다.

  바다 건네 동방의 국가에서만 판다는 이 물건을 구하느라 리리스는 지난 몇 달을 온갖 상인들을 찾아다녔다. 제국에 입국하기 위해서였다. 반란군으로서 도망친 리리스의 얼굴을 버리고 새 얼굴을 갖기 위해.

  착용자의 얼굴을 감쪽같이 바꿔준다는 소문에 반신반의하면서 겨우 구했지만 좀처럼 익숙해지기가 어려웠다. 땀이 찰줄 알았는데 찬바람이 그대로 닿는 기분도 영 별로였다.

  무엇보다 예쁘지 않다.

  일부러 못 생긴 걸 골랐지만, 작은 흉터나 잡티가 많아 보여서 더 눈에 띄는 인상이 되어버렸다. 누가 보면 동네 건달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줄은 언제 줄어드는 거야?’

  클레멘 신국과 제국의 국경 지대는 최근 닥친 한파에도 불구하고 제국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폐쇄적인 국가였던 제국이 지난 몇 년 간 개방과 교류를 활발히 하면서 변한 모습이었다.

  국경 수비대 앞에 늘어진 줄을 보고 있자니 리리스는 새삼 세월의 변화를 느꼈다. 자신의 외모보다도 변해버린 사회의 모습은 훨씬 피부에 와 닿았다.

  그때 옆에서 교대를 기다리는 경비병들의 대화가 들렸다. 그들은 화톳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수다를 나누면서 조금이나마 한기를 가시게 하려고 발을 굴렀다.

  “그거 들었나? 엊그제 또 죽었다더군.”

  “반란군 놈들 말인가?”

  “아니, 귀족들 말일세.”

  “또?”

  한 경비병의 말에 다른 이들이 놀라며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황제 폐하한테 미움 받을 짓을 했다는 모양이야.”

  “미움이라니. 황제 폐하 욕이라도 했다던가?”

  “바보 같은 소리. 그런 걸로 치면 제국에서 살아남은 자가 없을 걸세. 안 그래도 폭군이라고 다들 그러는 마당에……. 아무튼 뭐, 듣기로는 황제께 바쳐야 할 공물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아무 이유나 갖다 붙였겠지만.”

  이 얘기는 타국을 떠돌아 다녔던 리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를 ‘피의 숙청’이라고 했다.

  폰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처음에는 반란에 가담했던 자들을, 그 다음에는 황궁파 귀족들을 차례로 죽이거나 신분을 박탈시켰다. 없던 명분까지 만들어서 죽인다고 해서 ‘만들어진 죽음’이라고도 불렸다.

  “그거 이해가 안 되는군. 황궁파 귀족은 황제의 편 아닌가?”

  “그러니까 폭군 소리를 듣는 거지. 맘에 안 들면 자기편도 가차 없이 죽이는 사악함!”

  경비병들의 잡담을 듣고 있다 보니 대충 제국의 정세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폰의 권력이 엄청 강하다는 것, 그의 권력이 너무 강해서 폭군이라 불리는 점.

  ‘듣다 보니 첩첩산중이네.’

  아무래도 ‘하려는 일’이 그리 쉽게 되진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물론 그녀도 충분히 강했다. 폰과 쥴이 덤벼도 이길 자신이 있을 만큼 리리스 또한 지난 세월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

  이에는 그녀의 영혼에 자리 잡은 악마 서큐버스의 영혼이 한몫했다.

  후우, 하고 깊은 숨을 몰아쉬며 가슴 한복판에 있는 마나 코어를 쓰다듬어 본다. 형체가 없는 마나 코어지만 그 안에는 분명 검은 영혼이 꿈틀거렸다. 언제든 리리스를 잡아먹기 위해 호시탐탐 틈을 노렸다.

  ‘빌어먹을 악마 새끼…….’

  평소 욕을 입에 담고 살진 않지만 서큐버스의 영혼을 인지할 때마다 불쾌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어쩌다가 서큐버스가 영혼과 마나에 잠식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숨어 있던 건지, 아니면 3살이 되던 그 시기에 우연한 사건으로 접촉하게 됐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확실한 건 서큐버스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리리스도 강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큐버스가 매료를 더욱 발산하려고 하자 리리스도 같이 맞서기 위해 힘을 길러야만 했다.

  “이제는 이것도 바뀔 거야.”

  그러려고 돌아온 제국이다. 비록 몸을 숨기고 도망쳐야 하겠지만 지난 10년 간 도가 튼 짓거리였다. 그런 불편함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를 바꿀 수 있느냐다.

  방법이 이것밖에 없을까, 라는 의문도 수없이 했으나.

  이것도 의미 있나.

  이게 안 되면 그때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

  그보다 더 기대되는 건…….

  “이봐요, 아가씨.”

  한참 망상에 빠져있는 사이 리리스의 입국 심사 차례가 왔다. 경비병은 멍하니 있는 아가씨를 심드렁한 얼굴로 쳐다봤다.

  “아, 죄송해요. 여기요.”

  리리스는 로브 속에서 제국의 신분증을 꺼내 보여줬다. 물론 가짜는 아니었다. 진짜 같은 가짜가 더 진짜 같다고 하지 않는가.

  신분증 자체는 진짜여도 신분은 가짜였다. 참고로 현재 그녀의 신분에는 평민이라 적혀 있었다.

  “릴림?”

  “네.”

  “특이한 이름이군. 성도 없고.”

  “아하하, 집이 좀 가난해서요.”

  신분증을 보는 경비병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신분증과 그녀의 얼굴을 쉼 없이 비교하면서 계속 질문을 던졌다.

  “신국에는 왜 갔다 오셨습니까?”

  “신국뿐만 아니라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거든요.”

  “여자 혼자?”

  “네, 뭐…….”

  거짓말에 별 다른 재주가 없던 지라 리리스는 전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신국에 갔던 것도 사실이고, 여행 중에 들른 것도 맞으니까. 릴림이라는 이름도 리리스를 줄여서 부르는 애칭이었다.

  ‘너무 솔직한가. 에잇, 몰라.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돼.’

  그때 성벽 입구에 붙은 벽보가 눈에 띄었다. 각종 공고문부터 지명수배단지까지. 하필 그곳에 리리스의 얼굴이 있었다.

  인피면구로 얼굴을 바꾸긴 했지만 불편해서 일부만 바꿨던 지라 눈이나 이목구비는 리리스 일 때와 같았다. 결정적인 머리카락 색을 바꿔서 못 알아볼 가능성도 있지만…….

  한참을 번갈아 보던 경비병은 신분증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귀향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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