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소리!”
얘기를 듣자마자 비구루는 역정을 내었다. 온화하던 그녀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엄청난 살기를 뿜었다.
“혈료라니! 기껏 생각했다는 방법이 그것뿐이더냐! 그게 무언지나 알고 떠들어?!”
“알아요, 할머니. 제국의 황족들이 자신들의 우수한 마나코어를 대대로 유지하기 위해 만든 성배죠.”
제국의 역대 황제들과 황족들은 모두가 검에 능했다. 단순히 검을 잘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마나 코어의 재능부터 신체적 조건까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능력을 지닌 혈통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제국의 시작이었던 황제가 신물(神物)인 드래곤을 물리쳤다는 역사 기록이 남을 정도니까.
그들이 건국 이래로 강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혈료(血料)다.
초대 황제의 피와 드래곤의 피를 섞어 만들어낸 신비의 음료. 마시기만 하면 마나 코어를 변형시켜 아무리 마나에 재능이 없더라도 단번에 최강자로 만들어준다고 알려져 있다.
“그걸 알면서도 탐낸단 말이냐! 그건…… 그건…….”
“영혼은 곧 마나라고 하셨죠. 마나는 곧 영혼이고요.”
당혹감에 말끝을 흐리는 비구루의 손을 맞잡으며 리리스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녀는 절박했다.
“제 영혼과 마나 코어의 절반은 서큐버스가 차지하고 있어요. 그럼 이 녀석을 쫓아내려면 마나 코어를 버리던가, 아니면 마나의 성질을 바꾸는 수밖에 없죠.”
“이론만 그렇지, 장담할 수 없어.”
“하지만 할머니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시잖아요.”
“…….”
비구루도 생각해보지 않은 방법은 아녔다. 남자의 정기를 양분 삼아 사는 서큐버스는 정기가 부족하면 리리스의 마나를 양분 삼아 버텼다. 그러면서 마나 코어에 아예 자리를 잡아버리면서 리리스를 숙주로 삼고 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 마나를 아예 바꾼다면, 서큐버스가 있을 수 없도록 마나 코어를 부쉈다가 새로이 형성한다면, 리리스의 말대로 서큐버스를 쫓아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혈료가 그런 역할로는 충분했다. 인간의 마나 코어를 부수고 초대 황제와 드래곤의 마나로 바꾸는 물건이니까.
“서큐버스는 쫓아낼 수 있겠지. 하지만 혈료를 구하려면 황성으로 들어가야 된다. 황성 내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선 1급 길드원들이 필요한 거고. 그래서 묻는 거겠지?”
리리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혈료는 수도성, 그 중에서도 황족들이 사는 황성 내부 어딘가에 있었다. 달리 말해 혈료를 구하기 위해 리리스는 자신을 쫓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위험부담에 크다. 허나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간절하기도 했고.
“하나만 더 묻자꾸나. 왜 다른 1급 길드원들이냐. 정 궁금하면 할미한테도 물어도 좋은 것을.”
비구루는 의아했다. 자신도 1급 길드원인데 왜 굳이 다른 길드원들을 찾는 걸까.
“할머니는 정이 너무 많으시잖아요.”
“…….”
“알아도 안 가르쳐 주실 것 같았거든요. 아니면 또 자기가 가겠다고 하실 까봐. 그래서 혈료 얘긴 아예 안 하려고 했는데……. 막상 만나고 나니까 안 할 수가 없겠네요.”
“쓸데없는 짓을…….”
혀를 차며 비구루는 자신을 바라보는 따스한 눈동자를 매정하게 모른 척했다.
반란군에 리리스가 가담했을 당시의 나이는 고작 만 14세였다. 너무나도 어렸던 그녀에게 황족 암살 임무까지 떠맡겨야 했던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비구루는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여건이 만만치 않았다.
제국민과 탈영한 군사, 기사들이 모인 반란군에서 황족 암살 임무를 맡을 실력자가 없었다. 그렇다고 황족 암살을 하지 않고 정면으로 쳐들어가서는 승산이 제로였다.
반란의 목적이 권력을 밀어내고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것이니, 최고의 암살자에게 암살 임무를 맡기는 건 당연했다.
그게 하필 14살짜리 소녀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만.
정말이지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가 없다.
악마의 영혼이 깃든 것도 모자라 자유를 대가로 살육을 해야 했던 리리스. 손녀뻘 되는 그녀가 너무나 안타까워서 비구루는 악마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데도 기꺼이 그녀를 거둬 살펴줬다.
어지간하면 리리스가 험한 일을 하지 않길 바랐다.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그녀가 직접 나서서 도와준 적도 여럿 있었다. 결과적으로 황족 암살은 리리스가 맡았지만…….
“……기다려 보거라.”
비구루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작은 봉투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낡고 닳은 편지 봉투였지만 촛농으로 봉인된 인장에는 레드 디팟을 상징하는 주전자 문양이 선명했다.
“맘 같으면 내가 직접 나서고 싶지만 허리가 아파서 이젠 뛰어다니지도 못해. 하려면 네가 직접해야 된다.”
“할머니…….”
“굽은 내 허리만큼 세월이 지나면서 수도성도 많이 바뀌었다. 황성도 마찬가지고. 때문에 나도 그 내부 사정을 알진 못해. 하지만 수도성에서 활동하는 놈들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 이건 그 놈들을 만나게 해줄 추천서다.”
“할머니!”
건네준 추천서는 받지도 않고 기쁜 마음에 리리스는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비구루는 숨이 막힌다며 리리스의 등을 패듯이 두들겼다.
“이익! 떨어져라! 나도 사사로운 정만 아니었으면 이딴 일 안 도와줬어!”
“그러니까 감사해요! 이 은혜 꼭 잊지 않을 게요!”
격렬한 감사 인사에 곤란해 하는 비구루는 간신히 리리스를 떨어뜨리고는 봉투 하나를 더 주었다. 이번 건 아무런 흔적이나 인장이 없는 평범한 봉투였다.
“혹시 모르니까 이것도 가져가려무나.”
“이게 뭔데요?”
“다른 길드와 거래할 수 있는 차용증이다. 어지간한 대형 길드라면 이걸로 어지간한 의뢰는 다 받아 줄게다. 안 된다고 잡아떼면 레드 디팟이라고 하면 돼. 그렇다고 막 쓰진 마라. 받아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니.”
“별로 쓸 일이 없을 거 같은데.”
“그러니까 혹시 모르면 사용하라고. 그리고 하나 더. ‘적안의 마녀’를 조심해라.”
“쥴, 말이에요?”
황제의 이복형제이자 오누이인 쥴 프란시스 헤테카는 특이하게도 검이 아닌 마법에 관심이 많은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적안의 마녀라는 별명도 붉은 눈을 가진 마법사라고 해서 붙었다.
“황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긴 해도 레드 디팟 내부에서는 ‘현자’로 분류한다.”
“현자요?!”
리리스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현자라니. 다른 곳도 아닌 제국에서!
오랫동안 제국은 마법과 인연이 없었다. 왜냐하면 검으로도 충분히 강했거니와 제국에서 출세를 하려면 마법보단 검을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황실에서 정책적으로도 마법에 대한 연구나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현자’는 아예 꿈도 못 꿨다.
“그래, 현자. 심지어 단순한 현자가 아니지. 대륙에서는 8서클 이상 익힌 마법사를 현자라고 하지만, 황녀는 10서클 마법까지 익혔다는 정보가 있다.”
예상치 못한 복병에 리리스의 입이 벌어졌다. 어쩌면 황제보다 더 까다로울지 모르는 존재가 황제 옆에 있다니.
평범하게 생각하면 칼이 무구를 쓰는 사람보다 마법사가 훨씬 강력하다. 이걸 무시하고도 강한 기사들을 배출한 국가가 제국이었고.
그런데 현자이다 못해 10서클 마법사가 있다고 한다.
“그거 뻥이죠?”
“예끼! 레드 디팟의 정보력을 거짓말이라고 하는 게냐!”
“시, 십 서클은 말이 안 되잖아요! 현재 현자들 중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도 9서클이라 들었는데……!”
“9서클이든 10서클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황제의 최측근에 또 다른 괴물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황제가 아무리 강해도 리리스는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와 비슷한, 어쩌면 훨씬 강한 존재가 그의 옆에 있다면 이건 완전히 얘기가 달랐다.
물론 리리스의 목표는 그들의 암살이 아닌 혈료 훔치기다. 황제와 황녀를 직접 상대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해선 안 됐다.
“둘을 상대했다가 이긴다 쳐도 몸 성히 빠져나오긴 무리일거다.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황제나 황녀와 부딪친다면 바로 도망쳐야 한다. 알겠느냐?”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의욕이 확 사라지네요.”
“하지만 걸 거 아니냐.”
비구루는 어떤 위험 앞에서도 리리스는 자기 할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늘 그래왔으니까. 아무리 악마에게 괴롭힘을 받더라도 리리스는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관철했다.
여지없이 리리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죠.”
리리스는 품속에 추천서를 넣고 곧장 떠날 준비를 했다. 제국은 워낙 넓어서 수도성까지 가려면 앞으로도 일주일은 넉넉잡고 움직여야 했다.
비구루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명수배자가 한곳에 머물면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얼른 떠나라고 재촉했다. 오히려 이런 비구루의 모습에 리리스가 더 아쉬웠지만.
떠나기 전 비구루는 필요한 식량과 여분의 돈, 말 한 필을 직접 준비해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에 올라탄 리리스에게 파란 액체가 담긴 유리병 하나를 건넸다.
“세례를 받은 포션이다. 좋은 신관에게 받은 거니 효과는 확실할 테다.”
“이건 왜요?”
“서큐버스가 강해졌다면서. 그럼 신성력으로라도 억눌러야지 어떡하려고.”
“그랬다간 저도 위험해지는데요?”
“예끼, 이 년아! 그러니까 위험할 때 소량만 써! 멍청하게 다 마시지 말고!”
악마의 영혼 탓인지 리리스 본인도 신성력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역효과를 보였다. 몇 번 치료 차원에서 신관을 찾아갔다가 오히려 내장이 뒤틀리고 몸이 망가졌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녔다.
‘그렇긴 해도 확실히 서큐버스를 제어하는데 효과가 있지.’
“감사해요. 진짜 진심으로.”
“조심해라. 네 년 실력이면 황성 침입은 우습겠지만 예전의 제국이 아니야. 기사들도 몇 배는 강해졌고 황제나 황녀는 두 말 할 것도 없어.”
“알고 있어요.”
“말만 쉽게 하지 말고! 들어가기 전에 준비 단단히 하고 가!”
리리스의 능력이라면 분명 혈료의 위치를 알아내기만 해도 훔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서큐버스를 제어할 정도로 강해졌다면 충분하고도 남겠지.
그럼에도 노파심에, 혹은 괜한 부모 같은 마음에 비구루는 계속해서 당부하고 당부했다. 똑같은 소리였지만 리리스도 이해하고 전부 들어줬다.
그렇게 한참 동안 짧은 만남과 기나긴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야 리리스는 떠날 수 있었다.
“아, 맞다. 정작 중요한 걸 못 물어봤네요.”
“뭘 말이냐.”
“류, 류 페이퍼. 그 남자는 어떻게 됐나요?”
비구루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평소의 낮은 톤으로 돌아갔다. 설마 아직도 그를 기억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사람을 멀리하던 리리스가 가장 따랐던 사람이 류였다. 정작 먹고 재워주고 했던 비구루보다도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거나 상담을 주고받는 일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알려줄 진실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죽었다.”
“예?”
리리스는 잘못들은 줄 알고 되물었으나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반란군이 도망치는 걸 돕다가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