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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로 찬 영혼
작가 : 은발늑대
작품등록일 :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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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도망자004
작성일 : 17-11-29     조회 : 308     추천 : 0     분량 : 5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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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란 리리스는 황급히 팔을 들어 목숨을 노리는 날카로운 날을 막았다.

  캉!

  팔뚝으로 검을 막았다. 검의 주인은 쓰러졌을 거라 생각했던 남자들.

  그들은 얼굴의 상처 하나 없이 일어나서 검을 휘둘렀다. 그걸 리리스는 맨손으로, 무기도 아닌 피부로 받아쳤다.

  남자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녀의 팔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마나가 보였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로 보이는 여자애가 마나를 쓰는 것도 모자라서 눈에 보일 정도로 색이 진한 마나를 내뿜다니.

  단순히 마나를 응용하는 걸 떠나서 실체화 하고 색이 선명한 건 어지간한 실력자만 가능했다.

  “말도 안 되는……!”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라니까!”

  쿵!

  막지 않은 팔이 허공에 정권을 찔렀다. 남자들에게 닿지 않았지만 뿜어져 나오는 마나만으로 그들을 물러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앞에 있던 남자가 허공을 날아 뒤에 있던 남자에 부딪치며 바닥에 엎어졌다.

  데미지는 하나도 없었다. 기껏해야 마나를 발산해서 기압을 이용한 충격을 줬을 뿐.

  쉽게 말해 충격파였다.

  리리스는 간단하게 해냈지만 남자들은 잠깐 사이에 거대한 차이를 느꼈다. 분명 자기들도 레드 디팟을 지키는 일원으로서 실력자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단 몇 합에 제압당했다.

  제압은 없었지만, 행동불능이 되었다.

  압도됐다.

  “크윽!”

  촤아아악!

  한참 동안 바닥을 미끄러지고 나서야 남자들이 멈췄다. 그들은 맘만 먹으면 다시 리리스에게 덤빌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잘못됐다.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온 힘과 살기는 자신들이 당해낼 것이 아녔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계적으로 일어나서 다시 전투 자세를 잡았다. 리리스는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하아, 이 이상 싸우면 다치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상관없다. 우리의 임무는 수상한 자를 대공에게 보내지 않는 것. 죽는 한이 있어도 우린 이곳을 지켜야 한다.”

  뭔가 좀 이상한데.

  잠깐의 대화에서 리리스는 위화감을 받았다. 대공에게 보내지 않는다고? 그녀가 아는 대공은 위치나 장소를 가리켰다.

  사람이 아니라.

  근데 이들은 대공을 사람처럼 언급했다. 일부러 대공이라는 존재를 감추려고 그러는 건가? 하지만 이미 대공이라 불리는 레드 디팟의 위치가 눈앞에 있는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을 터.

  화악!

  그 사이 남자들이 다시 덤볐다. 이제는 인정사정 봐줄 수가 없었다. 리리스가 손에 마나를 집중시키자 색이 한층 더 진해졌다. 검날의 형태를 만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살인은 사양이다. 차라리 주먹으로 흠씬 두들겨 패서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지.

  “무슨 소란이야?”

  남자들이 코앞에 달려든 찰나 굳게 닫혀 있던 레드 디팟의 문이 열렸다. 이로 인해 달려오던 남자들은 열린 문에 처박히는 우스운 꼴을 선보였다. 정작 문을 연 사람은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뭐야, 너희들 왜 그러고 있어?”

  이제 겨우 10대로 보이는 남자애가 문 너머 쓰러진 남자들에게 물었다.

  아니, 여자애인가.

  워낙 어려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안 되는 어린애였다. 갈색 머리카락이 여성들이 하는 단발머리에 가까워서 더욱 분간이 안 갔다. 앳된 얼굴에는 아직 빠지지 않은 젖살이 오동통 올라와 있고, 작은 입술이 꼬물거리며 움직였다.

  “그, 그게…….”

  “시끄러워서 나와 봤더니 얼빠진 얼굴로 자빠져 있고. 그리고 이 여잔 누구야?”

  신경질적인 목소리에서 남자임이 확실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리리스는 한편으론 대단한 소년임을 직감했다.

  마나를 두른 주먹과 발길질을 맞고도 버텼던 남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리리스에게 달려오고 있었고 소년은 실수로 문을 열어 그들을 막았다.

  중요한 건 충격이 있었을 소년이 멀쩡했다. 뒤로 밀려나거나 인상 찌푸리는 것 하나 없이 소년은 여유를 부렸다. 대단한 실력자임이 확실했다.

  “잠깐, 당신 설마…….”

  “아, 저는―”

  “아냐, 말하지 마. 여기 온 사람이면 의뢰인이겠지. 굳이 자기소개를 할 필요는 없어.”

  소년은 남자들을 보다 바닥에 있던 봉투로 눈을 돌렸다. 주워서 확인 해보더니 소년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그는 조곤조곤 남자들을 다그쳤다.

  “이런 멍청한 놈들. 레드 디팟 인장이 떡하니 있는 봉투를 들고 온 사람을 해치려 한 거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한 남자들이 입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소년은 이미 들을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안 봐도 무슨 상황인지 다 보여. 나 원 참, 아무나 들여보내 말라고 해도 그렇지 추천서를 바닥에 버리는 멍청이가 어디 있냐?”

  “하지만 추천서가 가짜일 수도 있잖습니까!”

  “가짜? 레드 디팟의 인장을 가짜로 막 쓰는 간 큰 놈이 있다는 거냐? 세상에 어떤 죽고 싶은 놈이 그랬는지 데려와 봐라.”

  “대, 대공!”

  “시끄러. 의뢰인이 여기까지 왔으면 의뢰를 받을지 말지는 내가 정해. 알아들었어?”

  “예, 옙…….”

  “알아들었으면 얼른 썩 꺼져.”

  조용하면서도 거친 언행에 남자들은 꼼짝도 못하고 노인이 사라졌던 골목으로 달아났다. 소년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맞았다.

  “죄송합니다. 힘만 세고 머리는 나쁜 놈들이라 의뢰인에게 실례를 범했군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어쩌다보니 리리스도 소년에게 존댓말을 하는 형세가 되었다. 아무래도 소년의 직책이 높아 보이기도 하고 더 이상 트러블을 만들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절대 당황해서 그런 건 아니라고.

  “이거 참, 추천서를 받아오신 분인데. 어디보자…….”

  소년은 젖은 봉투를 조심히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꽤나 두툼한 종이 뭉치가 딸려 나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종이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혹여 물에 잉크가 번진 건 아닐까 했지만 번진 흔적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

  리리스는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비구루가 내용을 까먹은 모양이었다.

  “흠, 그렇군요.”

  소년은 여유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종이 뭉치를 세었다. 총 12장, 그 중 작은 종이는 2장, 나머지는 봉투에 맞는 크기였다.

  “비구루님과 친분이 꽤나 깊은가 봅니다.”

  “예?”

  “뭘 놀라십니까. 이거 비구루님의 추천서잖습니까.”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리리스와 달리 소년은 당연하다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본래 레드 디팟의 길드원들이 어떤 의뢰를 맡아서 의뢰 수행이 불가능할 때 이런 식으로 추천서를 씁니다. 서로 다른 종이의 크기,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간 종이의 질감, 잉크의 여부, 봉투의 종류를 전부 달리하여 암호를 만들죠.”

  “그래서 비구루 할머니란 걸…….”

  “솔직히 안쪽에서 엿듣긴 했지만요.”

  넉살맞은 미소를 지은 소년은 봉투를 한데 접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는 문 안쪽으로 들어가라는 정중한 손짓을 했다.

  “레드 디팟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리리스 님.”

 

 

 

 

 

  레드 디팟에서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자신들끼리 커뮤니티를 주고받았다. 예전에는 지푸라기를 이용해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는데, 리리스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쓸모 있을 거라며 비구루가 가르쳐 주기도 했지만 금방 포기했다. 이건 머리가 나쁜 걸 떠나서 감각이 중요했다.

  소년이 종이의 여러 가지 특성을 이용해 비구루와 추천서, 의뢰인의 이름을 알아냈듯이. 미세한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암호 자체를 볼 수 없는 구조였다.

  내심 리리스는 역시 레드 디팟이구나, 감탄을 하다가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다시 긴장도를 끌어올렸다. 설마 추천서에 내 이름까지?

  하지만 비구루가 그런 몹쓸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레드 디팟은 의뢰인에 대한 어떤 정보도 묻지 않는다. 알고 있어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원칙.

  그렇다는 얘기는, 일부러 알고 있는 정보를 입밖으로 꺼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는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리리스님이라면 저희 길드를 초토화시키고도 남으실 테니 말이죠.”

  그들은 어느 호화로운 저택의 접대실에 있었다. 붉은 양탄자와 조각상 같은 테이블, 이름 있는 화가가 그린 그림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소년은 리리스에게 등을 돌린 채 차를 우려냈다. 그런 소년을 리리스는 무시무시한 눈동자로 응시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도 고객의 이름을 밝혀선 안 되는데 보란 듯이 입 밖으로 꺼냈다.

  홍차를 다 우려낸 그가 쟁반과 함께 돌아섰다. 소년이 들기에는 커다란 크기의 쟁반이었다.

  “그저 개인적으로 리리스님에게 관심 있을 뿐입니다.”

  “왜지?”

  “글쎄요…….”

  소년이 찻잔과 다과가 담긴 접시를 리리스 앞에 내려놨다. 꽃 냄새 비슷한 것이 증기를 타고 올라왔다. 다과접시에 담긴 쉬폰 케이크에는 보랏빛 잼이 흘러내렸다. 모든 게 먹음직스러웠다.

  자기 앞에도 잔을 내려놓은 소년이 한 모금 찻물을 들이킨 후 말문을 텄다.

  “리리스님이 악마의 힘을 갖고 있어서랄까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설마 내 안에 있는 서큐버스에 대해서도 알까?

  혹시 모를 조바심에 리리스는 잔뜩 그를 경계했다.

  “정확히는 모릅니다. 반란 이후로는 전혀 정보 수집이 안 됐죠. 비구루님께서 정보를 주지 않으신 것도 있지만, 그만큼 리리스님이 굉장히 도망을 잘 다녔다는 증거이니 자부심을 느끼셔도 좋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레드 디팟의 정보망에서 빠져 나가셨으니까요.”

  “농담할 기분 아냐.”

  “저도 농담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저희 길드의 명성에 금이 간 사건이니까요.”

  대륙 최고의 도둑 길드이자 정보 집단인 레드 디팟에게 있어서 반란군의 핵심 인물인 리리스의 정보를 놓친 건 크나큰 실수였다. 물론 안다고 해서 어떻게 할 건 아녔다. 하지만 정보를 원하는 자가 혹시라도 있다면 거래물로 삼아야 했다.

  “나를 팔아서 좋을 건 없어.”

  이를 잘 알고 있는 리리스는 소년에게 경고했다.

  “혹시나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발설하면 그땐 너부터 죽일 거야.”

  “무섭군요. 조심하지요.”

  어린 낯이 싱긋 웃었다. 반란군에서도 손에 꼽혔던 악마 리리스를 상대하고 있으면서, 소년에게서는 나이에 맞지 않은 여유가 흘러나온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제가 레드 디팟의 대공 에릭 데커라고 합니다.”

  “대공은 레드 디팟의 위치라고 들었는데.”

  “원래는 다릅니다. 대공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을 가리키죠. 대공이 머무는 자리를 대공이라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뿐입니다. 좀 더 정확히 설명 드리자면 정보를 모아서 취합하는 길드원을 가리키죠.”

  “그러니까 너에게 정보가 모인다?”

  “수도성에 있는 정보, 나아가서 저는 제국에 있는 어지간한 정보가 ‘여기’있죠.”

  데커는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리리스는 속으로 감탄과 동시에 불신의 냄새를 맡았다. 한 사람이 제국의 정보를 전부 알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만한 기억력을 10대 소년이 갖췄다는 건 더 이상하고.

  그런 리리스의 반응과 상관없이 소년은 비스킷을 입에 오물거리며 물었다.

  “슬슬 의뢰를 들어보죠. 비구루님이 하실 수 없는 의뢰를 하시러 오셨으니, 왠지 두근거리네요.”

  “혈료.”

  리리스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차로 입을 헹구려던 데커의 손이 멈췄다. 그는 마시던 걸 도로 내려놨다. 여유를 지키려고 했으나 형용하기 힘든 불편함에 어색한 미소에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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