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대진표를 조작해야 되나. 아냐,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겠지.’
레이지 비브론스키가 어떤 실력을 가졌는지 레드 디팟은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리리스에게 일을 맡겼다면 상당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을 이긴 자, 거기다 여자라면 그 시점에서 관심도는 어떻게든 올라간다.
“릴림? 괜찮아요?”
“아, 네. 무슨 얘길 했죠?”
옆에서 쟈린이 무어라 떠들고 있었는데 듣지 못했다. 쟈린은 코로 크게 숨을 내뿜었다.
“흐응~ 너무하네. 난 반가운 마음에 실컷 떠들고, 정작 듣는 사람은 관심이 없고. 제가 불편하면 말해요.”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딴 생각을 좀 하느라…….”
“무슨 생각?”
“그게…… 여자가 예선부터 잘 이기고 올라가면 관심받기 쉽겠구나, 싶어서요.”
“뭐,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아요.”
“에? 왜요?”
“제국이잖아요. 철저히 실력 위주로만 보는. 남녀가 중요한가, 뭐.”
하긴 그렇긴 하네.
제국에서 출세하려면 신분이나 나이, 성별, 출신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로지 실력만 있으면 됐다. 기사라면 검을, 행정가라면 업무능력을, 음유시인이라면 작곡 작사 능력을.
이 점 하나만큼은 굉장히 제국이 좋았다. 반면 다른 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여자가 천대를 받고 다시 출신 성분에 따라 차별이 존재했다. 노예는 절대 기사가 될 수 없다는 법이 있는 나라도 있다.
그에 반해 제국에서는 노예는 물론이고 기사단 중에는 갓 10살짜리가 입단하기도 했다.
“더구나 마법사들은 대부분 여자잖아요. 그런 마법사들도 이번 대회에 대거 참가했어요.”
“하지만 마법사는 안 보이는 걸요?”
“뭘 모르네. 마법사들은 게을러서 오후쯤 되어야 나타날 거예요. 난 부지런한 마법사지만.”
“마법으로 무투 대회라…….”
얼핏 듣기만 하면 마법사가 유리하다고 느낄 수 있다. 검으로 다가가기 전에 마법으로 작살내면 되니까.
그러나 말과 현실은 다른 법. 1:1 대결에서는 주문 영창을 하는 동안 날붙이가 목에 닿는 경우가 허다하다. 체력적으로 가도 마법사들의 체력이 훨씬 빨리 바닥난다.
‘마나가 넘쳐도 신체가 안 받쳐주면 꽝이지.’
제국이 마법을 쳐주니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결국 전쟁은 군인이 한다. 군인은 수 백, 수 천의 거리를 걸어 다니며 전투까지 치러야 하는 체력을 필요로 했다. 이러니 군사력을 중시하는 제국 입장에서는 마법사를 홀대하는 문화가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릴림이라 했나. 그쪽은 마법사도 아니고 무기도 없는데, 그럼 맨손으로 참여하는 건가요?”
“아, 음…….”
이거 어떻게 대답하지.
눈에 띄지 말자는 생각에 이르니까 맨손도 위험했다. 맨손으로 검과 창을 상대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라운 파이터들의 전투 방식은 신체를 무기삼아 마나를 주입해서 강화한다. 이런 모습으로 싸웠다간 눈에 띄는 건 시간문제고 제국 전체에 소문이 퍼질 수도 있다.
고민하던 리리스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잃어 버렸어요.”
“예?”
“검이 있었는데 잃어버렸다고요. 도둑맞았다고 해야 되나…….”
쟈인의 눈꼬리가 이만큼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의심의 눈초리가 따갑다.
무구는 주인에게 있어서 목숨과도 같이 여겨지는 물건이다. 분신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런데 그걸 잃어버려? 도둑을 맞아?
그 원인에는 두 가지가 있을 거라고 쟈린은 추측했다.
실력이 형편없는 사람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후자에 가까운 거 같은데. 일단 두고 볼까.’
“안타깝네. 검을 도둑맞다니. 나중에 잡히면 흠씬 두들겨 패야겠어요.”
“…….”
어느새 줄이 줄어들어 릴림의 차례가 왔다. 떠들다보니 금방 시간이 지났다. 쟈린만 일방적으로 떠들었지만. 그보다 앞에서 실컷 싸우면서 치안대에게 끌려간 덕분이었다.
“어서 오세요, 참가 신청하러 오셨죠? 서류를 드릴 테니 여기에 빈 칸 없이 작성해주세요. 신분증 보여주시고요.”
잔뜩 질린 얼굴을 한 안내원이 속사포로 참가 방식을 알려줬다. 가득 찬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버티려고 용쓰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불친절하긴 해도 그런 안내원의 마음을 이해하며 릴림은 신청 서류를 작성해나갔다.
이름부터 나이, 출신은 제국. 난감하기 짝이 없는 정보 기입란이 많았다. 우선 위조 신분증에 적힌 대로 따라 적었다.
“다 적었어요.”
“참가 번호는 30021번입니다. 모레 아침 10시까지 제 4투기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번호표와 참가자를 인증하는 명패를 건네받은 릴림은 그제야 인파를 빠져나왔다. 뒤이어 쟈린도 작성을 마치고 당연하다는 듯이 릴림을 따라왔다.
“혹시 갈 데 있나요? 갈 곳 없으면 저랑 공방에나 가죠.”
“공방은 왜요?”
“무기 없다면서요. 어차피 그쪽으로 갈 거라면 지금 같이 가죠.”
“그렇긴 한데…… 뭐, 그러죠.”
쟈린과의 동행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공방으로 가야하는 건 사실이기에, 흔쾌하진 않아도 리리스는 쟈린과 함께 공방 거리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도 쟈린의 수다 본능은 끊이질 않았다.
“대회에 참가하시는 이유가 뭐죠?”
뜬금없이 쟈린이 물었다.
“다들 부와 명예를 위해서라는데, 리리스씨는 아닌 거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투쟁을 하고 싶으면 이런 대회보단 기사단 입단 시험에 가야 하는 편이 좋잖아요. 실력이 있다면 가능한 얘기지만.”
“마치 제 실력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후훗, 그렇게 들렸나? 안타깝게도 아닌데. 오히려 반대지.”
공방 거리가 가까워지자 망치질 소리가 들렸다. 곧 이어 대장간의 뜨거운 열기와 그 속에서 달궈진 쇠를 두들기는 대장장이들이 보였다.
앞장서서 걷던 쟈린은 무구들을 나열한 한 가판대 앞에 멈춰 섰다. 화려한 예도부터 군용 롱소드, 창, 방패가 가득했다. 투박한 형태지만 세세하게 보면 장인의 섬세함이 돋보였다.
그 앞에 서서 칼을 들어 보이며 살피던 쟈린이 말했다.
“마법사들 중 일부는 타인의 마나를 볼 수 있어요.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죠.”
“쟈린씨가요?”
사람은 기본적으로 마나를 갖고 태어난다. 사람만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생명체는 전부 마나 코어를 갖고 있다.
이들 중 타고난 마나를 가진 사람이 소드 마스터나 라운 파이터, 마법사가 된다.
마법사 중에서도 마나를 수련하면서 개안(開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사람의 마나 코어를 시각화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아주 희귀하고도 쓸모없는 능력이다.
그들이 볼 수 있는 마나 코어의 크기 정도가 다였다. 색깔이나 성질은 보지 못했다. 얼마나 강한지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게 가능한 마법사들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현자급 마법사들이었다.
“제가 처음에 마법사냐고 물었죠? 릴림씨의 마나를 보고 물었던 거예요.”
“…….”
순간 릴림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개안한 마법사들은 마나를 볼 줄 알기만 할 뿐, 리리스의 마나에 악마가 있다는 사실까진 모를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혹시 모르는 마음에 괜한 긴장감이 끓어올랐다.
혹시 악마의 영혼을 들키진 않았을까.
마나 코어에 붙어 다니는 서큐버스인지라 눈치챌 확률이 높았다.
“꽤나 크네요.”
검을 보던 시선이 리리스에게 향했다. 쟈린은 빙그레 웃었다.
“부러울 정도예요. 그만한 마나를 갖고 있으면 굳이 무투 대회가 아니라 기사단 시험에서 한 번에 합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가요.”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리리스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검에 다시 눈을 돌린 쟈린이 물었다.
“검, 볼 줄 알아요?”
“아뇨, 솔직히 검에 대해선 잘 몰라요.”
“그럴 거 같았어. 검을 잃어버리질 않나, 무투 대회 참가하러 왔다면서 빈손으로 나타나질 않나. 안 그래도 여자라서 남자들한테 얕잡아 보일 텐데. 그러고 다니면 같은 여자로서 곤란해요.”
“실력으로 밀어붙이면…….”
“자신 있나 봐요? 검도 없이.”
“그건 아닌데…….”
살짝 비웃는 투에 리리스는 기가 죽어서 대답했다.
돌이켜 보니까 정말 멍청했다. 아무 생각 없이 혈료 하나만 바라보고 레드 디팟의 의뢰를 받질 않나, 무기를 구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고, 그래놓고 눈에 띄지 않게 대회를 치를 계획을 하다니.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네. 쟈린이 비웃을 만도 하다.
“제가 마법사여도 검 좀 볼 줄 알거든요.”
“진짜요?”
“예, 정확히는 검이 마나를 얼마나 잘 응용할 수 있느냐를 가늠할 수 있죠. 가령 예를 들어 마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구는…….”
쟈린은 구경하고 있던 단검이 마나를 조금씩 흘려보냈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이 손잡이부터 검신, 날카로운 끝자락으로 천천히 타고 올라갔다.
리리스에게도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다만 쟈린처럼 보진 못했다. 느끼기만 할 뿐.
파직!
어느 정도 마나가 강해지자 칼끝이 바스락 거리며 떨어졌다. 아주 작은 균열이었다. 기껏해야 먼지 수준의 조각이었지만 리리스는 똑똑히 보았다.
놀란 토끼눈이 된 리리스에게 쟈린은 친절히 설명해줬다.
“얘처럼 마나를 못 버티면 대부분 부서지고 말아요.”
“처음 알았어요. 마법사인데도 잘 아시네요?”
“지팡이를 고를 때 이런 식으로 마나를 주입해보니까. 마나를 버티지 못하면 이처럼 갈라지고, 지팡이의 경우 성질이 맞지 않으면 아예 마나를 받지 않죠.”
어쩐지 그간 써왔던 검들이 다들 금방 이가 나가더라.
혈료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돈을 모으느라 리리스는 대장간에서 가장 싼 무기들을 소지하고 다녔다. 대부분 한두 번 싸우면 망가졌는데, 이런 이유가 있을 줄이야.
망가진 단검을 대장장이 몰래 자리에 놓은 쟈린은 다른 롱소드를 집어 들었다. 레이피어처럼 얇고 가벼워 보였으나 보다 두께는 두꺼웠다.
“이거 괜찮네. 이거 줘요.”
순식간에 무구를 고르고 계산까지 마친 쟈린은 가죽 검집까지 샀다. 그리곤 리리스에게 휙 던지다시피 건넸다.
“써요.”
“예?”
“말동무 해준 대가로 주는 선물.”
“그래도 공짜로 받을 수는―”
“물론 그냥 안 드릴 거예요. 오늘 하루 종일 데리고 다닐 거니까. 가죠.”
수다만 많은 줄 알았더니 행동은 상당히 주도적인 여자였다. 나쁘게 말하면 완전 멋대로다. 생각 같으면 자리를 벗어나고픈 리리스였다.
그렇지만 검도 사줬고 딱히 나쁜 인상이 아니었기에, 리리스는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잠시 뒤 두 사람 세공품 공방거리로 접어들었다. 대장간이 있던 곳보단 훨씬 한적한 거리였다. 대장간 주변에는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주로 있었다면, 이곳은 돈이 많아 보이는 부자나 귀족들이 눈에 띄었다.
공방들도 훨씬 고풍스런 느낌이 났다. 유리창 너머 아기자기한 장신구부터 거대한 보석까지,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여길만한 사치품이 주인을 기다렸다.
“악세서리라도 사게요?”
“아뇨. 마법 용품 보러.”
간단히 대답하곤 곧장 쟈린은 한 가게로 들어갔다. 리리스도 따라가려다가 차림새를 보고 잠깐 망설였다. 거적때기 같은 로브가 바람에 찢어질 정도로 위태로웠다.
이런 차림으로 들어가도 되려나.
자기가 주인이어도 내쫓을 꼴에 리리스는 발길을 망설였다.
먼저 들어가서 문을 열어놓고 리리스가 들어오길 기다렸던 쟈린은 없어진 인기척에 돌아섰다.
“안 들어오고 뭐해요?”
“아뇨, 그게, 아무래도 이런 꼴로 여기 들어가는 건 좀 실례 같은데…….”
“흐응, 그래요? 그럼 물어보죠, 뭐.”
“에?”
말릴 틈도 없이 쟈린은 점장에게 다가갔다. 리리스의 손이 애꿎게 허공을 쥐었다.
“점장, 여긴 옷차림이나 외모를 보고 손님을 골라내나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정장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정중히 허리를 숙여 괜찮다며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조금 당황스러운 리리스는 여전히 망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옷차림 때문이 아니라, 꼬질꼬질한 신체 때문만이 아니라. 하물며 인피면구로 위장한 못생긴 얼굴 탓도 아닌.
그 어떤 이유도 아닌 이유를 점장은 최대한의 경어를 붙여가며 말했다.
“다름 아닌 황녀 전하의 친우이시지 않습니까.”
그걸 듣자마자 겨우 가라앉았던 심박수가 다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