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녀 전하라고 할 사람은 제국에 단 한 명이었다.
폰 프란시스 헤테카 황제의 오누이 동생이자 적안의 마녀라고 불리는 여자.
제국 최초이자 최고의 마법사 또는 현자인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얼굴로 리리스를 돌아봤다.
“점장님. 제가 잘 숨긴 사실을 이렇게 쉽게 들통 나게 만들면 어떡해요.”
“이런. 송구합니다.”
전혀 미안한 눈치가 아녔다. 점장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고 쟈린도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낚여버렸다.
사색이 된 리리스는 온몸이 굳어서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제국의 중심에 있는 사람과 마주할 줄이야. 기사라던가 귀족도 아닌, 한때 암살 대상이었던 황족과 마주한 기분은 이루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적대감일까. 아니면 정체를 들켰다는 불안감?
온갖 복잡한 감정과 사고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러나 이내 도달한 생각을 끝에는 쟈린이, 쥴 프란시스 헤테카가 혹여 의도적인 접근을 한 것 아니냐는 의문점이 있었다.
‘설마 날 알아보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핏기가 싹 가셨다. 손이 떨려서 주먹을 꽉 쥐었으나 입술의 경련마저 감출 순 없었다.
여차하면 힘을 발휘할 준비를 했다. 상대가 현자라고 해서 이길 가능성은 극히 적긴 해도 근거리에서의 싸움은 자신 있었다.
“응? 긴장했어요? 후훗, 괜찮아요. 적어도 여기서의 저는 황녀가 아니라 쟈린이니까. 자, 얼른 들어와요. 밖에 춥잖아요?”
“당신, 아니지. 황녀 전하.”
“밖에서는 황녀가 아니라니까요.”
“……왜 저를 데려왔죠?”
의심이 많은 여자, 라고. 쥴은 그렇게 느꼈다.
뭐, 제국의 권력 최정점에 있는 사람을 보고 경계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쥴을 보고 무례를 용서해달라며 허리 숙이기 바쁘다. 폭군이라 불리는 황제를 업고 있으니 당연하다. 오죽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살려달라는 얘기를 더 많이 들었다.
그러나 릴림은 도리어 당당하게 이유와 상황을 묻는다. 여차하면 허리 뒤에 숨긴 작은 단검을 꺼내 해치겠다는 담력까지 있었다.
그 모습이 쥴의 마음에 들었다.
‘이번에는 보는 눈이 틀리지 않은 거 같네.’
쥴은 최대한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일단 들어와요. 난 당신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건데. 단검도 손에서 놓고. 난동 피우면 점장이 싫어해서.”
그렇게 툭 던져놓고 쥴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아직 열려 있다. 점장이란 사람도 입장하길 기다렸다. 불안감을 지우지 못한 리리스만 밖에서 찬바람을 맞아가며 망설였다.
쉽사리 불안감이란 녀석이 사라지질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도망친다고 해서 쥴이 쫓아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만에 하나 정체를 알아채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하면 더욱 도망쳐선 안 됐다.
하다못해 목격자를 없애야만…….
‘아냐. 아직 확신하기는 일러. 좀 더 보고 결정해도 괜찮겠지.’
애꿎은 살인은 쓸데없는 흔적을 남긴다. 안 그래도 도망자 신세에 인피면구를 한 얼굴까지 지명수배 당해서는 곤란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혈료가 목적인 이상 황족과 직접 친해질 기회는 그야말로 찬스 그 자체였다. 운이 좋다면 피를 보지 않고 황궁 입성이 가능했다.
릴림은 단검에서 손을 놓고 조심히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변수에 마른 침이 계속 고였다.
세공품을 다루는 공방답게 내부에는 화려한 장식품들이 가득했다. 유리로 된 진열장마다 제각각 다른 색과 모양을 가진 보석들이 반짝인다. 촛불이 아닌 마석을 이용한 조명 때문에 더욱 빛났다.
점장의 안내를 따라 릴림은 2층으로 올라갔다. 먼저 들어갔던 쥴은 미리 차를 받아놓고 진열된 세공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인기척에 그녀가 돌아봤다.
“안 올 것처럼 굴더니. 결국 왔네요. 앉아요.”
점장이 내려가고, 릴림은 가운데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한참을 더 구경하던 쥴도 마주앉았다.
두 사람이 사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릴림과 달리 쥴은 조용히 상대를 응시했다. 점점 그녀의 눈이 붉은 색으로 변하더니 리리스의 가슴 가운데에 커다란 마나 코어가 보였다.
색깔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크기나 밝기만 봐서는 어지간한 소드 마스터 기사들을 뛰어넘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지도 않았다. 분명 어디서 훈련을 받아봤겠지.
“저기…….”
먼저 릴림이 어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직도 긴장해서 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제야 쥴이 빙긋이 웃더니 적안을 흑안으로 감췄다.
“아, 미안. 그쪽 마나를 보느라.”
“…….”
“경계하지 말라니까. 우리 오라버니가 폭군이긴 해도 나까지 망나니는 아니에요. 사람이 실수 좀 했다고 나무랄 성격은 아니라는 거죠.”
어쩌다보니 황제를 폭군이라 욕해버린(?) 릴림은 최대한 등받이에서 몸을 뺐다. 언제든지 뛰쳐나가려고 온몸에 잔뜩 힘을 줬다.
“아직도 그러네. 뭐, 그럼 빙빙 둘러대지 말고 본론부터 말하죠. 혹시 이번 무투 대회에 왜 마법사들까지 참가가 가능한지 아나요?”
“아뇨, 전혀요.”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했다. 레드 디팟에서 알려준 정보를 굳이 여기서 발설해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그럴 거예요. 왜냐하면 그 이유는 국가 기밀에 해당되거든요. 그리고 지금부터 그 기밀을 말해줄 거예요.”
나한테 억한 심정 있나. 혹시나 다른데 발설했다간 죽이겠다는 협박이잖아.
리리스는 듣기 싫은 기밀을 졸지에 억지로 듣게 되었다.
“언젠가 공표하겠지만 황실 직할 마법학회를 만들 생각이에요.”
“제국이 마법을요?”
마법에 전혀 관심이 없던 제국이 국가차원에서 마법학회를 만들다니. 대륙에서 엄청난 이슈가 될법한 이야기였다. 다른 국가 입장에선 안 그래도 군사력이 막강한 나라에 마법까지 특화되었다간 상대하기 곤란하리라.
“놀란 얼굴이네. 뭐, 내가 힘을 좀 썼지. 괜히 오라버니를 황제로 둔 사람이 아니에요.”
“제국은 마법을 멸시하잖아요.”
“그게 맘에 안 들어서. 마법을 멸시하다니. 그러면서 마나 코어를 키우려고 발악하는 사관생도나 준기사들 보면 안타까워요. 결국 마나를 다루는 건 마법학에서 기초하는 건데.”
소드 마스터의 기준은 마나를 검에 담아낼 수 있느냐의 차이다. 어떤 도구에 마나를 싣는다는 행위는 마법의 일종으로, 이 힘을 증폭시키거나 지구력을 늘리기 위해선 결국 마나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즉, 소드 마스터도 마법을 쓰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들은 검을 배우는데 치중해서 마법에 무관심한 경우가 많았다.
“소드 마스터에 도달한 기사들을 훈련한다……는 명목이긴 해도, 마법학회가 설립되면 마법사 육성이 우선시 될 거예요. 마법학 연구는 물론, 마법공학까지도 분야를 차차 넓히는 게 제 계획이죠.”
“거기까진 이해가 되는데 무투 대회는 왜……?”
“가능성 있는 마법사들을 내가 직접 선별해서 가르치려고요.”
이 또한 엄청난 뉴스가 될 거라고 릴림은 직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현자의 제자다. 마법사들에겐 최고의 출세 루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야 말로 호사 중의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기회였다.
“몇 가지 더 알려드리자면 이름 있는 마법사, 일정한 경지에 통달한 마법사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내가 보는 건 어디까지나 가능성.”
“그래서 저를 데려왔군요.”
쥴은 턱을 주억거렸다.
“마법에 관해서는 초짜이지만 무궁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 독창적인 마법을 보여주는 사람, 특이한 마도구를 만들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내가 바라는 딱 이상적인 학생이죠.”
“하지만 전 검을 배우고 있어요.”
“검을 배운다고 해서 마법까지 못 배울 건 없죠. 마검사도 있는 걸.”
마법과 검을 같이 쓴다는 마검사. 말이 쉬워 검과 마법을 같이 배우는 거지, 역사상 마검사라고 불릴만한 사람은 한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검이나 마법이나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검을 배우면 마법에 투자할 시간이, 마법을 공부하면 검을 수련할 타이밍이 없어진다. 하루아침에 두 가지를 모두 통달할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마검사들은 전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노력을 더하면 더했을지 몰라도 그들에게 시간 따윈 무의미했다.
“나야 마법사니까 릴림씨가 검으로 얼마나 대단한지 못 알아봐요. 내게 중요한 건 마법사로서의 재능뿐이니까. 릴림씨의 마나 코어는 여태까지 봐온 누구보다 가능성이 높아요. 당장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현자의 자리도 노릴 법 하죠.”
쥴은 릴림이 충분히 마법사로 수준 높은 경지에 오를 거라고 확신했다. 마나 코어가 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능은 타고났다. 검만 배우기에 아까울 정도다.
“어때요? 특별히 손을 써서 대회 성적과 상관없이 학회에 넣어주죠. 공평하지 못하다고 눈총 좀 받겠지만, 내가 뒤에서 봐주면 찍소리도 못 해요.”
릴림은 장고에 빠졌다.
설마 했던 기회가. 혈료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알아서 굴러왔다. 단순히 친해지는 수준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다. 맘만 먹으면 친구 이상의 관계를 만들 수 있으리라.
혈료의 정확한 위치는 레드 디팟에게서 알아내고 가도 늦지 않는다. 비브론스키를 탈락시켜달라는 의뢰도, 쥴에게 대회는 꼭 치르고 싶다며 둘러대도 상관없으리라.
여러모로 릴림에게 웃어주는 상황.
그러나 그녀는 10년 전 반란 당시 너무나 손쉽게 황족들을 암살해놓고 목표물이 도망친 일들이 떠올랐다. 그 당시 일로 인해 순조로움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심사숙고해야 한다.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을 억지로라도 떠올려본다.
현자의 제자가 되면 행동에 제약은 없을까? 혈료의 위치를 알아내 훔친다고 해도 도망칠 수 있을까? 현자와 지내면서 리리스라는 정체가 들통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리리스라는 정체보다 서큐버스를 먼저 알아채면?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는 이야기 속에서는 정체를 숨겼다가 들켜서 곤혹을 치르는 악당들이 등장한다. 반대로 정체를 끝까지 감춰서 악을 무찌르는 영웅들도 나타난다.
리리스는 후자보다 전자에 가능성을 뒀다.
‘아무리 숨긴다고 해서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어. 괜한 변수를 둬서 일을 그르치는 것보단 낫겠지.’
작은 가능성까지 가정한 릴림은 빠르게 마음을 결정했다.
그보다 쥴이 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원하는 거, 있어요?”
똑같은 질문을 10년 전 리리스는 들어 본적 있었다. 류의 손에 구해지고 비구루가 했던 제안.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질문에 거절하려던 마음이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말만 해요. 원하면 황제의 목이라도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