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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로 찬 영혼
작가 : 은발늑대
작품등록일 :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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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도망자010
작성일 : 17-12-14     조회 : 296     추천 : 0     분량 : 5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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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쥴과의 한바탕 긴장감 넘치는 설전(?)을 벌인 리리스는 레이지 비브론스키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한 번 더 레드 디팟에 찾아가려고 했다.

  ‘기왕 의뢰를 받은 김에 상대의 정보를 알면 더 좋겠지.’

  그런데 한 가지 변수가 발생했다. 리리스가 난동을 부려서인지, 접촉하던 장소에 노인이 없던 것이다. 그 외에 몇 곳 더 접촉 가능 지점도 찾아가봤으나 마찬가지로 만날 수 없었다.

  “딱히 난동까진 아니었는데……. 어쩐다. 이래선 의뢰를 완수해도 만날 수가 없잖아.”

  레이지 비브론스키를 탈락시키면 레드 디팟 측에서 알아서 나타나주겠지만. 만에 하나 레드 디팟의 목적만 이루고 그들이 잠적해버리면 그들을 찾을 방법이 없다.

  비구루를 다시 찾아가는 수고를 하면 또 모르겠지만.

  “저기, 숙녀 분. 실롑니다.”

  레드 디팟을 만나지 못하고 광장으로 나온 리리스는 긴장이 풀리자 공복감이 밀려왔다. 마침 공방 거리로 들어가기 전에 광장에서 봤던 식당이 떠오르자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점심때를 넘겼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뒤에서 다가왔다.

  남자는 목까지 기른 머리를 한 곳에 묶었고, 서글서글하니 선한 인상이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꽤나 여자들이 따라 붙었을 법했다. 눈매가 얇아서 웃는 꼴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혹시 아까 공방 거리를 가시지 않으셨습니까?”

  남자의 말투는 상냥하다 못해 극진했다. 복장만 봐선 전혀 아닌데. 화려하진 않아도 좋은 천으로 만든 정복에 금으로 만들어진 타이핀은 그가 평범한 신분이 아님을 드러냈다.

  거기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초록 망토까지.

  ‘귀족이네.’

  제국에서 망토란 귀족들만이 할 수 있는 패션으로 요즘 남자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을 탔다. 아까 무투 대회 신청을 위해 줄을 서있는 동안에도 리리스는 많은 수의 망토를 입은 남자들을 목격했다.

  “안……갔었는데요.”

  리리스는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뱉었다. 딱히 나쁜 의도를 담은 거짓말은 아녔다. 나쁜 의도가 느껴지는 건 남자 측이었다.

  공방 거리를 간 사실을 알고 있기에. 스토킹을 했다는 직감이 들어서 일단 거짓말부터 하고 본 것이다.

  “음, 그런가요?”

  남자가 턱을 문지르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 그, 죄송하지만 아까 그 대장장이 말로는 분명 아가씨에게 줬다고 하던데요.”

  “예?”

  “그 검 말입니다. 숙녀 분 손에 들린 그 검이요.”

  남자가 가리킨 검에 두 사람이 동시에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아까 공방 거리에서 쥴이 직접 골라준 검이었다.

  그걸 자신의 것이라며 주장하는 남자.

  상대는 귀족.

  “증거 있나요?”

  감히 평민으로서 꺼내지 못할 반문이 튀어나오자 남자가 당황스러워 했다.

  진짜 내 검인데……. 하물며 진짜 소유주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귀족이 자기 거라고 하면 넙죽하고 바쳐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여자가 당돌하게도 증거를 요구했다. 다른 귀족한테 그랬다간 바로 즉결처분 감이다.

  ‘혹시 내가 누군지 알고 얕잡아 본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귀족이라고 티를 내고 다니는데.

  곤혹스러워하던 남자는 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쩝 입맛을 다셨다.

  “그 검. 잠깐 줘보시겠습니까?”

  “……?”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훔쳐가거나 그러진 않을 테니까요.”

  증명하라고 한 리리스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검을 뽑아 능숙하게 허공으로 던졌다. 반대로 돌아간 검의 날붙이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얹혔다. 잘못했다간 손가락이 그대로 잘릴 위험한 묘기였다.

  범상치 않은 능숙함에 남자가 내심 감탄을 질렀다. 외모만 봐선 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근께 가득한 소녀 같은데, 의외로 검에 익숙한 사람일지도.

  “받아요.”

  손잡이 쪽을 내밀자 남자는 검을 받아들었다. 그는 보란 듯이 휘둘러 보이더니 가슴 앞에 곧게 세워 잡았다. 이어 그가 작게 속삭였다.

  “추한 영광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더러운 사치보다 아름다운 희생을, 나의 고통을 감내하고 타인에게 희망을 줄지니.”

  기도문에 가까운 주문이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뭘 하나 싶어서 지켜보고 있자, 은은한 농도를 가진 주황빛 마나가 검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옅었던 색은 점점 진하게 변하더니 칼날과 힐더가 만나는 부근에 모였다.

  마나의 크기는 점점 작아져서 실오라기처럼 변하더니 이윽고 하나의 문양을 그렸다.

  “닭……?”

  화려한 벼슬부터 기다랗고 풍성한 꼬리, 길고 가는 다리를 가진 새의 형상.

  분명 닭이었다.

  자세히 보니까 마나가 그린 문양이 아니라, 검신에 살짝 패인 홈에 물감을 채우듯 마나가 스며들었다.

  잠시 후 마나가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남자의 낯이 조금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혹시나 모르실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저희 가문에서는 검을 만들 때 가문의 문양을 새겨 넣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만 반응해서 다른 사람이 마나를 주입해도 이런 형상은 나타나지 않죠. ……이제 증명 됐습니까?”

  “네, 뭐…….”

  쥴이 마나를 넣었을 때는 못 봤던 형상이 남자에게서만 나타났으니,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남자는 본래의 검집에 검을 넣었다. 매끄러운 소리를 내며 알맞게 칼이 들어갔다.

  이대로 끝일 줄 알았더니 그가 작은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듣자하니 대장장이가 실수로 숙녀 분께 검을 팔았다고 하더군요. 이건 숙녀 분께서 치른 금액입니다.”

  얼결에 돈을 받아들자 상당히 묵직했다. 살짝 열린 주머니 입구 사이로 금빛이 반짝였다. 이만한 돈이면 상당한 액수일터.

  원래 쥴의 돈이긴 하지만 돌려줄 방법이 없으니 이대로 리리스가 보관해야 했다. 사실상 공짜 돈이 생겨버린 셈이었다.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땅이 꺼져라 내쉬었다.

  “후우, 겨우 찾아서 다행입니다. 이게 없었으면 진짜 곤란할 뻔 했는데…….”

  “그런데 절 어떻게 찾으셨죠? 검의 외형만 보고 찾긴 어려웠을 텐데.”

  외형만 봐선 전혀 귀족의 물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화려한 장식은커녕 너무 투박해서 용병이 쓰다가 대장간에 맡긴 건줄 알았다.

  “그야 미행 했으니까요.”

  남자는 당당하게 본심을 밝혔다. 너무 뻔뻔해서 리리스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혹시나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분이요?”

  “황녀 전하 말입니다. 쥴 프란시스 헤테카 황녀 전하요.”

  “그걸 어떻게?!”

  연신 리리스가 놀라워하자 남자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방금 전까지 경계하더니 금방 당황해 하는 모습이 은근히 귀여웠다.

  “황녀 전하의 은밀한 외출에 관해서는 이미 귀족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변장을 하신다고 하셔도 똑같은 얼굴로 바꾸시니 못 알아볼 수가 없죠. 황녀 전하께서 가는 곳에는 늘 길이 비워져 있기도 하고요. 혹시 세공품 공방 거리에 은근히 사람이 없지 않았습니까?”

  “아…….”

  제국의 중심인 수도에서 당연히 사람이 붐벼야할 곳이 공방 거리다.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 그 중에서도 귀족들의 사치품을 파는 세공품 공방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는 이상했다.

  “처음에는 너무 비싼 물건만 파는 곳이라서 사람이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요. 세공 공방 거리는 돈이 없는 사람들도 구경하러 가는 곳입니다. 황녀 전하가 외출하는 날이면 황실직속 기사단이 비밀리에 통제를 해서 사람이 거의 못 들어가지만요.”

  “그렇군요.”

  그제야 사람이 없던 이유를 이해했다. 설마하니 통제를 해서 그럴 줄이야. 그럼 거기 있던 사람들은 위장을 한 기사들이 확률이 높았다. 혹시나 그곳에서 정체를 들켰다고 상상하니 오금이 저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는 그제야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아차, 소리를 냈다.

  “이런 죄송합니다. 초면에 소개가 먼저인데.” 남자는 정중히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인사드리죠, 저는 비브론스키 남작가의 장남, 레이지 비브론스키입니다.”

  비브론스키는 사심 없는 미소를 지었지만, 리리스는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정말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비브론스키 남작가는 과거 제국이 건국에 공헌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건국 초창기에는 차기 대공이 될 거라며 다들 추켜세울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가문이 몰락한 건, 사실 몰락이 아닌 포기에 가까웠다. 많은 사람들은 제국이 군사력을 중시하면서 남작가의 세력이 자연스레 밀렸다고 하지만.

  초대 가주는 일부러 중앙 세력에서 빠져나와 변두리 영지로 향했다.

  “진정한 권력자는 자리가 아닌 가지고 있는 힘을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따라 존경심을 받을 수도, 멸시를 받을 수도 있다.”

  수도성으로 떠나기 전 레이지 비브론스키는 전대 가주들이 각자의 필체로 남긴 가훈을 읽고 있었다. 이제는 낡고 닳은 종이에 같은 문장이 위에서 아래로 쓰여 있다. 마법이 걸린 유리 상자 안에 담긴 이 문서가 가문의 유일한 가보였다.

  “역대 가주들은 초대 가주의 유언을 따라 살아왔다.”

  “아버님.”

  집중하고 있던 레이지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현 가주이자 남작인 게틀먼 비브론스키가 두툼한 수염을 문지르며 아들의 곁에 섰다.

  남작가의 저택 입구에 보란 듯이 나온 가보는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남들에게는 가치가 없는 것이라 가보를 내놓은 것도 있지만, 초대 가주의 유언을 매일 같이 새겨 살라는 의미에서 보이는 곳에 두었다.

  “앞으로도 우리 가문은 초대 가주가 그러했듯이 저 말을 따라 살게 되겠지. 이곳 변방에서, 조용히, 숨어서…….”

  “이번엔 다를 겁니다.”

  레이지는 가문의 영향력이 늘 약하다고 여겼다. 실제로도 그랬다. 개국공신이라는 명예에도, 창창한 미래가 약속 됐는데도, 가문은 가훈을 따라 살아왔다.

  그 결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과거에 속박되어서 옳고 그른 것만 따지다가 가문의 실속을 버려야만 했다. 늘 희생을 강요당했고, 이제는 영지 내 제국민들과 가문 사람들까지도 호의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다고 해서 권력에 욕심이 난다거나 속물근성을 갖고 있는 건 아녔다. 그저 지금의 가문으로는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레이지는 힘주어 말했다.

  “보란 듯이 제가 반드시 가문을 일으키겠습니다. 반드시 황제의 목을……!”

  “그래, 그래야지. 그게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레이지, 그리고 게틀먼도 한껏 굳은 결심을 서로에게 내비쳤다.

  마지막으로 마음까지 가다듬은 레이지는 가문 사람들만 사용하는 검을 아버지에게 하사 받아 수도성으로 달렸다. 그는 성에 들어오자마자 머물 방을 잡기도 전에 무투 대회 참가를 마쳤다.

  이건 황성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평범하게 기사 시험을 봐서 기사단에 입단하는 편이 출세엔 좋겠지만, 그의 관심에 출세 따윈 없었다.

  중요한 건 황제에게 다가가는 것.

  “기사가 될 거면 ‘그림후드’가 되어야 해.”

  제국의 검이 폰 프란시스 헤테카라면 황실직속 기사단인 그림후드는 제국의 방패로 불렸다.

  어떤 적이든 가리지 않고 전장에 뛰어든다. 황제의 명령이라면 절대 복종, 죽으라면 죽고 황제와 제국민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집단.

  그들과 같은 자리에 선다면 황제와 가까워질 수 있다.

  무투 대회는 황족들이 직접 관전을 하러 나온다. 황제 폰도 마찬가지. 그의 눈에 든다면 기사단 입단은 물론 그림후드에 들어갈 수도 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는 것뿐, 아무런 확신은 없다.

  “전부 불확실하긴 해도 차근차근 하는 편이 좋긴 하지.”

  중요한 건 황제의 이미지에 박히는 거다. 거기서부터 시작할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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