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 비브론스키?”
쟈린이 쥴이란 걸 알았을 때보다 리리스는 더욱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우연치고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자신의 목표물이 된 남자를 이렇게 마주친다고?
오묘하게 잘 짜인 각본이라는 느낌에 리리스는 있는 대로 살기를 끌어올렸다.
분명 레이지는 리리스를 알고 미행한 것이다.
“아아, 진정하세요! 저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졸지에 당황한 건 레이지였다. 코앞에서 펼쳐진 살기에 그는 황급히 양손을 내밀며 싸울 의사가 없을 드러냈지만, 리리스의 손은 이미 허리에 감춘 단검으로 갔다.
“제가 그쪽에 뭘 믿죠?”
“뭘 믿는다니…….”
“아무래도 당신 검 때문에 날 미행한 것 같진 않아서요.”
“제가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겁니까?”
“돌이켜 보면 이상하잖아요. 저를 미행했다면 본의 아니게 황녀 전하까지 따라다녔다는 건데, 그림후드가 지키고 있는 황녀 전하를 몰래 따라다녔다고요?”
“아니, 그건 미행도 아니고 그저 우연히 세공 공방에 같이 들어가는 걸 봐서―”
“거짓말!”
패기 넘치게 리리스가 몰아붙이자 더 이상 레이지는 물러설 수 없었다. 기왕이면 좋게 좋게 만나려고 했었는데 완전 물거품이 됐다.
뭐, 수상쩍게 접근했으니 의심하는 건 별 수 없다.
“아무래도 진짜인가 보군요.”
“뭐가요?”
“……우선 살기부터 거두시죠.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는 정중한 말투로 리리스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확실히 레이지에게는 어떠한 살기나 악의는 없었다. 그저 호의와 예의예절로 무장한 평범한 귀족 가문의 자제로 느껴졌다.
리리스도 그제야 주변 상황을 눈치 챘다. 벌써 몇몇 사람들이 ‘또 싸우는 거냐?’며 눈길이 쏠렸다. 광장 한복판에서 싸워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건 그녀도 잘 안다.
결국 자세를 풀고 한 걸음 물러섰다.
“설명해요. 지금 이 상황, 왜 나한테 그쪽이 접근했는지, 또 뭘 알고 있는지 전부 다.”
“아, 흐, 음.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자리를 옮기죠.”
곤혹스러운 표정을 풀지 못한 채 레이지가 마지못해 수긍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여전히 뒤에서는 죽이겠다는 살의가 엄청나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등을 보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레이지가 한 수 접고 들어간 거였다.
리리스도 그럴 거라고 대강 알고 있었지만 경계심을 풀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수도성 외곽에 있는 사교 클럽으로 갔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물은 딱 봐도 ‘귀한 사람만 오십시오.’라고 홍보하는 듯했다. 정문에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나무문이 있었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내원이 리리스들을 안내했다. 고급스런 양탄자가 깔린 복도 오른쪽으로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왔다. 화분이 만든 그림자가 바닥에 흔들렸다.
제국의 사교 클럽은 귀족들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수도성의 사교 클럽에서는 학자부터 이름 있는 모험가, 상인들까지 모여들었다.
그렇다 해도 평민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 대신 리리스는 레이지의 귀족 신분이 가진 힘으로 들어갔다. 안내원이 후줄근한 로브를 쓴 리리스를 의심쩍게 쳐다봤으나 딴죽을 걸진 않았다.
기나긴 복도를 따라 가다보니 사람들이 나타났다. 조용하면서도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그밖에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전부였다.
아직은 한적한 공간, 거기서 한 번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작은 별실로 안내받았다.
커다란 통유리 창문 옆으로 테이블이 있고 나머지 사방에는 벽으로 막혀 있었다. 한쪽에는 전쟁 서사시를 그려놓은 그림이, 반대편에는 아직 쓰지 않는 벽난로가 있었다. 창문이나 들어온 문을 빼고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독립 공간.
‘점점 불안해지는데.’
리리스는 이런 장소를 딱 싫어했다. 폐쇄적인 밀실도 그렇고, 남자와 단 둘이 있는 공간이라니. 힐만과의 더러운 기억들이 차근히 떠오른다.
아니, 힐만만이 아니다.
서큐버스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서 매료를 흩뿌리고 다니던 그 시기. 3살에 성장이 끝난 리리스는 정신까지 성숙하진 못했다. 그 상태에서 숱하게 많은 남자들을 끌어들였으며 몸을 마쳤다. 그리고 그들의 몸을 빼앗았다.
그래서인지 순수하게 욕망에 빠져들었던 자신이 리리스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있었던 장소와 공간은 여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화려해도 흐르지 않는 공기 속에서 상대방의 숨결이 또렷이 느껴진다. 소리도 멈춰 있는 것 같아서 끔찍했다.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다. 전부 죽어 있다.
오로지 나와 상대.
살아있는 것이 아닌, 죽어버린 상태로 욕망으로만 서로를 마주하는 더러운 감각.
“괜찮으십니까?”
의자를 받쳐주고 리리스가 앉기를 기다리던 레이지가 물었다.
매스꺼웠던 속이 하마터면 올라올 뻔했다. 리리스는 괜찮다며 조용히 그가 당겨준 의자에 앉았다. 곧장 마실 것과 과자가 나왔다. 향긋한 차 냄새, 달달한 설탕과 고소한 버터의 향기까지.
전부 역겨워…….
‘아, 안 돼! 정신 차려!’
더 이상 분위기를 상상해선 안 된다. 그때를 떠올려서는 좋을 하나도 없다. 서큐버스는 무의식적으로 방어하고 있고, 매료만 제대로 마나로 억누르면 된다.
그러면 남자가 덮칠 일은 ‘적어도’ 없으리라.
“음, 여기라면 엿들을 사람은 없겠군요.”
사방이 막힌 걸 확인한 레이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듣는 귀가 있으면 곤란해서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마치, 누가 엿들을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대륙 최고의 정보 집단이 있으니까요.”
“……레드 디팟?”
되물어 봤으나 레이지는 대답 대신 약속한 설명으로 대화를 열었다.
“그럼 어디서부터 말씀드릴까요. 전부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만의 사정이란 게 있어서요. 하지만 협력이 필요한 일이니 대부분 말씀드리겠습니다.”
“협력, 이라니요?”
“레드 디팟에게서 의뢰를 맡기고 대가로 의뢰를 맡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초반부터 범상치 않은 주제가 나왔다. 리리스에게 또 살기가 나오자 레이지가 격렬하게 손을 저었다.
“아아! 제발! 살기는 자제해주세요. 그러니까 설명 드린다고요! ……에, 저도 레드 디팟에게 의뢰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저도 똑같이 의뢰를 받았습니다.”
“예?”
이건 또 뭔 소리?
리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숙녀 분, 음, 그러니까 릴림 씨였던가요.”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건가.
도대체 어디까지 파악당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들어보면 알겠지.
“릴림 씨가 레드 디팟에게 의뢰를 맡기기 전, 저도 레드 디팟에게 한 가지 의뢰를 맡겼습니다. 생각보다 높은 대가를 요구 받았고 저는 잠깐만 기일을 달라고 했죠. 그게 일주일 전이었는데 오늘 갑자기 레드 디팟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돈은 됐으니 자신들이 맡은 의뢰를 저보고 대신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게 저를 미행하는 거였나요?”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필요한 절차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네요.”
“절차?”
곤란한 듯 뜸을 들이며 그가 말했다.
“릴림 씨가 무투 대회에 참가할 테니 거기서 탈락 시키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릴림 씨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미행을 했죠.”
“저를……요?”
‘나를 탈락시키라니. 내가 요구 받은 거랑 똑같잖아!’
기가 막혀서 차마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니까 릴림 씨께서 레드 디팟에게 의뢰를 맡겼는데 상당히 무리가 가는 의뢰라고 하더군요. 레드 디팟으로서도 수행하기 힘들다고요.”
“결국 그 얘긴…….”
“예, 맞습니다. 레드 디팟은 릴림 씨의 의뢰를 들어줄 생각이 없는 겁니다.”
점점 알 수 없는 이야기가 계속 해서 나오자 릴림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안 그래도 매료를 억제하느라 힘든데 생각까지 하려니 힘에 벅찼다.
“특정한 사람을 탈락 시켜 달라는 의뢰라니. 솔직히 별로 내키지 않아서 거절하려고 했습니다만, 릴림 씨를 탈락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대충 사정을 캐물었더니 릴림 씨에 대해서 알려주더군요.”
“저에 대해 뭘 들으셨는데요?”
“릴림 씨의 얼굴과 대략적인 전력, 그리고 릴림 씨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까지 들었습니다.”
혹시나 반역자 리리스에 대해 알려줬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전혀 예상치 못한 정보가 그의 귀에 들어갔다.
반신반의하며 리리스가 물었다.
“제가 지불할 대가라면…… 그쪽을 탈락시키는 거요?”
“예, 그거요.”
레이지는 가볍게 수긍했다. 복잡한 릴림의 심경만큼이나 레이지의 얼굴도 곤혹스러워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혹시 릴림 씨는 왜 저를 탈락 시켜 달라고 했는지 들으셨습니까?”
“아뇨. 전 그쪽에 대해 물어보지도 못했어요. 얼굴도 몰랐고요.”
“그렇군요. 음, 이상하네요. 왜 서로를 탈락 시키라는 조건을 걸었을까요? 릴림 씨의 의뢰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거라면 처음부터 거절하면 됐을 텐데요.”
“글쎄요…….”
혈료에 관한 정보가 비싸고 얻기 힘들다는 건 안다. 거절해도 릴림은 아무 상관없었다. 오히려 거부당할 걸 예상하고 레드 디팟에게 갔었다. 조금이나마 의뢰를 받도록 비구루에게 찾아갔던 것이고.
그런데 이제 와서 의뢰를 받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에게 정반대의 대가를 요구하다니.
수상해도 좀 수상한 게 아니다.
“아무튼 저는 릴림 씨를 탈락시켜야 하고, 릴림 씨께선 저를 탈락시켜야 하는 입장입니다.”
“서로 적이라는 거네요. 그런데 왜 저한테 접근하신 거죠?”
“말씀드렸다시피 협력을 위해서입니다.”
“검을 찾으려고 했다면서요?”
“무, 물론 그건 진짜입니다! 검을 찾으러 갔더니 황녀 전하께서 계셨고, 그걸 설마 릴림 씨에게 선물을 할 줄은…….”
이 부분만큼은 레이지로선 절대적으로 결백했다. 무투 대회를 앞두고 맡긴 검을 황녀가 가져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마침 릴림 씨가 보여서 그때부터 미행을 하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은 레드 디팟이 요구한 대가를 어떻게 할지를 논의해야 합니다.”
글쎄.
릴림은 본인을 탈락시켜서 의뢰를 물리려는 레드 디팟의 의도가 있다고 해도, 레이지 비브론스키를 탈락시킨다면 결국 의뢰를 들어줘야만 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게 어쩐지 레드 디팟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리리스는 찝찝한 마음에 그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어떤 협력을 해야 하는데요?”
“서로에게 탈락 시킬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겁니다.”
집중하려던 리리스는 으웩, 하는 소리를 내며 질색했다. 상당히 어려운 해결책을 쉽게 말한 탓이었다.
잠깐 고민을 해본 릴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판단해버렸다. 어떻게든 서로를 탈락시키지 않으면 맡긴 의뢰를 그들은 수행해주지 않을 거다. 그게 조건이니까.
“가능성이 없어 보이네요.”
“겉보기엔 그렇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물론 저와 협력을 한다는 전제하에서입니다.”
잠깐이지만 고민의 시간이 생겨났다. 레이지는 그녀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어떤 협력일까, 라는 고민보다 과연 이 남자를 신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떠돌아다녔다. 레이지는 많은 걸 숨기고 있다. 물론 리리스도 숨겨야 할 진실들이 넘쳤다.
서로가 서로를 속여야 하는 마당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리리스는 레이지 비브론스키가 어떤 의뢰를 레드 디팟에게 맡겼는지 모른다. 그 대가가 정말로 자신을 탈락시키라는 건지도 의문 부호가 떠올랐다.
“정 의심스럽다면 제 계획을 먼저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렇게 물어봐놓고 그는 마음대로 설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