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은―”
“잠깐만요.”
서리한 같은 말투로 리리스가 그의 말을 잘랐다. 겨우 냉랭한 분위기를 풀었다고 생각했던 레이지는 다시금 등골이 오싹해졌다.
“뭐, 뭐죠?”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게 많아서요. 검 때문에 접근했다는 것도 아직 핑계 같고. 그리고 레드 디팟이 제 정보를 그쪽한테 순순히 줬다는 것도 이상하네요.”
“그건―”
“하나 더, 그쪽이 레드 디팟에게 어떤 의뢰를 맡겼는지 몰라도 그쪽이 절 탈락시키면 되는 거잖아요? 뭣 하러 미행까지 해서 저를 만나 작당모의를 하는 번거로움까지 감수하는 거죠?”
“절 못 믿으시겠다는 거네요.”
추풍낙엽처럼 쏟아지는 언변에 레이지는 멋쩍게 웃었다. 의심을 하는 건 당연했다. 심지어 이 여자가 눈앞의 남자를 레이지 비브론스키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결국 협력을 얻기 위해선 신뢰가 중요한데, 신뢰의 기반에는 믿을 수 있는 진실의 양이 많아야 했다. 진실의 질도 좋으면 좋겠지만, 초면에 진실을 판별하기란 벅찰 것이다.
말보다 행동.
레이지는 들고 있던 검집을 탁자 위에 올렸다. 싸구려 가죽 검집보단 훨씬 세련된 모양새가 들어오는 햇빛에 반짝였다.
“검을 맡기겠습니다.”
“…….”
“아직 기사는 아니지만 명예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의 무기를 소중히 여기는 법입니다. 기사에게는 분신이자 스스로를 지키는 또 다른 생명이라고도 하죠. 그래서 부러진 검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 주지 않습니다. 그런 검을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기사만이 아니라 하찮은 용병도 자기 무구에 대한 애착은 어느 누구나 똑같았다. 리리스도 그랬다. 허리춤에 숨긴 단검을 지난 10년 내내 사용했다. 몇 번 부러진 적 있었으나 새 걸 사기보다 수리를 선택했다.
익숙해서 한 무기만 쓴다……는 건 많은 이유 중 하나에 불과하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 중의 동료 같은 존재.
레이지를 아무리 믿지 못해도 검을 맡긴 시점에서 그의 진심을 느꼈다.
“……알겠어요. 믿어주죠. 하지만 검은 받을 수 없어요. 그쪽도 무투 대회 나간다면서요. 검이 없으면 안 되죠.”
“감사합니다. 그럼 설명해도 될까요?”
레이지는 그제야 안도하며 검을 도로 가져갔다.
말해줄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진실들이 다수였다. 그러나 레이지는 정말로 리리스와 협력을 하고 싶었다.
그도 레드 디팟의 의도를 알 수가 없기에.
“레드 디팟이 어떤 의도를 가졌든 간에 그들이 의뢰를 들어주지 못하면 길드에 명성에 금이 가게 될 겁니다. 거기다 양쪽의 의뢰가 부딪치는 대가를 요구한 사실이 알려지면 더욱 난처해지겠죠.”
“그걸 알고도 우리한테 말도 안 되는 대가를 요구했잖아요.”
“그 점을 파고드는 겁니다.”
“어떻게요?”
“혹시 무투 대회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아십니까?”
리리스가 모른다고 하자 레이지의 설명이 이어졌다.
무투 대회의 방식은 기존의 토너먼트 형식과는 달랐다. 예선전에서는 일종의 리그 형태로, 나무로 만들어진 무기로 같은 조에 편성된 사람끼리 결투를 벌여 포인트를 쌓는다.
승리는 3점, 패자는 0점, 만에 하나 무승부에 버금가는 상황이 발생하면 1점씩 주어진다.
한 조에는 총 5명이 편성되며 가장 포인트가 높은 두 사람이 토너먼트에 올라간다. 토너먼트부터는 진검으로 단판 승부를 벌인다.
예선에서 목제 무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고한 피해자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덤으로 나무로 만든 무기는 마나를 응용하는 능력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날이 선 무기로 싸우다 보면 마나의 응용력, 그리고 실력과 상관없이 운 나쁘게 상대가 죽어버려서 허무하게 결투가 끝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여기서 변수가 하나 있습니다. 상대 선수의 부정행위입니다.”
“부정행위라는 축복 마법이라던가 물약을 이용한 증폭 효과 말인가요?”
딱히 무투 대회가 아니더라도 기사단 입단 시험이라던가 마법학원 입부 등등 여러 방면에서 부정행위가 이뤄진다. 현자의 제자로 들어가는 시험에서 대량 부정행위가 적발된 사례를 리리스가 직접 목격한 적도 있었다.
제국의 무투 대회라고 다르진 않겠지.
“설마?! 참가자에게 몰래 약을 먹일 건가요?”
“그럴 리가요.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여태까지 봐왔단 레이지 답지 않게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그 미소를 보니까 더 올라올 것 같았다. 식어버린 찻물을 억지로 들이켰다. 향이 전부 날아가서 다행히 냉수처럼 느껴졌다. 향이 있었다면 무조건 토했을 거다.
“기왕 하는 부정행위이니까 들키지 않게― 저기, 듣고 계신가요?”
“욱…….”
왜 이럴까. 급격하게 몸속이 뒤틀리는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혈관 하나하나부터 내장, 심장, 뇌까지, 모든 게 잔뜩 꼬여서 잘못했다간 끊어지고 터질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호흡기관부터였다. 숨을 들이켜도, 내쉬어도 뚫려 있질 않아서 폐가 움직이질 않았다.
이상 증세를 알아챈 레이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릴림 씨?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윽!”
손을 저으려던 리리스는 관자놀이를 꿰뚫은 통증에 반사적으로 머리를 쥐어뜯듯이 잡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몰랐다. 아니, 이유보다도 당장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통증, 감각, 역겨움, 이 모든 건 리리스가 잘 알고 있는 증세였다.
“전혀 안 괜찮아 보입니다! 우선 가까운 의사에게 가죠. 제가 안내를―”
탁!
레이지가 다가와서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리리스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단숨에 사쿄 클럽을 빠져나갔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항간에는 폰 프란시스 헤테카의 외출을 놓고 쥴을 따라 나간다고 하는데, 그건 절대 아녔다. 레드몬드가 멋대로 퍼뜨린 헛소문에 불과했다.
가끔씩 걱정 되서 따라가긴 하지만.
오늘은 벌써 쥴이 낮에 나갔다 온 뒤였다. 어딜 갔다 왔고 누굴 만났는지, 뭘 했는지 동향 파악도 전부 보고 받았다.
고로 오늘의 용무는 쥴이 아닌, 다른 업무가 확실히 있었다.
우선은 제국민들의 생활수준 파악.
잦아진 기근 영향도 있고, 최근 축제를 앞두면서 수도성에 국한되어 물가 폭등이 일어났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폰은 직접 황성 밖으로 나왔다.
재무 대신에게 보고 받은 바로는 축제가 예정된 한 달 전부터 천천히 물가가 올랐다. 지금은 평균가에 3배까지 뛰어서 돈이 없으면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다.
아무 가게나 골라서 가격을 물으니 전에 알고 있던 가격과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냈다.
돈이 많은 외부인들이면 괜찮겠지만, 중요한 건 수도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갑자기 오른 물가로 인해 괜한 불똥을 맞고 있다.
“확실히 문제군. 단속을 철저히 해야겠어.”
이어서 다른 문제도 드러났다. 거주지 부족이었다.
수도성에는 성벽과 가까운 지역을 거주구로 선정해뒀다. 그 안쪽으로는 병사들의 훈련 장소나 군사 시설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거주구가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성벽 밖으로까지 거주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성벽 밖 거주구는 빈민촌이었다. 가난한 자들이 하나 둘 모여서 엉성한 나무판자로 집을 지었고 허가 되지 않은 건축물이 넘쳤다.
사실 여기까진 문제 될 건 없다. 맘만 먹으면 성벽을 늘려서 그들을 안쪽으로 들일 수 있다. 그게 안 되면 그들이 지낼 건물을 지어줄 수도 있다.
“문제는 돈이군.”
세금을 거둬서 빈민가를 돕겠다고 하면 당장 귀족들부터 반발한다. 설득을 하려고 했다간 기본 몇 달이 걸리고 그러는 사이 사태는 더 심각해지겠지.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또 ‘폭군’으로서 행동해야 했다.
“강제로 밀어붙여야겠어.”
빈민가를 둘러보던 폰은 그렇게 말하고는 들고 온 노트에 필요한 것들을 적었다.
그러던 중 인적이 드문 곳까지 다다르자 그의 걸음이 멈췄다. 노트만 보느라 아래로 향해있던 시선에 의아한 것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돌부리인 줄 알고 발끝으로 툭툭 쳐보니 질감이 달랐다. 물컹하면서도 훨씬 무거웠다. 노트를 치우자 그 정체가 훤히 보였다.
“…….”
웬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빈민촌에서 쓰러진 사람은 흔히 볼 수 있다. 아사하거나 아사 직전의 몰골을 한 사람들이 많으니 그럴 수밖에.
맘 같아선 일일이 구제해주고 싶으나 눈에 띠는 짓은 안 하는 편이 나았다. 황제가 외출을 하는 건 어디까지나 떠도는 소문, 이것이 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제국민들의 입이 워낙 가벼워서 소문이 빨리 퍼지게 된다.
만에 하나 황제가 밤마다 은밀한 외출을 한다고 귀족들의 귀에 들어갔다간.
엄청난 트집을 잡겠지.
이미 쥴의 외도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상소문이 올라왔다.
“여러모로 귀찮은 놈들이 아닐 수 없어.”
귀족들에게 한 말인지, 빈민가의 제국민들에게 한 말인지, 폰도 알기 힘들었다.
적어도 누군가를 향한 비난은 아녔다. 욕을 했다면 자신이었다. 이런 나라를 만들고 귀족과 빈민촌의 사람들 누구도 구제하지 못하는 황제를 욕할 사람은 본인뿐이었다.
“…….”
모른 척 지나가던 폰은 몇 걸음 가지 못해서 다시 멈췄다.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특이한 것이 있지도 않았다.
잔상으로 남은 한 사람만이 있을 뿐.
그리고 그 사람이 폰의 발목을 붙잡아 말했다.
“사……살려줘요.”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힘이 없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폰은 여자를 내려다봤다.
로브에 감춰져서 보이지 않은 얼굴이 아까보다 살짝 드러나 있었다. 이목구비가 흐렸다. 괴로워하는 표정 위로 땀이 잔뜩 흘렀다. 자세히 보니 입가에는 피가 흥건했다. 바닥 곳곳에도 다량의 혈흔이 있었다.
강도에게 당했거나 강간을 당했을 거라고 추측했으나 그건 아닌 듯 했다. 다투거나 싸운 흔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구강으로 나온 각혈이었다.
질병인가? 아파서?
그런 듯하다. 복통을 참는 사람처럼 허리를 감싸 안은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가 펴길 반복했다.
“제발, 제발, 날 두고 가지마. 부탁이야, 버리지……말아줘……!”
처절한 손길이 더욱 강하게 마지막 의지를 짜낸다. 살고자 하는 마음이 괴로움 속에서 몸부림쳤다.
옛날에도 그는 이런 사람을 본 적 있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때 ‘그 여자’는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다. 마지막 절벽에 내몰려서 이미 추락하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다. 중력에 맡긴 몸이 산산이 부서질 거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제국의 검도 구할 수 없는 구렁텅이 추락한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폰은 필요에 따라 구해냈다.
나쁘게 말해서, 가엾다거나 애처로워서 도움을 준 게 아니었던 거다. 그저 그에게 필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솔직히 후회하고 있다. 조금은 마음을 썼더라면 좋았을 걸.
결국 폰은 갈등을 접고 여자를 돕기 위해 몸을 숙였다. 이번에는 후회하지 않을 참이다. 귀족들 걱정은 잠깐 접자. 언제 귀족들을 신경 썼다고.
폰은 여자를 살피려 그 자리에 앉았다. 하얀 피부 때문인지 붉은 피가 유독 선명했다. 이만한 출혈량이었으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용케도 그녀는 꺼져가는 숨을 붙잡았다.
좀 더 자세히 상태를 보기 위해 후드를 거뒀다.
거두려고 했으나.
그의 손길이 그녀에게 닿자마자 멈칫거렸다.
왜냐하면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