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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소녀, 소녀.
작가 : 해피트리
작품등록일 : 2016.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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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플라잉 캐치 (1)
작성일 : 16-08-18     조회 : 526     추천 : 0     분량 : 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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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소년이었고 넌 소녀였어.

  그거 외에 내게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기대하지는 마. 내 생각에, 우리 사이를 이야기하기엔 그거면 된 것 같단 말이야. 사실은 나에겐, 더 소중한 이야기였겠지만. 너의 모습이 내게 다시 비춘 게 얼마만인지를 생각해 보면, 나도 네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네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내게 그렇게 소중하지만은 않을 거라구.

 

  아무튼,

  난 소년이었고 넌 소녀였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난 네가 보였어. 여름이었지. 햇살이 그렇게 밝아질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어. 아니, 햇살이 밝은 건 그렇다 치고, 유난히 햇살이 밝았는데도 그보다 더 빛나는 존재가 있다는 게 놀라웠달까. 그래. 그 빛나던 나날들의 한가운데서, 난 널 계속 바라보고 있었고, 넌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웃으면서 다녔지. 당연히 나에게 웃은 건 아니었지만, 난 아직도 기억해. 너에 대한 세세한 것까지도 다.

 

  이를테면 네가 가끔씩 피아노를 치고는 했다는 것처럼 말이야. 음악 시간마다 난 네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음악실로 서둘러 뛰어갔지. 일층에 있는 음악실 때문인지 가끔 내가 야구를 하고 있을 때면 네 피아노 소리가 들렸어. 그때는 그게 무슨 곡인지도 몰랐는데. 어쨌든 네가 치는 피아노 소리는 정말 듣기 좋았어. 나에겐 말야. 네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고, 난 야구보단 그 소리에 더 집중할 때가 많았지. 이따금씩 공을 놓치고선 혼나기도 했지만. “야 이 새끼야, 똑바로 안 봐?” 라는 말이 아직까지도 야구장에 서면 들리는 것 같아. 또 네 피아노 소리도…. 여전히 더 선명히 들리는 쪽은 네 피아노 소리이지만 말이야.

 

  나는 그때 야구에 푹 빠져 있었는데.

  글쎄, 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난 꽤 잘 했었다고. 아마 네가 피아노만 안 쳤어도 2학년 때 그만두지는 않았을 거야. 그때 코치님도 이렇게 말했어. “저 새낀 딴 생각만 안 하면 프로 뛰어도 될 거야!” 그 때마다 난 생각했지. ‘난 딴 생각해도 중간은 가는구나!’ 아, 이게 아니지. 아무튼,

 

  그래서 내가 너에게 말을 걸 일은 아예 없었어. 뭐랄까, 야구공과 피아노를 똑같이 ‘친다’라고 표현하는 게 내가 찾은 너와의 유일한 공통점이었달까. 우린 적어도 뭘 ‘치는’ 사람들이었잖아. 내가 처음 너에게 말을 걸었을 때를 기억해. 음, 비록 그때 난 야구소년이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하지만,

 

  손가락 안 아프냐?

  라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암튼 손가락 안 아프냐는 내 뜬금없는 질문에 깜짝 놀란 넌 날 홱 쳐다봤어. 그러다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지.

  생각보다 안 아파.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러면 어쩔 껀데 새끼야? 라고 지금의 나는 그때를 후회하지만, 어쨌든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고.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어? 그러다 내게는 엄청난 행운으로, 넌 내게 되물었지.

 

  넌 야구하면 손 안 아파?

  글러브 끼잖아.

  저번에 보니까 맨손으로 잡던데?

  아, 그건 급하면….

  푸하하. 그게 뭐야.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보게 된 네 웃는 모습이 피아노 앞이었어서 그랬을까. 암튼 난 갑자기 네 피아노 연주가 듣고 싶어졌어.

 

  심심한데 아무 곡이나 쳐봐.

  응?

  아니 뭐…. 맨날 치던 거 있잖아.

 

  넌 잠시 장난끼 가득한 미소를 짓고 날 빤히 보더니, 이내 손을 풀며 말했지.

  그래, 뭐. 어차피 치려던 차였고.

 

  그 소리가 텅 빈 방과 후의 음악실을 가득 채웠지. 처음엔 느렸다가, 갈수록 빨라지는 네 손가락이 뭔가 신기하기도 했어. 난 멍하니 계속 널 보고 있었어. 악보를 힐끔거리며 넌 열심히 치고 있었지. 그리고 그 모습은,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어. 분명히.

 

  네 연주가 끝나고 나는, 그냥 멍하니 널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아. 넌 그런 날 보고 수줍게 웃으며 말했지.

 

  잘 치디?

  어. 진짜 잘 치더라. 어떻게 그렇게 치지?

  흐흐. 별거 아니야. 너도 할 수 있어. 와봐.

  어? 잠깐만, 나는….

 

  하지만 네가 잡은 내 손목에 난 그냥 하려던 말을 멈춰버렸지. 그리고 네가 신나하는 모습이 왠지 귀엽다고 느끼며, 일단은 널 지켜봤어. 내 손을 건반 위에 놀려놓고, 네 작아 보이는 손가락으로 건반을 훑더니 그 중 하나를 잡아 주었지.

 

  눌러봐.

  응.

 

  묵직하지만 편한 음이 튀어나왔어.

 

  이건 레야.

  이게 레.

  그럼 다음 걸 눌렀다가-

  응.

  그렇지, 그건 미야.

  다시 올라가서- 시.

  응.

  두 칸 내려가. 솔.

  솔.

  하나 위로. 라.

  라.

  다시 솔.

  응.

 

  솔직히 나는 그때 음의 높낮이나, 분위기의 변환, 이런 것들은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았어. 그 때 내가 신경을 몰두하고 있었던 것은 오직, 네가 음을 짚어 주느라 만지작거리고 있던 내 손가락이었다고. 그렇게 차분한 노래를, 전혀 차분하지 않은 심장 박동으로, 난생 처음 연주해야 했다니.

 

  자, 그럼 봐. 이어서 치면-

 

  레미 시솔 라솔.

  뭐랄까, 갑자기 나는 내 손가락에서 음악으로 관심사가 넘어갔어. 짧은 음 배열이었지만, 너무 아름답고, 또 벅차는 느낌이었지. 넌 내 표정을 보고 살짝 미소짓더니, 그 이후의 부분을 계속 이어서 쳤어. 아름다운 음악이었지. 다시 넌 빛나기 시작했고. 내 쪽을 떠나지 않는 네 미소에 어쩔 줄 모르던 나는 그냥 네가 연주하는 음악의 한 부분이 되기로 했어. 너와 눈을 마주치고, 여름의 소리를 들었지.

 

  마지막으로 네가 레를 치고, 음악이 끝났어. 네게 빛을 빌려주던 태양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이제 네가 해봐.

  응?

  빨리.

 

  젠장. 사실 지금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난 그런 건 젬병이라고. 그래도 아까 네가 쳤던 곡을 잘 되새기면서, 나름대로 비슷하게 쳤어. 그러니까 넌 만족스러운 것처럼 씨익 웃더니, 내게 말했지.

 

  잘 치는데?

  생각보다 어렵네….

  그래도 그 정도면.

 

  그리고 넌 다시 피아노로 관심을 옮기려는 것 같았어. 하지만 난 여름의 소리가 정말 궁금했다고. 그래서 난 피아노를 치고 있던 네게 이렇게 물었지.

 

  근데 그 음악….

  응?

  뭐였어?

  뭐가?

 

  네가 갑자기 치던 피아노를 멈추고 내 말에 집중했었기 때문에 난 굉장히 뿌듯했지.

 

  네가 친 피아노곡. 제목이 뭐였냐고.

 

  그러자 넌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며 웃어보였어. 눈웃음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지.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

 

  살다 살다 노래 제목을 그렇게 짓는 경우가 있나 싶긴 했는데, 어쨌든 거기서 교양없이 그 생각을 입밖으로 내뱉기는 싫었고, 그 제목이 상황과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인지, 난 그걸 기억하기로 마음먹었지.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 뭐랄까, 그게 네가 나한테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단 말야.

 

  그게 뭐야. 푸하하.

 

  넌 살짝 얼굴이 붉어져서는 말했어.

 

  아, 아니. 원래 뉴에이지는 다 이렇단 말야.

  그래, 그래. 아무튼, 열심히 해라.

  어, 너도.

 

  넌 다시 피아노에 집중했고, 난 혹시 그 소리를 방해할까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왔지.

 

  사실 그 때 난 갈 수밖에 없었다고. 애초에 음악실로 야구공이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난 거기 없었을 거란 말야. 하필 야구공이 음악실로 들어갈 건 또 뭐람. 덕분에 난 너랑 말을 섞어보긴 했지만-

 

  이제 와서 너에게도 그게 좋은 일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미안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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