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세상이 생기고, 많은 혼란기를 거쳐 차츰 세상이 안정을 되찾아 갈 즈음. 세상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세 명의 황제가 세상을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기 시작했다. 불을 다스리는 사화국(死火國), 물을 다스리는 연호국(蓮淏國) 그리고 바람을 다스리는 초월국(草月國).
각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들은 자신이 속된 원소를 다스릴 수 있었으며 그들의 곁엔 늘 반려자가 있었다. 반려자는 따로 정해지지 않았으며 몸 속 어딘가에 놓여있을 자신을 뜻하는 낙인을 가진 사람이여야 했다. 황제의 반려자는 황제의 능력을 각성시키도록 도와주며, 그들이 폭주하지 않도록 제어시켜주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세상 어딘가에 있을 자신들의 반려를 찾고, 지켜야하는 순진한 세 황제의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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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한바탕의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갔다. 성 밖은 이미 쑥대밭이 되었고, 성 안 역시 온통 난리가 나있었다. 궁녀들이 바쁘게 정원을 청소하고, 일꾼들은 쓰러진 나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물을 다스리는 연호국이나 바람을 다스리는 초월국이였다면 이 정도까지 피해가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하,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네 놈 그 소리 때문에 귀에 딱지가 앉을 모양이다.”
불을 다스리는 나라, 사화국의 황제 ‘시우’. 신하의 진심이 담긴 걱정에도 그저 귀찮다는 듯 귀를 후벼 파며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시우는 이른 아침부터 전 날의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한창 정리 중인 정원에서 나오는 소음 아닌 소음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시우에겐 지금 같은 상황은 최악인 것이다.
“오늘은 어머니께서 조용하시군.”
시우가 살짝 비틀어진 웃음을 내보이며 말하자, 신하가 몸을 움찔, 떨었다.
“이봐, 자네는 어떤가?”
“예?”
“내 자질이 부족하여 아직도 반려가 안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저…….”
“그렇겠지. 아직 각성도 못한 부족한 놈이니까. 안 그런가?”
“아니 옵니다, 폐하!”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나 숙이는 꼴이란. 몸을 숙이며 대답하는 신하를 같잖다는 듯 바라본 시우는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손짓을 하자, 문 옆에 서있던 궁녀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들어오는 사람은 시우의 호위무사 ‘경’ 이었다. 그는 사화국 최연소 무관출신이며, 궁 안에서 시우가 가장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사람이었다. 경이 들어오자 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경! 무슨 일인가?”
“전하. 성문에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응?”
경의 말에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설명을 원한다는 듯 경을 바라보자, 경이 말했다.
“붉은 빛이 성 문에서 갑자기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웬 여자가…….”
“뭐?”
“전하께서 직접 가심이…….”
경의 말에 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겉옷을 챙겨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고개를 숙이던 신하가 경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어떤 자인지 확실치도 않은데 전하를 보내면 어쩌나!”
“전하께서 가셔야 합니다.”
“뭐?”
“그녀의 왼쪽 어깨에…….”
경이 자신을 잡은 신하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신하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경은 신하를 흘끗 보며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갔다.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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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의 피해가 큰 사화국과는 달리 평화로운 물을 다스리는 연호국. 하지만 그것은 성 밖의 일일뿐이었다.
쿠당탕탕!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지나가는 신하들이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시작인가. 그 소리의 시작은 황제의 침소였다. 보나마나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탁자가 넘어가는 소리일 것이다.
“더 이상 내 일에 관여하지 마시지요!”
“황제!”
“제 어머니의 일입니다. 대비께선 관여하실 수 없으십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박차고 나오는 연호국의 황제 ‘율’.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아하니 근처에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다는 생각에 궁녀들과 관료들은 모두 성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주먹을 세게 쥐고 벽을 한 대 치며 뒤돌아 자신의 서재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짝-. 발걸음을 돌리는 동시에 침소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율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보나마나 자신과 밤을 함께한 궁녀에게 뺨을 날린 것이다.
“황제!”
대비는 그대로 침소를 나와 율을 불렀다. 하지만 율은 뒤돌지 않았다.
“더 이상 미루실 수 없으실 겁니다!”
“그만하시라 했습니다. 제 반려는 제가 찾습니다.”
여전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율은 끝내 뒤돌지 않았다. 그대로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을 쫓아내고 거칠게 의자에 몸을 앉혔다. 도통 가라앉을 생각을 안 하는 짜증에 율이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차라리 이대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대로 모든 것이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아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 따라 율은 그 생각이 절실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화를 삭히고 있을 때 즈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
“전하, 연청이옵니다.”
“말 하거라.”
“속히 궁궐 연못으로 가셔야 할 듯합니다.”
그에 율이 들어오라 명했고, 연청은 문을 조심스레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자세히 말해보라 말하자 잠시 뜸을 들이던 연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이……연못에 기이한 현상이…….”
“무슨 일이냐, 자세히 좀 말해 보거라.”
“웬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하옵니다.”
“여자아이?”
“예, 아무리 건지려 해도 닿을 수 없어 모두들 애를 먹고 있습니다. 모두가 전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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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으로 다가갈수록 소란스러워지는 분위기에 율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윽고 연못에 다다르자 모든 신하들이 그의 뒤로 섰다. 율이 상체를 숙여 연못을 바라보았다. 보기에도 화려한 옷이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옷차림이었다. 양반들만 입고 다니던 푸른빛이 도는 커다란 도포와 그 안에는 온통 흰색인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허리엔 노리개와 각가지 장신구들이 매여 있었으며 물결에 퍼진 길고 고운 머리카락은 칠흑 같은 검은 색이였다. 소매 끝자락은 붉은 빛이었으며, 양반집 규수들만 신는다는 붉은 꽃신을 신고 있었다.
“참으로……기이한 소녀로다.”
율이 손을 뻗어 소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끌어올려 자신의 품 안에 안아버리자 궁녀들이 놀라며 저들끼리 소곤거렸다. 그러나 곧 연청의 눈짓에 수그러들었다.
“연청.”
“예, 전하.”
“이 아이를 데려가게.”
“예?”
“깨어나는 즉시 나에게 오도록 하고.”
연청은 율의 말에 잠시 의아했지만 그를 내보여선 안 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알겠다는 말과 함께 소녀를 안아 올려 비어있는 방으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소녀의 몸은 젖어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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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가 성 문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소란스러움에 자연스럽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성 문에 모여 있던 궁녀들과 관리들은 시우의 모습이 보이자 양 옆으로 갈라섰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낸 여자의 모습에 시우의 표정이 흥미롭게 변했다. 온 몸을 덮을 정도로 커다란 붉은 천을 두르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지금껏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던 사람의 모습이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입술, 하얀 얼굴이 신비로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시우가 성큼, 크게 한발자국 다가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아니면 벙어리인가?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
시우의 말에도 여자는 시우를 빤히 쳐다볼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답답해진 시우가 자세를 낮추어 여자와 눈을 마주했다. 그와 동시에 흘러내린 옷 사이로 보이는 마른 어깨 뼈. 그리고
“낙인?”
선명하게 찍힌 낙인이 보인다. 사화국의 문양이 그대로 찍혀있는 붉은 색의 낙인이었다. 시우는 놀란 표정을 애써 지우며, 손을 뻗어 여자의 어깨로 가져갔다. 그러나 여자의 어깨에 끝내 닿지 못했다. 보기에도 맑고 청아한 비. 그 비가 여자를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에 궁녀와 관리들이 놀라 뒷걸음질을 쳤고, 성에서 나온 경이 급히 시우의 앞을 막아서며 엄호를 했다.
“전하, 물러서십시오!”
“이……무슨……."
더욱 놀라운 것은 빗물이 여자의 몸에 닿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자는 잠시 멍하니 그 비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빗방울이 여자의 손 안으로 떨어졌다.
“가예…….”
여자가 말했다. 낯선 이름. 그에 시우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눈 꼬리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선.
“가예? 그것이 너의 이름인가?”
하지만 여전히 여자는 시우의 말에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이름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며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면 될 터.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진 시우가 낮추었던 몸을 거칠게 일으키며 뒤돌았다. 그리곤 옆에 서있던 궁녀들에게 소리쳤다.
“저 계집을 다락방에 가두어라!”
경은 시우의 말에 놀란 듯, 시우의 뒤를 따르며 그에게 말했다.
“하오나 전하……저 여인은…….”
어깨에 낙인이 찍혀있는 전하의 반려이옵니다. 차마 그 말을 내뱉기도 전, 작은 단도가 경의 목을 짓눌렀다. 검붉은 핏방울이 칼날에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경이 바짝 긴장을 하며 시우를 보았다. 자신은 그의 호위무사이자 최측근. 그가 모든 경계심을 풀고, 유일하게 편안하게 대하는 존재. 하지만 경은 알고 있었다. 그런 것쯤은 시우에게 있어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황제는 자신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저 계집에 대한 모든 결정은 내가 한다. 알겠느냐?”
“예, 전하…….”
경의 대답에 시우가 단도를 다시 품안에 감추고 그대로 서재를 향해 걸어갔다.
쉬고 싶다. 그 생각이 너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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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어전회의(御前會議)의 주제는 당연한 것처럼 어제 갑자기 성 문에 나타난 의문의 여자의 대해서였다. 낯선 이방인이라면 노예로 부려먹든, 죽이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의 어깨에는 낙인이 찍혀있었다. 그것은 황제의 반려라는 확실한 표식이었다.
“항아를 들이 거라.”
이름도 무엇도 모르는 그녀에게 남은 기억은 오직 ‘가예’라는 동생과 얼굴만 겨우 기억하는 잃어버린 언니였다. 온통 백지 상태인 그녀를 성 안 사람들은 ‘항아’(姮娥-달에 산다는 선녀)라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얼굴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도 같았다.
시우의 말에 궁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항아를 데리고 들어왔다. 궁녀들의 솜씨인 모양인지 그녀의 옷과 머리는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항아는 그런 옷이 불편한지 조금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궁녀가 그녀를 시우의 옆에 놓인 의자에 앉혀 놓자, 그제야 중신들은 그녀를 자세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몇 몇 관리들은 충격을 먹은듯한 표정을 지어보이기까지 했다.
“전하, 저 여인은 도대체…….”
“왜들 그러는가? 이 여인은 그대들의 말대로 달에서 내려온 선녀 같지 않은가?”
“하오나 전하. 폭풍우를 몰고 온 계집이옵니다. 전하의 반려가 되어선 안 됩니다!”
시우는 중신의 말에 화가 난 듯, 용좌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가 회의장 가득 울려 퍼졌다. 단순히 의지가 밀려나는 소리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서만큼은 그 무엇보다 공포감을 몰고 오는 소리였다. 그리고는 그 말을 꺼낸 중신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어디서 그런 말을 하는가! 나의 반려라는 낙인이 그대에겐 보이지 않는가? 어디서 계집이란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가!”
시우의 고함에 중신은 그대로 엎드린 채 연신 살려달라는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우의 눈엔 그저 하찮은 행동으로만 보였고, 결국 그는 병사들에 의해 처참히 끌려 나갔다. 중신의 고함을 들으면서도 시우는 항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낯설기만 한 상황에 긴장한 채 중신의 고함에 겁을 먹은 듯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 재미있었다.
“무서운가?”
“…….”
“동생과 길을 떠나오던 중, 헤어졌다고?”
그에 항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둘은 언니를 찾으러 가던 중, 헤어진 거고?”
그러자 다시 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시우는 비틀린 웃음을 내보였다. 오랜만에 흥미로운 물건이 나타났다. 아무리 날이 선 말을 해도 묵묵히 고개만 끄덕일 것 같았다.
“왜 넌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 너의 옷을 갈아입혀주던 궁녀들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하면서.”
“…….”
“널 다락방에 가둔 내가 무서운가? 아니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을 두려워하는 건가?”
시우는 이번에도 항아가 대답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우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그녀의 입술이 열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항아의 입이 열렸다. 시우는 일어나려던 몸을 다시 용좌에 앉힌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가예와 언니를 제외한 그 누구도 만난 적이 없어.”
“허?”
“나는 위험해, 그래서 숨어야만 해.”
눈을 마주하지 않고 말하는 모습이 흡사 인형 같았지만 시우는 그녀가 스스로 입을 열어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란 듯 보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이렇게 넓은 공간도 처음이고.”
“……이제야 말을 하는 군. 이젠 이름을 말할 수 있겠지?”
“이름 같은 거 없어.”
항아의 말에 시우의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렸다.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온다.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뒤를 경이 뒤따랐다. 시우가 용상에서 내려오면서 항아의 곁에 있던 궁녀에게 말했다.
“좀 더 단출한 옷을 입히어라, 너무 치렁치렁한 옷은 별로거든.”
“예, 전하.”
궁녀의 대답에 시우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대로 문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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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떠올랐다. 푸른 달이었다. 마치 달 속에 물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반나절이 되서야 여자는 눈을 떴다. 그녀가 눈을 뜬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있던 방으로 웬 남자가 들어왔다. 황금빛 장신구와 푸른 도포를 입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 같았다.
“누구……십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예?”
“누구냐, 넌. 누군데 남의 연못에 함부로 떠오르고 그러는 거지?”
화려한 겉모습 비해 너무 저급한 말투에 여자가 할 말을 잃은 듯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저 돈 많은 한량인가. 아니면 글공부를 게을리 하는 탐관오리인가. 여자의 고민이 짙어질 무렵, 남자의 뒤에 있던 신하가 도리어 소리치며 여자를 나무랐다.
“네 이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전하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느냐!”
“……전하?”
신하의 말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여자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연못과 우물. 푸른 달과 땅까지 쏟아지는 폭포수. 그리고 커다란 호수와 떠다니는 물고기들.
“……연호국?”
여자가 물으며 신하를 쳐다보자 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눈동자가 커지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신하의 옷은 관복. 관복을 입은 신하를 거느리는 자. 그렇다는 것은.
“연호국 황제, 율이다.”
“……이런.”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율이 뒷짐을 지며 그녀를 깔보듯 말했다.
“이젠 내가 묻지. 정체가 무엇이냐.”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여자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하필 흘러 들어와도 이곳으로 들어오다니. 완전 낭패였다. 여자가 짧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가예라 하옵니다.”
“가예? 진정 그것이 너의 이름이더냐?”
“예전 제가 신세지던 대감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율은 여자의 이름을 듣더니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자를 훑어보았다. 어째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차라리 옷이 누더기였다면 이해하기 쉬웠을 테지만 여자가 연못에서 입고 있던 옷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연청.”
“예, 전하.”
“이 계집이 처음 입고 있던 옷은 어디에 두었느냐.”
“궁녀들에게 보관하라 일러두었습니다.”
“……각인은? 있다하든?”
“송구스럽습니다. 어떠한 각인도 찾지 못했습니다.”
각인을 찾지 못 했다라……. 그렇다면 자신의 눈앞에 있던 여자는 운명적으로 만난 자신의 반려가 아닌 낯선 불청객이라는 것이다. 율은 연청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 계집이 어찌하여 연못에 떠올랐는지 조사 하거라.”
“예, 전하.”
“그리고.”
율이 가예를 쳐다보았다. 곱지 않은 시선에 가예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이름에 맞게 알아서 처분 하거라.”
그에 연청이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연청의 대답과 함께 율이 문을 열고 나갔다. 자신의 서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이번에도 아니다. 차라리 저 계집이 자신의 반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분명 밤이 오고, 아침이 찾아오며 대비가 또다시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긋지긋한 싸움이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 생각에 율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가예라…….”
괜한 곳에 화풀이를 하고 말 것이다.
“그 이름에 딱 어울리는 일을 시켜줘야겠군.”
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화나게 하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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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두 남녀는 각기 다른 책을 넘기며 기분 좋은 웃음을 내보였다. 그들은 하루에 시간을 조금씩 내서 서재에서 자신들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방금 궁녀가 들인 홍차의 시큼한 향이 바람을 타고 그들의 곁으로 날아왔다. 여자가 눈을 감고 홍차를 음미하자, 남자는 턱을 괴며 그녀를 응시했다.
“왜 그리 보십니까.”
“……참으로 곱습니다.”
남자의 말에 여자의 두 뺨이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남자는 한참을 웃더니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커다란 폭풍우가 왔었나 봅니다.”
“예?”
“바람의 동선이 어지럽습니다. 분명 사화국은 물난리가 났을 테지요.”
“아아.”
“걱정되십니까?”
여자가 고개를 저어댔다. 남자는 그저 웃으며 그녀를 바라 볼 뿐이었다. 초월국의 황제 ‘란’. 그는 세 나라 중 유일하게 반려가 있는 황제였다. 그의 반려 '청아'는 특별히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에겐 이 세상 제일가는 절세미인이었다. 적어도 그에겐 그러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곧 있으면 연회를 열어야 합니다.”
“아…….”
란의 말에 청아가 멍하니 란을 바라보았다. 12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선지 유난히 사람을 그리워하는 청아를 위해 란은 매달 마지막 날마다 연회를 열어주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청아는 그런 란에게 늘 감사해했다.
“그리 쳐다보지 마시지요.”
“하오나 전하…….”
“정인을 사랑하여 정인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은 게 사내의 마음이오.”
청아의 뺨이 더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란이 작은 웃음을 삼키며 그대로 청아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서재에 있던 궁녀들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란은 궁녀들의 시선이 모두 바닥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청아에게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청아는 놀란 듯 두 눈을 끔뻑이기만 했다.
밝은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