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라는 장소는 생명체들이 살고 있음에도 고요함과 평온함이 대부분을 이루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밤의 장막이 드리워질 때면, 그저 벌레들의 울음소리와 바람소리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소이다. 그리고 대륙 북동부에 위치한 거대한 크기의 안텔라 숲에서, 그런 일반적인 상식들을 무시하기로 결정한 이들이 있었다. 나무들 사이에서 검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달빛에 드러났다. 얼핏 보면 마구 뒤섞여 누가 누구랑 검을 맞대는지 보이지도 않았지만, 이내 검은색의 로브를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과 다갈색 망토의 두건을 깊게 눌러쓴 한 사람이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황후도 포기란 걸 모르는 여자군.”
침묵을 깨고 다갈색 망토에서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순백의 검이 월광을 두른 채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학습능력이 없는 것은 여전하고. 내가 지난번에 경고했을 텐데. 그동안은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지만, 한번만 더 나를 쫓아온다면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을 거라고. 내 말이 우습나 보지?”
차갑다 못해 서늘한 살기를 뿜어내는 목소리에 검은 로브들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한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말은 그 전에 실패했던 이들 모두가 들어왔던 말이라더군요.”
그렇게 말한 그가 두건을 벗자 짧은 금발과 푸른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의 모습을 본 다갈색 망토는 짧게 혀를 찼다.
“쯧. 붉은 매 용병단이 언제부터 황후의 개가 되었지?”
몇몇 검은 로브들이 으득 하고 이를 갈았지만, 금발의 남자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그는 다갈색 망토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스킨틸라 제국의 레아 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저희는 붉은 매 용병단이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단장 룬이라고 합니다. 황후와의 계약을 통해 이곳으로 온 것은 맞지만, 순전히 상호간의 이익에 의해 맺어진 관계이고 그녀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니 우리 단을 모욕하는 말씀은 삼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저희는 황녀님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바이고, 엘프들의 구역에서 괜한 소란을 벌이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조용히 저희를 따라와 주신다면 황녀님의 안전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그 말에 다갈색 망토가 두건을 벗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짧은 검은 머리카락과 그것보다 더 깊고 어두운 색의 두 눈동자가 룬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조그만 여성의 모습이었지만, 룬은 어째서인지 자신이 그 눈동자에 삼켜지는 느낌을 받았다. 레아라 불린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런 사람들이 기습도 모자라서 검을 휘둘렀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건가?”
"그건 엘프들의 구역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던 우리 용병들의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제가 대신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럼 황녀님, 이제 제 말에 대한 대답을......“
“잡담은 그만두고 본론만 얘기하지. 드래곤하트와 내 검이 목적인가? 늘 그래왔지만, 새삼 진절머리가 나는 군.”
본의 아니게 말이 끊어진 룬이 머쓱해하며 볼을 톡톡 두드리다가, 레아를 바라보았다.
“잘 아시는군요. 그럼 이제 저희를 따라 와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레아는 말없이 검을 바로 쥐며 룬과 용병들을 겨누었다. 룬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님. 부디 무모한 짓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리 황녀님이 검술에 능통하다고 하셔도 저와 용병들을 상대로 이기시리라는 가능성은 적습니다.”
“너희가 열 번째.”
뜬금없는 말에 룬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열 번째로 나를 암살하러 왔다. 그리고 아홉 번째로 나를 암살하러 온 이들은 너희의 몇 배나 되는 고위 귀족들의 사병들이었다.”
“......그런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릅니다, 저희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용병단을 모욕하는 말씀은 삼가 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나한테는 그저 숫자가 많고 적고의 차이일 뿐이야. 그러고 보니 나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했나?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 한 방 정도는 막을 수 있겠군.”
그 말에 몇몇 검은 로브들이 룬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이봐 룬, 저 여자의 건방을 어디까지 받아줘야 하는 거냐!”
“황후가 드래곤하트와 검만 상하게 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잖아! 죽여 버려!”
그들의 분노에 룬은 조용히 대꾸했다.
“여러분...... 저 분은 제국의 황녀십니다. 붉은 매의 철칙을 잊었습니까?”
낮은 목소리였지만 용병단 모두가 입을 다물게 만드는 힘이 깃들어있었다.
“여자와 어린아이, 약자에게 손대지 않는다. 그것이 언제나 우리 용병단의 첫 번째 규칙입니다. 잊지 마시길. 그러나......”
룬은 검을 들어올렸다.
“이번만은 예외로 해 드리겠습니다. 최대한 상처 없이 기절시키세요. 난폭하게 구는 사람은 제 검에 먼저 목이 떨어지실 겁니다. 상대는 제국군의 3분의 1 이상을 5년 동안 따돌린 실력자입니다. 방심하지 마시길.”
그 말과 동시에 수십 명의 검은 로브들이 레아에게 달려들었다. 레아는 양 손으로 검을 잡고, 검 끝이 위를 향하도록 들어올렸다. 맨 처음 그녀에게 달려갔던 로브들에게서 가지각색의 쇠붙이와 그에 반사된 섬광이 그녀에게 떨어지는 순간, 레아의 검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병장기들을 하나하나 눈 깜짝할 사이에 걷어낸 레아가 검 자루를 거꾸로 쥐고 역시 무기들을 걷어낸 속도에 뒤처지지 않을 만큼 빠르게 그들을 가격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동료들에 뒤따라오던 용병들은 당황하며 멈춰 섰다. 룬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내가 말 했을 텐데. 숫자의 차이일 뿐이라고.”
순백의 검에서 서서히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며 검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룬과 용병들은 경악했다.
“저건...... 소드 오러?”
“이런 미친! 저건 소드 마스터들의 경지에 오른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기술이잖아! 저런 새파란 젊은 애가,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그 경지에 올랐다고?”
“무슨 헛소리야! 대륙에 널린 게 소드 마스터인줄 알아? 눈속임이겠지! 전부 달려들어!”
사람의 마음이란 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면 대부분 그 상황을 부정한다. 용병들이 꼭 그 상황이었다. 룬은 그런 용병들을 말려 보려 했지만 이미 그들은 레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잠시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레아는 양손으로 쥔 검을 크게 휘둘렀다. 붉은 검기가 폭발하며 잔상을 남긴 채 흩날렸다. 순백의 검에 덧씌워진 적색 섬광이 용병들을 가격해나가기 시작했고, 힘찬 비명 뒤에 이어지는 침묵과 함께 이내 숲에는 룬과 레아만이 기절한 용병들을 발밑에 둔 채 서 있었다. 짧은 침묵을 깨고 레아가 입을 열었다.
“칼자루로만 가격했으니 죽지는 않았을 거다. 대륙의 삼각 중 하나라는 용병단이 왔길래 조금은 기대했건만.”
“황녀님이 소드 마스터라는 건 듣지 못했으니까요. 애초에 그 얘기를 들었다면 우리 용병단은 이 일을 수락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룬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검을 들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보던 레아가 조용히 물었다.
“진심이야?”
“우리 용병단은 받아들인 의뢰는 끝까지 완수합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실패했습니다. 그렇다고 단원들이 쓰러졌는데 부단장이나 돼서 가만히 있으면 체면이 말이 아니죠.”
“......어리석은 짓이야. 괜히 힘 빼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희는 실패했고, 나는 너희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어. 결정적으로......”
레아는 검을 들어 룬을 겨누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룬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듯이 웃었다.
“이런. 그렇게 티가 났나요.”
룬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검자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사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소드 마스터와 검을 맞댈 기회가 있겠습니까. 검사로서의 자존심..... 그리고 승부욕이라 해 두지요.”
레아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들었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원망하지 않도록.”
잠시 짧은 시선교환이 이루어졌고, 이내 두 사람의 검이 격렬하게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한 밤중의 안텔라 숲은 월광에 뒤덮이지 않았다. 나무 사이로 내려앉는 달빛 사이로 격렬하게 검을 맞부딪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달빛은 소리 없이 울부짖으며 칼날에 부서지고 흩어졌다.
카가각-
기괴한 쇳소리와 함께 부딪친 칼날에서 불꽃이 튀겼다.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은 이내 몇 번 더 검을 휘두르며 불꽃의 춤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팽팽히 대치하던 중 어느 순간 짧은 비명과 함께 피가 바람에 뒤섞이며 흩날렸다. 레아는 검에 묻어있던 피를 간결한 동작으로 털어내고는 자신의 발 옆에 누워있는 룬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만족했나?”
“뭐... 그렇...습니다. 진심을...다하시진 않은 것 같지만...”
깊게 베인 상처에서 천천히 흘러나오는 피를 한 손으로 막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룬은 더듬더듬 대꾸하며 미소를 지었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져 괴상한 표정이 만들어졌지만.
“그래도... 검을 다루는...이들이라면 한 번 쯤은...이르고 싶어 하는...경지에 이른 사람. 그것도 제국의 황녀님과 검을 맞대보았으니... 만족...합니다. 쿨럭... 쿨럭...”
말하는 것이 힘이 드는지 그의 말이 느려지자, 레아는 말없이 자신의 품에서 조그만 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들어있던 푸르스름한 액체를 룬의 상처에 좍 뿌렸다. 놀랍게도 상처가 작게 빛나며 조금씩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표정이 조금 편안해진 남자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이건... 성수?”
“소량이니 급속도로 낫지는 않겠지만 당장의 고통은 덜어주겠지.”
그리고 레아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에게 룬이 말했다.
“황녀님은 친절하시군요. 그것도 너무. 무례하게 충고 하나만 드리자면 황후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추격자들을 살려 보내시다가는, 언젠가는 정말 위험해지실 수 있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레아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아직 고쳐지지 않은 버릇 중 하나지. 그런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 내가 가끔은 원망스러워. 하지만 나 자신에게 약속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안타깝게 바라보던 룬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황녀님.”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잠시 망설이던 룬은 입을 열었다.
“오늘은 황후로 인해 서로 유쾌하지 않은 첫 만남이었지만...... 다음에는 부디 좋은 만남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 말에 레아는 흘깃 룬을 돌아보고는 다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룬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내 동료들이 전부 쓰러져 있는 광경을 보며 쓰게 웃다가 곁에 있던 나무로 기어가 몸을 기댔다.
“그러고 보니, 황녀님은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어디로 가시는 건지...... 그걸 물어보고 싶었는데.”
룬은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옴을 느꼈다. 룬은 황녀를 쫓아가 드래곤 하트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것과 깊이 잠들고 싶다는 욕망 중에 후자를 택했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의 저편 위로 아직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본 룬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