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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는 날지 않는다
작가 : 여름별밤
작품등록일 : 201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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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녀 (2)
작성일 : 17-11-22     조회 : 366     추천 : 2     분량 : 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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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룬과 헤어져 숲 속을 걷던 레아는 문득 그가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황녀님은 친절하시군요. 그것도 너무.

 

 그 말을 곱씹던 레아는 문득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되살리고 말았다. 애써 다른 생각을 해 보려 했지만 이미 그 기억은 그녀를 삼켜버린 후였다.

 

 

 

 

 “20년 전, 드래곤 로드(Dragon Lord)이자 블랙 드래곤 일족의 수장 아투스는 불의 제국 스킨틸라의 황제 아르도르, 엘프 여왕 테사나, 난쟁이들의 왕 브뤤의 도움을 받아 대악마 튀란누스를 쓰러트렸다. 아투스는 네 명의 대영웅들이 집결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아르도르에게 감사와 우정의 증표로 드래곤하트를 선물했고, 그 보물은 지금도 스킨틸라 제국과 드래곤 일족의 관계를 잘 나타내는 증거이다......”

 두꺼운 책을 무릎에 펼쳐들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읽던 여성이 조그맣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은은하게 감도는 붉은색의 머리칼과 짙은 다갈색 눈동자 속에는 쾌활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침대에 앉아있는 소녀가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며 찰랑거리는 긴 검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붉은 머리의 여자보다는 약간 어린 듯한 소녀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적발의 여자가 미소 지었다.

 “벌써 몇 번째 듣는 얘기인데도 질리지도 않으신가 봐요?”

 그 말에 흑발의 소녀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뭔가 두근거리지 않아? 우리 아버님이 드래곤 로드와 같은 엄청난 존재와 친구가 되다니! 무엇보다 난 아버님처럼 훌륭한 용사가 되고 싶어!”

 “훌륭한 용사가 되기 전에, 훌륭한 황제가 되시는 게 우선이에요.”

 적발의 여자가 흑발 소녀의 두 손을 살며시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흑발 소녀는 입을 비쭉 내밀며 중얼거렸다.

 “난 황제보다는 용사가 좋은 걸.”

 그 귀여운 모습에 적발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황녀님, 아르도르 폐하가 왜 훌륭한 용사라 불렸는지 아세요?”

 “우리 아버지? 음...... 드래곤 로드라는 위대한 존재와 친구가 되고, 대악마를 쓰러트렸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그것도 맞지만, 가장 훌륭한 것은 그 분이 황제로서 백성들을 먼저 굽어 살피셨기 때문이에요. 폐하께서는 훌륭한 용사이기 이전에 훌륭한 황제이셨어요. 그리고 황녀님은 그런 폐하의 자랑스러운 따님이고요. 본분을 잊지 마세요.”

 “하지만 아버님도 그렇고, 벨라 너도 그랬잖아. 내가 원하는 걸 하라고.”

 “그거야 어릴 때 하도 떼를 쓰시니까 폐하랑 제가 지쳐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때 말했던 거죠.”

 벨라라 불린 적발의 여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자, 흑발의 황녀가 두 눈을 반짝 빛내며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흐~응? 그으~래? 나보고 언제나 한 번 말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말했던 게 누구였더라?”

 말문이 막힌 벨라가 휘파람을 불며 무릎에 놓여있던 책을 들고 일어나자, 황녀는 재빨리 그녀의 허리에 매달렸다.

 “앗! 뭐하시는 거에요, 황녀님!”

 “흥! 어물쩍 황녀의 말을 넘기며 가려 하다니, 무례하구나!”

 “이...... 이럴 때만 황녀의 권위를 찾고!”

 “꺄하하! 권위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야! 자, 이제 내가 용사가 된다고 하면 반대할거야?”

 황녀의 손이 벨라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고, 벨라는 깔깔대며 몸을 이리 저리 비틀었다.

 “안할게요! 그러니까 이제 좀 내려오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녀는 폴짝 뛰며 벨라의 허리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턱을 약간 치켜들며 허리에 두 손을 올렸다.

 “나는 말이지, 용사가 되면 제일 먼저 악마를 쓰러트리고 싶어. 아버님처럼.”

 “안타깝지만 악마들과의 전쟁은 20년 전에 끝났답니다. 아르도르 폐하와 드래곤 로드 아투스님, 엘프 여왕 테사나님과 난쟁이들의 왕 브뤤님을 주축으로 한 이종족 연합군에게 패배한 이후 살아남은 악마들은 마계로 도망가거나 미궁에 숨어버렸죠. 그리고.”

 벨라가 손가락으로 황녀의 이마를 튕겼다. 통 하며 가볍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황녀가 울상을 지었다.

 “아파, 벨라!”

 “아프라고 때린 거 에요!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하시면서 악마랑 붙겠다는 위험천만한 소리가 나와요?”

 벨라의 야단에 황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헤헤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면 벨라가 가르쳐주면 되잖아.”

 “안돼요.”

 단호한 거절에 황녀는 또 다시 울상을 지었다.

 “왜?”

 “황녀님이 검을 들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요.”

 “뭐? 난 다 컸어!”

 “이제 열네 살 먹었으면서 뭘 컸다고... 아무튼 검을 가르쳐 드릴 수는 없어요.”

 “이익...... 좋아! 내가 검을 배우려는 이유를 알려 줄게!”

 “용사가 되신다면서요.”

 “그건 표면적인 이유고.”

 “흠...... 지금 저랑 거래를 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황녀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던 벨라가 말했다.

 “좋아요. 합당한 이유를 대시면 고려해보죠.”

 황녀는 잠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내가 검을 배우려는 이유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야.”

 “진부하지만 정석적인 대답이네요.”

 “난 진지해!”

 볼을 크게 부풀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황녀의 모습에 벨라는 풋 하고 웃어버렸다.

 “좋아요. 그렇지만 황녀님의 소중한 사람들 역시 저와 기사단이 잘 지켜드리고 있는데, 굳이 황녀님이 검을 드실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요?”

 “내가 너를 지켜줄게!”

 그 말에 벨라는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고백하시는 건가요? 아무리 황녀님이 독특하시지만 여자를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응!”

 당황스런 대답에 벨라는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황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벨라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누구보다 예쁘고, 누구보다 강해.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나 친절해. 그렇지만 그런 벨라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은 몇 없어. 아버님의 눈에 들어 이 황궁에 들어와 내 호위와 시중을 맡겼을 때부터, 루마 제 2 황후 가문의 사병들이 나를 무시하고 지나갔을 때 모조리 박살냈던 일, 강력하게 처벌을 주장하는 루마 측을 무시하고 아버님이 직접 황실 기사단원에 임명하셨던 일.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단장까지 오른 일. 그 일들로 인해 벨라 너를 보는 시선들은 곱지 않았지. 벨라 너는 겉으로는 항상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항상 외로워 보였어. 그 모습이 나의 옛 모습과 닮아보였어. 아버님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를 1순위 황위 계승자인 나였지만 루마 황후와 그녀를 따르는 많은 이들이 나를 황녀로 보지 않았기에,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항상 울고 있었어. 그러던 와중에 벨라 너를 만났어.”

 황녀의 목소리는 어느 샌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벨라는 그런 황녀의 얘기를 담담히 듣고 있었다.

 “내게 든든한 편이 생기고 난 후에 나는 변했어. 그 전보다 조금 더 많이, 즐겁게 웃을 수 있었어. 다시 웃을 수 있게 된 게 너무나 기뻤어. 그러니 이제는 내가 받은 것들을 너에게 돌려주고 싶어, 벨라.”

 황녀가 벨라를 껴안고 가슴께에 얼굴을 파묻었다. 벨라는 그저 황녀가 하는 행동에 몸을 맡겼다.

 “울고 싶으면 펑펑 울어도 돼. 힘이 들 때면 언제든지 내게 기대도 돼. 너에게 해를 끼치려는 이들로부터 너를 지켜줄게. 네가 가르쳐 준 검을 들고.”

 똑-

 황녀는 자신의 머리로 축축한 무엇인가 떨어진 것을 느꼈지만,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벨라의 품에서 빠져 나와 침대로 걸음을 옮기던 황녀는 뭔가 생각난 듯 침대 옆에 멈춰 서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아 물론.”

 황녀는 오른손의 검지를 치켜들고 좌우로 까딱거렸다.

 “기대는 건 내가 너보다 더 큰 후에! 알겠지?”

 그 말과 동시에 황녀는 등 뒤로 무언가가 자신을 짓누르는 걸 느끼며 중심을 잃고 갸우뚱거리며 침대로 엎어졌다. 그 바람에 푹신한 침대에 코를 박게 된 황녀는 양 팔을 허우적거렸다.

 “웁푸푸! 벨라! 나 숨 막혀!”

 그렇게 몇 번을 더 허우적거린 끝에 황녀는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헥...... 헥...... 죽는 줄 알았네.”

 그리고 황녀는 여전히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벨라를 돌아보았다. 이리저리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다갈색의 두 눈동자에서, 맑고 투명한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벨라.”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부른 황녀가 그녀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울지 마, 벨라.”

 그 말을 기폭제 삼아, 벨라는 황녀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끅끅대며 울기 시작했다. 한 밤의 황궁은, 한없이 우는 이와 그 눈물을 닦아주는 이 만이 깨어 있었다.

 

 

 

 

 빠지직-

 무언가가 부서지는 그 소리에 레아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발밑에 있던 마른 나뭇가지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레아는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빨리 발을 뗀 그녀는 문득 자신의 볼이 축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 손을 들어 얼굴을 닦아낸 레아는 손에 묻어나는 투명한 물방울들을 불 수 있었다.

 “벌써 10년이 지났건만.”

 레아는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도 너를 잊지 못하는구나, 벨라.”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동쪽 하늘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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