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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는 날지 않는다
작가 : 여름별밤
작품등록일 : 201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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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녀 (4)
작성일 : 17-11-23     조회 : 345     추천 : 2     분량 : 6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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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텔라 숲과 드라케니아의 경계를 이루는 것은 중부 대륙을 관통하는 험준한 지형의 거대한 산맥이었다. 트리볼타 산맥이라 불리는 그 곳에는 볼룬타스 고원이라는 명소가 있었는데, 바로 대악마를 봉인한 네 명의 대영웅들이 처음으로 집결한 장소였다. 그리고 그 전설적인 장소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큭!”

 “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제국군 몇 명이 순식간에 붉은 검기에 부딪쳐 나뒹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검은 갑옷의 백발의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군. 언제 저런 경지에 다다르셨단 말인가.”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제국군들의 사이에서 순백의 검을 눈부시게 휘두르는 레아가 있었다. 붉은 검기를 두른 그녀의 검이 제국군들의 창을 두 동강 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이 늙은이가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노력을 이리 허무하게 만드시다니. 하늘도 황녀님도 무심하시구먼.”

 스릉-

 서늘한 빛을 뿜으며 내며 뽑혀 나온 검이 낮게 울었다. 사납게 흩날리는 백발의 수염 사이로 주름투성이 입이 열렸다.

 “병사들을 물려라.”

 그 말을 들은 곁에 있던 부관 하나가 신호하자, 힘찬 나팔소리가 넓은 평원에 울려 퍼졌다. 이내 나팔소리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뒤로 물러선 제국군 군단과, 지친 기색도 없이 두 손으로 검을 짚고 서 있는 레아가 대치하게 되었다. 노장군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검을 집어넣고 발을 움직였다.

 “내가 직접 가겠다. 아무도 나서지 말도록.”

 “하지만 총사령관님! 위험합니다!”

 부관들의 만류에 노장군은 그들을 힐끗 돌아보더니,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평소에도 내가 그리 상대를 관찰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건만.”

 의아해하는 부관들에게 그는 말없이 쓰러져있는 제국병들을 가리켰다. 일제히 그들을 살펴보던 부관들은 이내 신음을 내뱉으며 일어나는 병사들을 보고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죽지 않았군요?”

 “대단하군......그 많은 병사들을 상대하면서도 기절만 시키다니.”

 부관들의 감탄사를 뒤로 하고 노장군은 레아에게 걸어가며 대꾸했다.

 “지난 5년간 황녀님께서 사람을 해치셨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네.”

 그렇게 말한 노장군은 몇 십 걸음을 더 걸어가다가 레아와의 거리를 불과 몇 걸음만을 남겨놓은 채 발을 멈췄다. 그런 그를 본 레아는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카탄님.”

 카탄이라 불린 노장군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정중하게 답했다.

 “제국 북부군 총사령관 카탄 드 파테이가 황녀님을 뵙습니다.”

 “10년 전 이후로...... 처음인가요?”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너무도 빠르군요, 시간은. 그나저나 소드 오러라니. 비공식이지만 대륙의 여섯 번째 소드 마스터의 탄생이로군요. 감축 드립니다, 황녀님.”

 “아직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기에는 이릅니다. 그저 운 좋게 훌륭한 스승을 뒀던 덕분이죠.”

 “허허. 이 늙은이는 그저 기본적인 것들만 잡아드렸을 뿐입니다. 저보다는......”

 말끝을 흐린 카탄은 잠시 망설인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가 훌륭한 스승이라 불릴 자격이 있겠지요.”

 조심스럽게 말을 끝맺은 노장군과 레아 사이에 짧은 침묵이 오갔다. 먼저 그 침묵을 깬 건 레아였다.

 “그냥 벨라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카탄.”

 “......그렇습니까.”

 또 한 번의 어색한 침묵이 오갔다. 이번에는 카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굳이 가셔야 하겠습니까.”

 “카탄. 저는 한 때 스승으로 모셨던 분과 검을 맞대고 싶지도 않고, 더군다나 아버지께 누구보다 한결같은 충성을 바치셨던 분이 황후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믿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아까 저를 상대한 제국병사들을 보고 당신은 아직 아버님의 곁에 서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이 저를 죽이실 생각이었다면 병사들에게 헝겊을 둘둘 감은 창 대신 활을 들게 했겠지요. 드래곤하트와 검을 상하게 하지 않고 단번에 끝내기에는 그 방법보다 나은 방법은 없으니까요.”

 레아의 말에 카탄은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히 대꾸했다.

 “글쎄요. 헝겊으로 만 창 역시 황녀님께서 지니신 보물들을 상하지 않게 하기에 제격이라 생각됩니다만.”

 “카탄. 황후의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를 막아섰다고 생각되지만, 이제 그만 비켜주세요. 형식상 저를 막아보려 하셨다면 이미 충분합니다.”

 그 말에 카탄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황녀님. 지금까지 하신 말씀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셨습니다.”

 의아해하는 레아에게 카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옛 전우의 딸이자 제자에게, 무엇보다 제국의 황녀에게 검을 들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것도 제국을 쥐락펴락하는 암여우에게 휘둘려서 말이죠. 하지만 드래곤하트와 검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진심입니다.”

 “......개인적인 욕망인가요?”

 “설마요. 이 늙은이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황가의 편에 서서 싸울 겁니다. 30년 전, 폐하와 함께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군요. 황후의 명에 따르지 않는다면 길을 비켜주셔야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 볼룬타스 고원에서 저를 기다리다가 공격 하셨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드래곤하트와 검도 가져가겠다고 하시고요.”

 무릎을 꿇었던 카탄이, 서서히 일어섰다.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두 눈동자가, 레아를 응시했다.

 “황제폐하께서 볼모로 잡혀계십니다. 드래곤하트와 검을 내놓지 않는다면, 폐하의 목숨은 장담하지 못 한다고 했습니다.”

 

 

 

 스킨틸라 제국의 수도 플람마. 그 수도의 중심에 위치한 황궁의 어느 방 안에서 커다란 탁상 위에 중부 대륙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이는 기품이 넘치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길고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는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었고, 입가에 미세하게 잡힌 잔주름만이 그녀의 나이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라우스 연방이라......”

 지도 위에 있던 길고 하얀 손가락이 움직이다가 멈춘 곳은 대륙의 동쪽에 길게 뻗어있는 국가들이었다.

 “어떻게 가던 드라케니아를 거쳐야 하는 군.”

 작게 한숨을 내쉰 여자가 탁상 옆에 있던 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그 말은 아투스님에게 제국군과 비공정을 갖다 바치겠다는 소리 같은데.”

 그 목소리에 여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아르도르 황제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드래곤 성체 한 마리를 얼마만큼의 제국군을 동원해야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루마?”

 “정확한 수치는 낼 수 없지만 많은 수가 동원돼야겠지요.”

 “그럼 우리 북부군과 남부군이 각각 한두 마리 정도의 용을 잡는다고 쳐볼까? 전부 용 사냥에 나선다면 최대 네 마리, 운이 좋으면 다섯 마리정도까지의 용을 잡을 수 있겠군? 그리고 우리 제국군 중 절반이상은 전멸한 상태일 테고, 3할 정도는 다시는 무기를 들 수 없는 몸이 되겠지. 남은 2할은 평생 후유증에 시달릴 테고. 아, 고위 귀족들의 사병들과 수도의 중앙군까지 동원하면 한두 마리 정도는 더 쓰러트릴 수 있으려나?”

 여자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황제는 다시 책에 시선을 돌린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물며 드래곤 로드를 상대하겠다......라. 아마 그 분을 상대하려면 조금 과장을 보태서 튀란누스가 다시 깨어나야 되겠지.”

 “30년 전 튀란누스를 쓰러트린 건 당신이었어요. 드래곤 로드가 아닌.”

 “하하하하하.”

 맑고도 또렷한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루마, 당신은 알고 있겠지. 남들은 독한 감기로 알고 있었지만, 내가 7년 전 갑작스레 쓰러졌던 진짜 이유를.”

 그 말에 루마라 불린 여자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르도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책을 내려놓고 옷에 달려 있던 단추를 풀었다. 이내 드러난 가슴에는 크고 짙은 검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단추를 다시 채운 아르도르가 말을 이어나갔다.

 “30년 전, 튀란누스와 아투스님이 격돌하자, 산봉우리 수십 개가 사라지고 생겨났지. 격렬한 전투 끝에 마침내 아투스님이 튀란누스를 쓰러트리고, 나는 그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은 일 이외에는 한 게 없어.”

 루마는 조용히 아르도르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먼지가 되어가는 대악마의 마지막 발악에, 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

 “그 이후로 다시는 황좌에 앉지 못하실 뻔 했죠. 다행히 어떤 사제가 막아주었지만. 7년 전에는 그 저주가 도진 거고.”

 “그래. 라크델 가의 딸이었지.”

 그 말을 끝으로 짧은 침묵이 오갔다. 이내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당신은 30년 전과 너무 달라졌어, 루마.”

 “당신은 30년 전과 너무 달라졌어요, 아르도르.”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응시했다. 서로에 대한 분노와, 슬픔과, 그 이외에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인 시선들이 뒤엉켰다.

 “내가 알던 순수하고 사랑스러웠던 루마 라크델이라는 소녀는 어디로 사라졌지? 황제가 쓰러진 틈을 타서 인질로 삼은 것도 모자라, 가문의 힘과 명성을 이용한 정권 장악에 내 딸을...... 차기 황제를 암살하려고까지 했다......라.”

 “황녀는 그렇게도 끔찍이 아끼시면서, 엘타는. 엘타에게는 왜 그렇게 해 주지 못했죠?”

 “그 아이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곳으로 보냈을 뿐이야.”

 “그 아이에게는 총사령관이라는 직위 따위보다는 그저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레아 역시 사랑이 필요했어! 어머니의 사랑이! 그런데 루마 당신은, 그 아이에게 그렇게까지 가혹한 짓을 해야만 했나?”

 그 말에 루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황녀가 표적이었지만 벨라라는 아이가 그렇게까지 목숨을 바쳐 황녀를 지켜낼 줄은. 뭐 그 이후로 악몽을 자주 꾸는 것 같다고는 들었지만.”

 “역시 당신이었군. 10년 전 그 사건의 배후는.”

 분노에 찬 황제의 눈이 조용히 불타올랐다. 루마는 그런 황제에게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럼 이제 제가 묻죠. 제가 알던 아르도르는 어디로 갔죠? 굶어죽는 백성들이 없도록 이 제국을 부강하게 만든다고 한 황제는 어디로 갔죠?”

 무어라 대답하려는 황제에게 루마는 차갑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아, 물론 제국을 부강하게 만든다고 한 약속은 지켰죠. 네, 대륙 최강의 제국이 되었죠. 가진 자는 평생 쓰지도 못할 재산을 가지고도 더 끌어 모으느라 눈에 핏발을 세우고, 가지지 못한 자는 빵 한조각 사지 못하며 죽어나가고 있는데도 제국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거군요. 영토의 절반 이상이 산맥을 끼고 농토가 없어 밀을 생산하지 못하는 데도 제국이라 불리기를 원하는군요. 그럼에도 영토를 넓힐 생각은 없는 너무나 착해 빠진 황제폐하와, 그 자리를 물려받았을지도 모르는 황녀님은 여전히 이름뿐인 제국의 황제 노릇을 하겠죠.”

 “그래서! 나와 레아를 죽이고 루마 당신이 황제라도 되겠다는 건가! 드래곤 로드를 쓰러트리고 대륙 동부의 라우스 연방을 침공하겠다고? 굶어죽는 제국민들을 위해서라면 대륙 전체가 피로 물들어도 상관없다는 얘기로군! 대륙을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하는 것은 30년 전 악마들과의 전쟁으로 충분했어!”

 황제의 분노를 가만히 받아낸 루마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백성들보다 다른 나라의 백성들이 우선시되는 건가요?”

 “지금의 평화를 깨트리고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겠다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지.”

 “그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건가요?”

 “당연한 걸 묻는군. 당신과 당신 가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알고 있지만, 나는 황제야.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걷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황제에 불과하죠.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당신을 없앨 수 있어요.”

 도발적인 말투에 아르도르는 그녀를 흘깃 보더니 내려놓은 책을 집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나를 죽여도 달라지는 건 없어, 루마. 라우스 연방으로 가기 전에 드라케니아에서 전멸할거야.”

 “확신이란 단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단어라고 말했죠.”

 “대마법사 소푸스가 했던 말이로군.”

 “어차피 드래곤하트와 검만 있으면 엘타의 황위 계승식이 가능해지죠. 그때가 되면 당신도 어쩔 수 없어요.”

 그 말에 아르도르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 말을 한지도 벌써 5년째로군? 내가 죽기 전에 황위 계승식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만. 이번에도 허탕인가 보군?”

 “......황녀가 소드 마스터에 도달한지는 몰랐으니까요.”

 아르도르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소드 마스터라고? 허 참. 벨라와 카탄의 가르침을 뛰어넘었을 줄이야.”

 그러면서 아르도르는 루마를 응시했다.

 “그래서 당신을 더더욱 용서할 수 없어. 벨라의 죽음에 관한 건은 레아가 돌아오면 그 아이에게 처벌을 맡기도록 하지.”

 “당신의 죽음이 빠를지, 그 아이의 귀환이 빠를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루마의 차가운 대답에 아르도르는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여전히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아르도르가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레아의 검에 쓰러지는 게 제일 빠를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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