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한밤중의 고원은 달빛과 별빛이 뒤섞여 곳곳에 피워놓은 불 사이로 내려앉는 야영지에서, 풀벌레들의 울음소리와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불완전한 침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여러 개의 모닥불 중 어느 한 곳에 소녀 하나가 앉아있었다. 무릎을 모아 눈만 살짝 내놓고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녀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에 불타는 호선을 그리며 부서져가는 불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레아는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곁에 있던 검의 자루를 움켜잡았다. 그러나 이내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안도하며 손의 힘을 풀었다.
“당신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군요.”
드래곤 로드 아투스의 아들이라고 했던가. 자신을 아테란이라 소개했었지. 소년은 레아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동석 좀 해도 되죠?"
“물론이죠.”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레아가 입을 열었다.
“마법을 못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편하게 대하세요. 그런 태도는 오히려 저에게 익숙하지 않아요. 드라케니아에서도 로드의 아들이 아닌 그저 드래곤들 중 한 마리로 살아왔으니까요.”
“로드의 아들이신데도?”
“드라케니아에서는 모두가 수평선위에 존재합니다. 애초에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다른 이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신과 관련된 일에만 충실하죠. 아버지는 대전쟁에서 드래곤들을 모은 구심점이었기에 드래곤 로드라 불릴 뿐 다른 드래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할 권리는 없습니다. 뭐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드래곤들은 많지만. 드래곤이 드래곤을 거느리는 법은 하나입니다. 압도적인 폭력으로 모두를 굴복시키는 법. 그러나 아무리 아버지라도 그런 건 불가능하죠. 아버지가 드래곤 일족 중 강한 편에 속하시긴 하지만, 가장 강한 드래곤은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아버지는 필요한 곳 이외에는 힘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 훌륭한 분이시군요.”
“네. 훌륭한 분이시죠. 아, 당신의 질문에서 너무 벗어난 것 같네요. 제가 마법을 못 쓰는 게 궁금하신 건가요?”
“불편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테란은 하하 웃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황녀님. 하지만 얼굴은 이미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얼굴인데요.”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레아의 눈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해주세요.”
“아까 제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마나에 관한 이야기......말인가요?”
“맞습니다. 마나가 불안정하게 흐르자, 아버지는 몸소 대륙을 돌아다니시면서 마나를 돌려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버지라도 마나의 비정상적인 흐름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마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드래곤족에게 이상 징후가 가장 많이 나타났죠.”
담담히 말을 꺼내는 아테란에게 레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 하는......”
“아닙니다. 물론 마법의 파괴력이나 효과는 그 전만큼 강하고 정확하지 않았지만 사용은 가능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죠. 알들이 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탄식을 내뱉는 레아에게 쓴웃음을 지어보인 아테란은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아버지가 마나의 흐름을 다시 잡아놓은 지금이야 해츨링(Hatchling)들이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지만 30년 전, 대전쟁 직후 태어난 해츨링은 제가 유일합니다.”
차마 말을 하지 못하는 레아를 흘깃 바라보더니, 아테란은 모닥불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몸에 흐르는 마나의 양이 인간 하위 마법사보다도 적다고 하더군요.”
작은 한숨을 내쉰 아테란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맨 처음에는 제 자신을 저주했습니다. 대전쟁의 영웅인, 그것도 드래곤 로드의 아들이 마법을 못 쓰다니. 마법을 배워도 사용하지 못하는 못난 아들이었는데도, 아버지는 묵묵히 마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좌절감에 빠져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중, 어느 날 폴리모프를 성공했습니다.”
“기쁘셨나요?”
레아의 물음에 아테란은 빙긋 웃어보였다.
“처음에는 기뻤지만, 점점 갈수록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게 무슨 도움이 되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버지는 그런 저를 보고 여행을 떠나보라고 하시더군요.”
“여행이요?”
“네. 저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인간, 엘프, 난쟁이...... 그러던 중 어느 늙은 마법사를 만났습니다.”
잠시 감회에 젖는 듯 아테란은 눈을 감았다.
“독특한 사람이었어요. 분명 늙고 마력도 미약하게 느껴지는 마법사였습니다. 하지만 저를 보자마자 드래곤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채고, 딱한 녀석이라고 혀를 차기까지 했죠. 돌이켜보면 어떻게 저의 정체를 눈치 챘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저에게 마법을 쓸 줄 몰라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전수해주었죠.”
“그게 뭐죠?”
“마법도구 제작.”
감탄하는 레아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아테란은 미소 지으며 다시 밤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뭐, 저는 마법을 사용할 줄 몰랐기에 마법을 불어넣을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마법도구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고 짜증이 났습니다. 인간의 기술에 불과한 것을 굳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하지만 마법을 못 쓰는 저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처음으로 간단한 마석등이 만들어졌습니다.”
“......잘됐네요.”
“그 마석등을 늙은 마법사가 보고 잘 만들어졌다며 칭찬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무엇인가를 스스로 해냈다는 그 기분. 그게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 그러면 안 되는 것은 없다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라......”
아테란의 말을 되뇌던 레아는 문득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 점은 저랑 비슷하네요.”
의아해하는 아테란을 돌아보며 레아가 웃었다.
“저 역시 5년 동안 살아남는 것에 매달려왔으니까요. 악착같이.”
그 말을 하며 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지요? 제국의 황녀라는 여자가 이렇게 떠돌고 있어요. 살아남기 위해. 정작 소중한 사람들은 지키지 못했으면서.”
그녀가 바라보는 모닥불은 여전히 춤을 추고 있었다. 아테란은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분에게 이런 걸 묻는 게 우습지만,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말씀하시죠.”
“제가 과연 황녀의 자격이 있는 걸까요?”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아테란은 이내 입을 열었다.
“그 물음에는 확신을 가지고 대답해 드리기 어렵군요. 대신 다른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흥미롭다는 듯이 레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대답을 주실 건가요?”
“황녀님에게 황녀의 자격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황녀님에게는 죽음이 여러 번 손길을 뻗었지요. 그것도 어린 나이 때부터 그런 일을 겪으시며 자라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테란은 마음을 굳힌 듯 레아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벨라......라고 했던가요. 황녀님을 목숨을 걸고 지켰던 여기사의 이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레아를 보며 아테란은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님 역시 지금 황후에게 억류되어있다고 했지요. 그 두 사람은 모두 황녀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황녀님은 이제 와서 자신의 자리에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레아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아테란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 옳지 않습니다, 황녀님. 당신을 믿고 지켜준 이들에 대한 배신이며, 당신을 죽이려 했던 황후에게도 지는 겁니다.”
“......그렇군요. 당신 말이 맞네요.”
모닥불의 불꽃이 크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빛이 약해지며 숨을 거두고 있었다. 아테란은 곁에 있던 나뭇가지를 집어넣어 불씨를 살리며 일어섰다.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한 것 같군요.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 푹 자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너무 늦게 들어가지는 마시길.”
그리고 몸을 돌리는 아테란에게 레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아테란.”
발걸음을 멈춘 아테란이 뒤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전 감사받을만한 일은 한 기억이 없습니다만.”
레아는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뇨. 정말 감사합니다, 아테란. 확신이 섰습니다.”
레아가 그녀의 곁에 있던 검을 움켜쥐었다. 순백의 검신이 모닥불과 별빛이 뒤섞인 빛에 휩싸여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반드시, 황후를 죽이겠습니다.”
그녀의 두 눈이 고요함과 광기에 물든 채 타오르고 있었다.
“저는 황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