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투스 해. 이름과는 달리 정작 고래는 많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바다에 떨어져 물드는 낙조에 홀린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그런 이들을 태운 가지각색의 유람선들은 한가로이 오후의 바다를 누비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나요?”
비공정의 선장실에서 엘타는 중얼거렸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무엇인가 둔탁하게 내려앉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몸을 돌린 엘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페. 잠시만이라도 휴식이란 걸 좀 가져 봐요.”
그의 앞에는 책상위에 놓인 두터운 종이뭉치와, 그것을 막 내려놓으며 하늘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여자가 있었다. 리페라 불린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우리는 여행을 온 게 아닙니다, 총사령관님. 부디 자중하시길.”
엘타는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고, 종이뭉치를 뒤적이다가 그중 한 장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가 리페에게 물었다,
“이건 황궁에 갔을 때 받았던 문서인가요? 인장이 찍혀있긴 하지만 제가 이런 내용의 문서를 받았던 기억은 없는데.”
“아, 흑사자 용병단에게 남부 수비를 인계한다는 내용의 문서로군요. 물론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만 임시적으로 맡게 되었지만요.”
그 말에 엘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용병단이요? 남부 수비는 북부군이 맡기로 되어있을 텐데?”
“......카탄님이 황후마마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흠. 명령 불복종......이란 건가요?”
“아니요. 카탄님 역시 황제폐하를 위해서 움직이시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용병단에게 남부 수비를 인계하신 건 다름 아닌 황후마마십니다.”
엘타는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혹 일어날지도 모를 사고를 사전에 방지하신다는 얘기군요. 하지만 오히려 카탄 총사령님의 화를 돋우는 꼴이네요. 이거 흑사자 용병단이 걱정되는 걸요?”
“......마치 카탄님이 흑사자 용병단을 무너트릴 거라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그 말에 엘타는 하하 웃었다.
“설마. 아무리 카탄님이라도 당장은 흑사자 용병단을 무너트리기라는 어렵겠지요. 오죽하면 대륙의 삼각이라 불리는 자들이겠습니까. 그러나......"
엘타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다시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어둠으로 뒤덮여가는 바다에, 유람선들이 하나 둘 불빛을 밝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누님이 합세하신다면 달라지겠지요.”
“......레아 황녀님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그 분이 소드 마스터가 되셨다고 하지만......”
“대륙의 다섯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최강이라 손꼽히는 검과, 3년간 제국군과 뛰어난 암살자들을 따돌렸던 검. 그것도 후자는 단 한명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둘이 뭉친다면 아무리 대륙의 삼각이라 불리는 용병단도 순식간에 쓸려나가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두 분이 합류했을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황녀님은 붉은 매 용병단과 마지막 전투를 벌인 이후로 그 어떤 곳에서도 눈에 띄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어디론가 피신하셨겠지요.”
그 말에 엘타는 고개를 저었다.
“카탄님이 숨겨주셨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생각해보세요. 두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어머니에 대한 강한 복수심을 품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황제폐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북부의 총사령관을 맡아 어머니의 감시 하에 계시고, 다른 한 사람은 어머니에 의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하나를 잃고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사제 관계입니다.”
리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사실로 판명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지만, 엘타의 말은 가능성이 매우 높은 가정상황이었다. 정말로 그 둘이 만났다면? 정말로 북부의 총사령관인 카탄이 황녀의 검과 드래곤하트를 빼앗으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황녀를 선두로 황궁으로 진격한다면?
“......그래도 대륙의 삼각이라 불리는 용병단이 전부 모였고, 그 외에도 이름난 용병단이 속속들이 모이고 있다 들었습니다. 아무리 황녀님과 카탄님, 그리고 북부군이라도 그들과 남아있는 중앙군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입니다.”
애써 불안함을 떨쳐내기 위해 담담히 말하는 리페에게 엘타는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 로드가 합류한다면?”
순간 리페는 온 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 했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진지한 엘타의 얼굴에 리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는 분명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아니, 사실이더라도 부정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어떤 근거로 자꾸 그런 기막힌 발상을 하시는 겁니까.”
“생각해보세요. 누님이 가지고 있는 보물들이, 황제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그것들이 원래는 누구의 것이었는지. 그리고 누님이 왜 제국 밖으로 필사적으로 도망가려 했는지. 그리고 카탄님과 누님이 만난다면 황제가 억류되어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누구에게 알릴지.”
이번에도 강하게 반박하려던 리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리페에게 엘타는 빙긋 웃어보였다.
“뭐, 너무 걱정은 마세요. 설사 정말로 그들이 모였다고 해도, 쉽사리 쳐들어오지는 못할 겁니다.”
“......병 주고 약 주십니까? 후, 좋습니다. 이번에는 왜 그런 생각을 하셨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리페에게 엘타는 또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슬픔을 담아내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황제폐하가 있지 않습니까. 좋은 의미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아버지를 데리고 계시는 분이 어머니이니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겠지요, 카탄님도.”
리페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엘타를 낳아 준 부모님들은 거의 갈라선 상태나 다름없고, 이복남매지만 어머니는 그의 누나를 죽이려 했다. 다행히 그녀는 무사히 도망쳤고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엘타의 말대로 카탄이 그녀를 따른다면? 거기에 드래곤 로드까지 합류하게 된다면? 리페는 애써 그 생각들을 떨쳐내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만약, 만약 용병단이 무너지고, 황후마마가 위험해지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황녀님을 상대하시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엘타는 잠시 리페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창틀을 짚고 있던 그의 손등의 핏줄들이 꿈틀거렸다.
“아니,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혹 그런 날이 오게 된다면......”
짙은 흑색 하늘에 하나 둘 별들이 수놓아지고 있었다.
“둘 중 하나는 다시는 저 별을 보지 못할 겁니다.”
스킨틸라의 수도 플람마에 위치한 여관. ‘드래곤 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 여관의 주인 존 막시웰은 30년 전 자신이 아직 소년이었던 시절에 겪었던 전쟁과, 그로 인해 대륙에 남겨진 참혹한 상처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악마들에 대한 깊은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던 터였다. 그 때문에 남은 악마들을 제국에서 대대적으로 소탕할 때 꽤 오랫동안, 그것도 자발적으로 제국군에 몸담았던 그였다. 그리고 10여 년 전 퇴역해 수도에 여관을 차린 그였다. 20여 년 동안 제국군 소속으로 많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맺은 인간관계 또한 다양했고, 그가 여관을 개장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자연스레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용병도 있었고, 제국군도 있었으며 엘프, 난쟁이, 오크처럼 다양한 종족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만큼, ‘드래곤 본’은 얼마 가지 않아 제국 최대의 여관으로 성장했고 모여든 인원은 그 곳에서 많은 수다를 떨었다. 다양한 주제가 오고 갔지만 가장 많이 들리는 주제는 뭐니 뭐니 해도 용병단이었다. 대전쟁 이후 대륙의 여러 국가들은 네 영웅의 주도 하에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그건 ‘국가’에게만 해당되는 조건이었지 용병단은 그렇지 않았다. 그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이들이 그들 용병단이었기에. 심지어 몇몇 용병단은 대전쟁 당시 악마들을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기에 그들의 힘은 막강해졌다. 게다가 규모도 어마어마했기에 국가에서도 쉽사리 건드릴 수가 없었고, 이름만 용병단이지 하는 짓은 개망나니 같은 집단들이 대다수였다. 그렇게 용병단들이 대륙의 전쟁영웅들에서 골치 아픈 존재가 되어가던 어느 날, 홀연히 세 용병단이 나타났다. 각기 붉은 매 용병단, 흑사자 용병단, 은빛늑대 용병단이라 자신들을 칭하던 그들은 용병단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자들을 하나 둘 박살내기 시작했고, 이내 대륙에서 ‘가짜’ 용병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대륙의 삼각이라 부르며 칭송하기 시작했고, 이내 그들을 모르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당연히 온갖 정보가 모여드는 ‘드래곤 본’의 주인 존 역시 그 이름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건 그만이 그런 게 아니었다. ‘드래곤 본’의 안에서 술을 마시며 안주를 뜯거나, 왁자지껄하게 떠들거나 그 소음 속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들에게 시선을 보내며 경악했다. 여관의 중앙에 서 있는 이들은 인간, 엘프, 난쟁이, 오크 등 여러 종족이 뒤섞여 함께 서 있었고 복장 역시 다양했다. 하지만 어떤 복장이든 그들의 가슴께에 은백색의 늑대 문양이 새겨져있다는 점은 모두 같았다. 무엇보다 시선을 끈 것은 그들의 앞에 서 있는 한 인간 여자였다. 긴 붉은 머리카락과 짙은 다갈색 눈이 인상적인 여자였는데, 복장이 자유로운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긴 망토가 달린 은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제국군 소속이었던 존에게도 익숙한 갑옷이었다. 그녀의 어깨에는 늑대 머리를 형상화한 견갑이 달려있었다.
“저......”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존을 불렀고,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남는 방이 있는지 궁금해서요.”
붉은 머리의 여자가 뒷짐을 진 채 방긋 웃었고, 존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산대 위에 놓여있던 장부를 펼쳐들며 되물었다.
“몇 명이죠?”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에 여관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저러니까 아내밖에 모르는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 거라는 둥, 아내가 있어도 보통은 저런 미인에게 자연스레 잡담을 건네지 않냐는 둥, 존이 네놈 같은 난봉꾼인 줄 아냐는 둥 각자 하고 싶은 말과 함께 자신들의 일로 돌아갔다. 그 소음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 단원들이 보시다시피 인원수도 꽤 되고 종족도 다양해서...... 못해도 방 열 개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알겠습니다. 식사는 하시겠습니까?”
“아, 다행히 방이 남아있나 보군요. 그리고 식사도 좋지만 우선 좀 씻고 싶은데. 목욕도 가능한가요?”
“얼마든지. 목욕탕은 복도 왼쪽이고 온천은 복도 오른쪽입니다.”
존이 장부에 눈을 고정시킨 채 뻗은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여관의 한 쪽에 위치한, 두 갈래로 나눠진 복도였다.
“온천! 온천도 있나요?”
갑작스럽게 톤이 올라간 그녀의 목소리에 꽤 놀란 듯이 그녀를 바라본 존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요금은 선불이고요. 방 열 개. 2천 페투니아입니다. 식사와 목욕비 역시 포함됩니다.”
갑작스럽게 올라간 자신의 목소리에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던 여자는 존의 말에 곁에 있던 오크에게 눈짓했고, 그와 동시에 존의 곁에 묵직한 주머니가 던져졌다. 주머니를 열어 본 존은 얼굴을 찌푸렸다.
“잘못 계산하신 것 같은데요. 이건 너무 많......”
“제국군 소속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20년 동안.”
그 말에 존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다 지난 일일 뿐입니다.”
“그 20년 동안, 여러 사람들과 연을 맺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제국민뿐만이 아니죠. 가까운 시데랄리스 왕국의 사람들도 있고, 오크도 있고, 난쟁이도 있으며 엘븐퀸덤의 엘프, 심지어는 저 멀리 라우스 연방의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습니다. 내 아내만 해도 네불라의 무녀 출신이니까요.”
“그런 만큼, 당신은 많은 정보를 쥐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요.”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 정보를 사고 싶습니다.”
존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턱을 들며 말했다.
“말해보시죠.”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황녀님의 행방을 알 수 있습니까?”
“황녀님이라면 황가의 가보를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으셨습니까. 그 때문에 제국에서 계속해서 그녀를 찾고 있고.”
“......그렇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존은 의아해하며 대꾸했다.
“뭔가 제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나본데, 제가 아는 정보는 여기까지입니다. 애초에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는 저도 잘 모릅니다. 아무리 제가 제국군에 오랫동안 몸담았다 해도 7년 전 황제폐하가 쓰러진 이후로는 황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잘 들려오지 않거든요. 헛소문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이 엄해진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몸을 돌렸다. 존이 돈주머니가 그대로 놓여있는 것을 보고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됐습니다. 그냥 가지세요. 정보비로 드리는 겁니다.”
이내 온천으로 가는 복도로 사라진 그녀와 그녀의 단원들을 보며 존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보비라......”
존은 쓰게 웃었다.
“거짓정보를 주고 돈을 받기에는 내가 너무 미안한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