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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는 날지 않는다
작가 : 여름별밤
작품등록일 : 201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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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을 대하는 자세 (3)
작성일 : 17-12-02     조회 : 367     추천 : 0     분량 : 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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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의 남동쪽에 위치한 임베르는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하기로 유명했다. 이름 그대로 연중 해가 뜨는 날이 거의 없고 대륙에서도 가장 많은 강수량을 자랑하기 때문에, 웬만한 철은 그곳에서 버티지 못했다. 자연스레 빗속에서도 오래 가는 철을 만들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 곳의 대장장이들은 난쟁이들과 맞먹는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리고 현재 제국 남부군의 사령관 중 하나인 리페는 어렴풋이 보이는 임베르의 먹구름들을 바라본 채 불어오는 바람을 받으며 비룡들과 함께 서 있었다. 비공정의 출입구가 열린 상태였는데. 그녀의 발밑에는 또 다른 비룡들이 등 위에 마정석을 싣고 날아가고 있었다.

 “......교대.”

 그녀의 명령에 비룡들의 곁에 있던 제국군 하나가 들고 있던 뿔피리를 길게 불었다. 다른 비공정에서도 연속해서 그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소리에 마정석을 싣고 있던 비룡들이 대열을 맞춰 출입구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기하고 있던 제국군들은 들어온 비룡들의 등 위에 있는 마정석을 재빨리 끌어내리고는, 다른 비룡들을 일제히 내보내기 시작했다. 무게를 맞추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대로 임베르의 경계까지 진격합니다.”

 “사령관님.”

 바람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에 리페는 고개를 돌렸다. 콧수염을 보기 좋게 기른 중년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제루스?”

 “저, 걱정이 되는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임베르는 라우스 연방에 속해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연방 자체와 전쟁을 벌이겠다는 얘기고요.”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아, 혹시 총사령관님의 판단을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 그런 말인가요? 저도 맨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임베르에 닿은 걸 보고 있...... ”

 제루스라 불린 중년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심이야 이미 지운지 오랩니다. 제가 걱정되는 건, 그 연방에 네불라도 속해있지 않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리페를 보며 제루스가 말을 이었다.

 “그 네불라가 어떤 나라인지 잘 아시잖습니까.”

 “무녀들의 나라죠.”

 “그 무녀들이 미래를 완전히 알아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어떤 위험을 감지하고 대비를 해 놓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말에 리페는 미소 지었다.

 “저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닙니다. 그리고 총사령관님께 말씀드렸었죠.”

 “그런데도 그대로 가는 겁니까?”

 리페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총사령관님을 믿고 따라와 주세요.”

 제루스는 여전히 걱정된다는 얼굴이었지만, 더 말하지는 않은 채 비룡들과 마정석을 정리하느라 바쁜 제국군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채 리페는 제루스에 의해 살아난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총사령관님. 네불라의 무녀들이 우리가 침공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지 않았을까요?’

 ‘역시 그게 걱정인가요.’

 ‘아무래도 대비를 해 놓고 있다면 우리 측의 피해도 만만찮을 텐데요. 게다가 연방을 정복하려면 제일 먼저 마주해야 할 상대는 임베르입니다. 그 곳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아실 텐데요.’

 ‘알죠. 난쟁이들에 맞먹는 대장장이들이라 불릴 정도니.’

 ‘그걸 아시는 분이면, 대책도 있겠군요.’

 ‘아니요. 이번에는 없습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겁니까, 아니면 총사령관님은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하며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걸 좋아하시는 변태이셨습니까.’

 ‘......둘 다 아닙니다.’

 ‘그럼? 우리 제국군이 아무 피해도 받지 않고 임베르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씀이십니까?’

 ‘음.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게 좋겠네요. 확실한 건,’

 그 말과 함께 엘타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우리는 아무런 피해 없이 임베르의 경계까지는 닿을 수 있습니다. 전투가 일어나면 희생은 있겠지만. 그때는 리페가 활약할 시간이 오겠네요.’

 엘타가 미소 지었다.

 ‘그러니 절 믿고 따라와 주세요.’

 

 

 

 

 리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미소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네.”

 그녀는 몸을 돌려 출입구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섰다.

 “그리고 그걸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도 달라진 게 없고.”

 리페가 곁에 있던 제국군 하나에게 눈짓하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스태프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나무를 깎아 만든 스태프 끝에 보석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닮은 색의 보석이었는데, 둥근 구슬 모양으로 다듬어져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리페가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임베르의 먹구름들은 보다 선명해진 모습으로 제국군의 앞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총사령관님이나 저나 개인적인 원한은 없지만......”

 리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다 한 사람의 일그러진 정의 때문이군요.”

 그녀의 안타까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공정들에서 흘러나오는 뿔피리 소리에 비룡들은 일제히 횡으로 나란히 줄을 맞출 뿐이었다. 푸른 보석이 먹구름을 향하도록 스태프를 천천히 들어 올린 리페의 입이 열렸다.

 “......그대의 불은 우리를 감싸고”

 보석에서 그것 자체가 띠는 푸른빛과 대조되는 진홍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대의 손끝에서 버려졌던 타오르는 꽃잎이 흩날릴 때가 되었노라.”

 리페의 하늘빛 머리카락이 광풍에 흩날리고, 붉은 눈동자는 점점 짙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내려앉음이 마땅하다.”

 담담히 내뱉은 말을 끝으로, 그녀의 스태프 끝에서 훅 타오른 불꽃은 이내 일렬로 늘어서 있던 비공정과 비룡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붉은 불꽃을 두른 비공정들을 선두로, 수백여마리의 비룡들이 그 뒤를 쫓아 일제히 먹구름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임베르의 검은 하늘에, 붉은 재앙이 펼쳐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레아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난쟁이들이나 멍하니 서 있는 아우카에게 그런 감정이 든다는 것은 아니었다. 흙에 두 손을 대고 눈을 감고 있는 루넬리아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브뤤과 아테란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의 앞에는 그녀가 분명히 베어 넘겼을 악마들과 그들의 피로 얼룩진 난쟁이들의 공방의 모습이 보여야 할 터였다. 허나 그녀가 베어 넘긴 악마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곳곳에 엉망으로 튀어 말라붙은 피와 격렬한 전투(를 가장한 레아의 검기)로 부서진 돌덩이와 꺾이고 부러진 나뭇가지들만이 널려 있을 뿐이었다. 아테란이 자신의 주위에서 열 걸음 이상 떨어지지 않는 조건으로 따라오도록 허락했지만, 이런 상태면 자신이 따라온 의미가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헤르키나라는 자가 한 짓인가요?”

 브뤤과 아테란에게 다가간 레아가 말했다. 아테란 역시 볼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요.”

 그런 그를 보며 브뤤이 물었다.

 “자네 말대로 이곳에 오기도 했겠다, 이제 말해주시게나. 도대체 자네는 헤르키나라는 몽마를 어떻게 알고 있으며, 그녀가 이 일을 꾸몄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과거에 제가 잠시 대륙을 여행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브뤤과 레아에게 아테란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 잠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브뤤과 레아 두 사람은 그가 어째서 몽마의 여왕과 만나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루넬리아가 한 발 빨랐다.

 “아무래도 정령들이 근처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군요. 정보야 알아냈지만 그래도 악마들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섭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는 두 사람에게 의아한 표정을 보내던 루넬리아를 뒤로하고, 아테란이 조용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루넬리아.”

 그리고 아테란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브뤤과 레아에게 건네주었다. 둘의 손바닥 위에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푸른 보석이 각각 놓여있었다.

 “지금부터 두 분은 그 보석을 절대 놓치셔서는 안 됩니다.”

 그제야 레아와 브뤤, 루넬리아는 그들의 주위를 둘러싼 옅은 안개를 볼 수 있었다.

 “언제......!”

 “망할. 그 헤르키나라는 여자의 수작인가.”

 레아와 브뤤이 각자 안개에 대한 소감을 내뱉고, 루넬리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차, 아우카가!”

 “전 괜찮아요. 아테란님 말대로 엘프는 마법에 저항하는 힘이 다른 종족보다 월등하니. 저보다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그들에게 걸어오는 아우카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저쪽이 문제 아닐까요?”

 아우카의 고개가 가리킨 방향을 본 일행은 한숨을 내쉬었다. 옅은 안개 속에서, 초점을 잃은 눈동자들이 서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레아의 손에 쓰러졌던 악마들을 묻어주려고 가져온 삽과 곡괭이가 들려있었다. 삽과 곡괭이는 바위를 걷어내고 흙을 파헤치기에 굉장히 적합한 도구였고, 그들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 바위를 파내야 하는 난쟁이들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고의 대장장이인 그들의 손에서 탄생한 삽과 곡괭이는 인간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단단함을 자랑하고 있었고, 원래 목적과는 다른 용도로 사용될 것 같다는 느낌은 레아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이 안개가 저런 상태를 만드는 건가?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고. 아무래도 방법은 하나뿐인 것 같군.”

 “네. 이 안개를 불러낸 사람을 찾아야겠지요.”

 브뤤의 말에 간단히 대답한 아테란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저런 상태의 난쟁이들이 막는다면 힘들기는 하겠군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삽과 곡괭이를 들고 다가오던 난쟁이들의 행진이 멈췄다. 땅바닥에 무릎까지 파묻힌 이들은 가차 없이 들고 있던 도구들로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루넬리아는 두 손을 흙에 대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파헤치려는 자와 묻으려는 자의 공방전에 아우카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루넬리아가 막아주겠군요. 자, 그럼 우리는 이제......”

 그때 아우카의 가슴으로 한줄기 섬광이 날아들었고, 레아는 망설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푸른 보석을 집어던졌다.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푸른빛을 흩뿌리며 허공에서 박살난 보석과 함께 레아는 어느새 자신의 주위에 있던 일행이 사라진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쓰게 웃었다.

 “이런. 돌아가면 잔소리 좀 듣겠는 걸.”

 동시에 검을 뽑고 몸을 돌려 뒤에서 날아드는 검을 받아낸 그녀는 검은 두건 속의 짙은 어둠을 볼 수 있었다.

 “악취미인걸. 이렇게 한명씩 떨어트려 놓고 뒤를 치려고?”

 손에 힘을 주어 검을 튕겨낸 그녀는 자신의 검을 쥐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럼 어디 그 얼굴 좀 볼까. 여왕님.”

 순백의 검이 두건을 향해 날아들었고, 정확히 두건이 찢겼다. 그리고 레아는 자신의 손에 억지로 힘을 쥐어짜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검을 떨어트릴 것 같았기에.

 “......이건 악취미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도 아니네.”

 애써 태연한 척을 해 봐도 목소리와 두 팔이 격렬하게 떨리는 건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두 눈에 들어온 건, 붉은 머리카락과 짙은 다갈색 눈동자. 그녀가 가장 잊고 싶어 하는 사람이자 가장 그리워하는 사람.

 “벨라.”

 그 말과 동시에 전직 황실 기사단장의 검이 레아에게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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