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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는 날지 않는다
작가 : 여름별밤
작품등록일 : 201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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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을 대하는 자세 (4)
작성일 : 17-12-03     조회 : 372     추천 : 2     분량 : 5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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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베르에 사는 제리라는 남자는 올해로 마흔이 되었으며, 임베르의 남부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고 소꿉친구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는 평범한 대장장이였다. 그리고 현재 그는 살아가면서 한 번도 겪지 못한 일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평소 꾸물거리는 먹구름이 드높은 곳에서 유유히 흘러가며 번개와 비와 바람에 희롱당하며 짙은 회색으로 칠해져 있어야할 하늘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곳에 떠 있는 비공정과 비룡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불꽃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불꽃은 상공 수백 미터에서 자신들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한 점 남기지 않는 비와 바람, 번개의 춤 속에서 비공정들과 비룡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이미 마을의 사람들은 평소와는 다른 이질적인 모습에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며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저건 제국군의 비공정 아니야?”

 “어째서 저들이 우리 마을에......”

 제리 역시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는 이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먼저 마무리하기로 결정했고 다시 자신의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그는 촌장이 맡긴 검 한 자루를 손질하고 있는 중이었다. 십 수 년 전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그는 평소 마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고, 그 인품에 감동받은 이들이 그를 촌장에 추대했다. 과거를 알 수 없는 그에게는 젊었을 적에는 연방정부의 꽤 높은 자리를 맡고 있었다, 제국군 사령관 출신이었다, 전설적인 용사였는데 동료들을 잃고 그 상처로 용사를 때려 치고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등의 소문이 따라다녔고, 정작 촌장 본인은 그런 소문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사람 좋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제리 역시 그 소문의 진위가 궁금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손님의 자격으로 검을 맡겼고 자신은 그 일에만 충실하자고 다짐했던 터였다. 그리고 제리는 알 수 있었다. 검을 이루고 있는 재료가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도 몇 없는 운철이라는 것을.

 “도대체 뭐하는 분이셨는지 원.”

 그 말과 함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망치로 왼손으로 잡고 있는 검을 내리치던 그는 몸 전체가 울리는 굉음에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고, 수십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집 한 채가 통째로 박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흩날리는 분진 사이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고, 이내 곳곳에서 그런 비슷한 풍경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리는 망설임 없이 집안에 들어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의 뒷산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굉음과 함께 치솟는 불길, 그리고 그 사이로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제리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 한 사람을 볼 수 있었고, 아내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뒷산으로 갈 때까지 멈추지 마라는 당부와 함께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도달한 그가 입을 열었다.

 “촌장님! 뭐하시는 겝니까! 살고 싶으시면 뛰세요!”

 검은 포탄이 쏟아지고 있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던 여성이 고개를 돌렸다. 흩날리고 있는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버렸지만 벽안만큼은 세월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 깊고 푸르렀다.

 “제리로군요. 아까 가족들이랑 뛰어가는 것 같던데.”

 “지금 그런 말 할 시간도 아깝......”

 제리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떠밀린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두 팔을 휘저었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폭발과 함께 먼지가 흩날리고 있었다. 기겁하던 그는 문득 허전함을 느꼈고, 촌장이라 불린 노파의 두 손에는 제리가 두드리고 있던 검과 망치가 들려 있는 것을 보고 허전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제국군의 기습에 놀라 두드리고 있던 망치와 검을 그대로 들고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난데없는 괴성에 그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토해낸 불덩이가 목표물에서 빗나가버리자 단단히 화가 난 비룡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비룡의 입에서 두 번째 불덩이가 쏘아졌다. 동시에 촌장의 손에서 튀어나간 망치가 불덩이와 부딪치며 허공에서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산산조각 나다못해 흔적도 없이 불타버린 망치에 망연자실해 있는 제리에게 촌장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나중에 망치 값도 따로 지불해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촌장이 가볍게 몇 걸음을 내딛는가 싶더니, 이내 붉은 선혈이 튀며 제리의 앞에 거대한 비룡의 머리가 묵직한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선 제리에게 피 묻은 검 을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촌장은 말을 이었다.

 “뒷산으로 도망치세요. 살고 싶다면.”

 그러나 촌장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군요. 정정하겠습니다.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여전히 자비 없는 포탄의 빗속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망치기에는 늦은 것 같으니.”

 그들의 앞에 이글거리는 눈동자 두 쌍이 내려앉았다. 때마침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에 차갑게 식어가는 동족의 시체에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더욱 불타오르고 괴성은 더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제리는 당장 쓰러져서 죽은 척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묻어두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습니까? 아니, 그것보다 촌장님은 대체 뭐하시던 분입니까.”

 촌장의 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그녀가 비룡들을 마주보았다.

 “첫 번째 질문에는 확실하게 대답해드릴 수 없군요. 두 번째 질문은......”

 검이 빠르게 호선을 그리며 묻어있던 피가 떨어져 나갔다.

 “그냥 평범한 촌장이라고 해둘까요.”

 두 마리의 비룡과, 백발의 노파가 빗속에서 격돌했다.

 

 

 

 

 레아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자연스레 그녀의 자세는 무너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검은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레아의 몸에 하나 둘 붉은 상처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느낄 새가 없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지 않으면 맨 정신으로 이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기에. 마침내 레아의 가슴 깊숙이 검이 박혔다. 강렬한 고통과 함께 어느새 레아는 익숙한 장소에 서 있었다. 그녀가 가장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풍경은 그녀가 가장 잊고 싶어 하는 기억의 풍경과 똑같았다. 검은 밤하늘이 울고 있었다. 투명한 눈물이 황궁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레아는 황궁 복도에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방 앞 복도에 서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 쓰러져 있는 검은 복장의 사람들. 그 쓰러진 이들의 한 가운데에 이질적인 복장의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홀로 하얀 로브를 입은 그 사람의 등에 깊숙이 꽂힌 비수로부터 흘러내리는 피가 붉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서 있던 검은 옷의 남자 역시 옆구리에 새겨진 깊은 검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피를 틀어막은 채 욕설을 내뱉고는, 하얀 로브를 걷어찼다. 쓰러져있던 로브의 주인이 살짝 돌아 옆으로 눕게 되었다. 땀과 피에 젖은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초점 잃은 다갈색 눈동자의 여자 얼굴이 반쯤 드러났고, 동시에 그녀가 필사적으로 안고 있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소녀는 자신의 것이 아닌 피로 범벅이 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소녀를 향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를 원망하지 마시길, 황녀님.”

 잠시 동안 쓰게 웃던 남자의 비수가 소녀에게 날아들었다. 그 때 쓰러져있던 여자가 남자의 팔목을 붙잡았다. 남자는 기겁하며 손을 휘저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자가 자신의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남은 힘과 고통스러운 비명을 모두 쥐어짜내며 박혀있던 비수를 뽑아낸 그녀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한 발 빨랐던 쪽은 남자였다. 남자의 비수가, 여자의 가슴에 깊숙이 꽂혔다. 동시에 남자의 왼쪽 눈에 여자의 비수가 박혔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여자를 밀쳤고, 여자는 왈칵 피를 뱉더니 쓰러졌다. 황녀라 불린 소녀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벨라! 벨라!”

 벨라라 불린 여자가 부들부들 팔을 떨며 들어 올려 눈물을 쏟고 있는 황녀의 얼굴을 간신히 어루만졌다.

 “도망......”

 벨라가 미소 지었다. 고통에 휩싸여 일그러져 미소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끝까지 귀찮게 만드는 군, 기사단장!”

 날카롭고 분노에 휩싸인 목소리에 황녀가 고개를 돌리자, 눈에서 비수를 뽑아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 흐르는 피를 막은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황녀에게 비수를 던지려 들어 올린 순간, 뾰족한 쇳덩이가 그의 가슴에서 튀어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가 남자의 등 뒤에서 검을 찔러 넣었다는 얘기였다.

 “황녀님! 괜찮으십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남자의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황녀는 기절했다. 동시에 레아의 시야에서 그 모든 것들이 지워졌다. 레아는 다시금 옅은, 그러나 끝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에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레아는 검을 뽑아 뒤에서 날아드는 검을 맞받아쳤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레아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날 이곳에 가둬둘 셈이지, 여왕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레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대답은 안 해도 어디선가 분명 이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고 있겠지. 어쩌면 한술 더 떠서 깔깔 웃고 있을지도. 무슨 이유 때문에 난쟁이들을 납치하고, 내게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지는 몰라. 하지만 내가 약속하나 하지.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레아가 검을 비틀어 검은 로브, 벨라의 검을 튕겨냈다. 순간적인 반격에 벨라는 검을 놓친 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레아의 검이 벨라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벨라가 살짝 몸을 틀며 허공에 손을 뻗었고,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이 스스로 떠오르며 레아의 등 뒤를 노리고 날아왔다. 레아는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위로 올려치듯 그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은 힘없이 떨어져 내렸고, 레아의 발이 재빠르게 칼날을 짓눌렀다.

 “반드시 죽여주지. 황후와 함께.”

 레아의 검이 붉게 물들어 오르기 시작했다. 레아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벨라의 얼굴을 바로 마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 짙은 다갈색 눈동자. 모든 것이 살아생전의 그녀와 똑같았다. 레아가 애써 웃었다.

 “벨라. 네가 죽은 후로 그렇게 모든 것에 의연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랑 똑같은 환영에 세 번이나 죽었어. 네가 보면 분명히 화를 내겠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레아의 볼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역시 너와 같은 모습의 환영에게 쉽사리 검을 대지는 못하겠지만.”

 순백의 검이 슬프게 울었다. 레아가 양 손에 힘을 주었다.

 “너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겠지. 벨라는 벨라니까. 하나밖에 없던 벨라니까. 진짜 벨라는 죽었으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는 고통에 괴로워하며 레아는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이 휘둘러지기 전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서 있던 벨라는, 목에 검이 닿기 전까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목에 검이 닿던 그때, 레아는 얼핏 벨라의 모습을 한 그 로브가 희미하게 웃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벨라의 얼굴은 몸에서 분리되어 깔끔하게 날아갔다. 그리고 목을 잃은 몸은 피를 뿜지도 않고, 쓰러지지도 않은 채 그저 꼿꼿이 서 있었다. 그리고 레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내 다시 눈을 떴을 때, 레아의 앞에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는 일행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행들의 곁에 낯선 얼굴이 있었다. 은발의 머리카락을 길고 곱게 늘어뜨렸고, 그에 지지 않을 만큼 흰 얼굴에 새빨갛게 점을 찍은 듯 크고 붉은 두 개의 눈동자가 레아가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안녕, 황녀님? 용케 빠져나왔네?”

 레아가 말없이 검을 들어올렸다.

 “헤르키나아아아!”

 비명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레아의 붉은 검기가 헤르키나에게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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