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류영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급히 짐수레 옆으로 바짝 붙어 허리를 숙이고는 이를 악물었다.
녹림이 화살을 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녹림은 일정한 통행세를 받고 상단이나 표국을 통과시켜 준다. 그리고 세금을 거부하는 표국이 있으면 당연히 무력을 행사한다.
그때에도 어지간해서는 화살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표물이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정도의 인명을 죽이기는 하지만 가능하다면 인질로 잡는 것이 녹림의 관례였다. 포로로 잡은 이들 역시 배상금을 받고 넘길 수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아소채는 다짜고짜 화살부터 날렸다.
천류영이 우려한, 모조리 죽여 타(他) 상단이나 표국에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이다.
천류영 옆으로 달라붙은 막내는 바짝 엎드려서 와들와들 떨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십여 쟁자수들은 모두가 근처의 수레 옆에서 화살을 피하며 하얗게 질려 있었다.
“죽여라! 다 죽여 버려라!”
“막아라!”
“끄어어억!”
고함과 비명이 돌산 사이의 협곡에서 쉬지 않고 터졌다.
천류영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양쪽 돌산에서 산적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는 수레 위로 껑충 뛰어올라서 앞과 뒤도 확인했다.
행렬의 전면과 후위 멀리에서도 일렁이는 불빛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사면의 방위가 완벽하게 포위된 것이다.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 같군.”
천류영이 수레에서 내려와 하는 말에 바로 옆에서 떨고 있던 막내가 고개를 들었다.
“형님! 몸을 숙이세요.”
“괜찮아. 화살 공격은 끝났고 칼싸움이 시작됐으니까.”
막내와 그의 곁에 붙어 있던 세 명의 쟁자수가 불신의 눈빛으로 천류영을 올려다보았다.
꼼짝없이 죽게 된 상황인데 천류영의 언행은 놀랍도록 차분했다.
저쪽에서 총표두가 큰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진산 표국의 총표두요. 아소채의 채주께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암담한 상황임을 깨달은 총표두가 급히 산적 두령을 찾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소리는 조소였다.
“크하하하. 변명 따위는 듣지 않겠다. 애들아! 본 채의 무서움을 저놈들이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줘라!”
“와아아아!”
협상을 거절당한 총표두는 이를 갈다가 전후좌우를 빠르게 살폈다. 앞쪽에서 다가오는 횃불의 수가 다른 곳보다 현저히 적은 것을 간파한 그는 표사들에게 급히 명을 내렸다.
“전면을 뚫어라! 포위를 뚫고 빠져나간다.”
“복명!”
쨍쨍쨍, 쩡쩡!
양쪽의 무수한 도검이 충돌하며 시퍼런 불꽃을 허공에 피어올렸다.
횃불이 짐수레 하나에 붙더니 삽시간에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어 냈다. 의복과 천을 실었던 수레인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여러 대의 수레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목숨이 급한 표사들 중 일부가 나름 잔꾀를 낸 것이다.
산적들이 자신들을 쫓지 않고 표물을 구하기 위해 진화 작업에 착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표사들이 우르르 앞으로 몰려갔다.
그에 쟁자수들도 뒤따르려는데 천류영이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앞쪽은 필시 함정일 겁니다.”
그의 말에 일부 표사와 쟁자수들이 멈칫거렸다.
사흘 전 천류영의 말을 따랐다면 이런 불상사는 피할 수 있을 것이란 때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시간은 촉박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방에서 고함과 비명이 난무했다.
총표두를 따라 앞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천류영을 보며 어떤 기대를 가질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한 표사가 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럼 뒤쪽으로 가야 하냐?”
천류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뒤쪽의 횃불은 분명 허세일 것입니다. 하지만 뚫는다고 한들 다음 마을까지 하루가 넘게 걸립니다. 추격에 모두 쓰러지겠지요.”
“그럼 대체 어쩌자는 말이냐?”
천류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멋쩍게 웃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저런 웃음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황당함을 넘어 경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저는 여기 남을 것입니다.”
천류영에게 혹시나 뭔가를 기대했던 일부 표사와 쟁자수들이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대부분이 천류영 때문에 지연된 시간이 아까워 먼저 달려간 동료들의 뒤를 급히 따랐다.
막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천류영의 소매를 잡아 흔들었다.
“형님! 우리도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살고 싶으면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낮지만 힘 있는 천류영의 목소리에 막내는 신기하게도 두려움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평소엔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인상의 그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차분한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막내를 포함한 열 명의 쟁자수들이 천류영 주변에 남았다. 결국 표사들은 모조리 총표두를 따른 것이다.
아마 그건 자존심 문제였을 것이다. 무인인 표사들이 짐꾼의 말을 따르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천류영은 떠나가는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 있다고 살아난다는 보장은 없었고 붙잡는다고 순순히 따를 위인들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천류영은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담담한 기분이 들었다.
더 나아가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며 주변 상황이 해석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샘솟았다.
보통 사람이 어려운 지경에 처하면 머리가 굳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천류영에게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는 쟁자수들에게 말했다.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저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믿고 따라 주시겠습니까?”
쟁자수 열 명이 동시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앞으로 달려갔던 표사들에게서 비명이 잇달아 터졌다.
“하, 함정이다!”
“으아아악!”
전면의 횃불은 적었으나 엎드려 매복하고 있던 산적들은 많았다.
그들이 일시에 일어나 표사들의 길을 막아선 것이다. 표사들은 뒤를 쫓아오는 산적들에게까지 협공당하며 치열하게 칼부림을 했다.
허공을 찢는 고함. 하늘까지 닿는 비명.
지옥이 현세에 강림했다.
천류영을 비롯한 쟁자수들은 앞쪽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곧 그들의 눈동자는 거칠게 흔들렸다.
자신들을 향해 뒤에서 그리고 좌우에서 다가오는 산적들이 지척까지 온 상태였다. 짙은 살기를 흘리며 다가오는 그들은 명부의 저승사자와도 같았다.
보호해 줄 표사도 없는 상황.
몽둥이라도 들고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밥 먹고 하는 짓이 싸움이다. 이길 확률은 전혀 없었다.
쟁자수의 간절한 시선이 한곳에 모아졌다.
천류영.
그가 자신의 앞에 있는 수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왜 이 수레 옆에서 걸었는지 아십니까?”
“……?”
“우리가 먹고 씻는 물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막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천류영의 말을 재촉했다.
“형님!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말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수레의 불을 끄는 겁니다.”
“예?”
막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장 목이 떨어지게 생겼는데 불이나 끄고 있으라고?
천류영이 급하게 외치듯 말했다.
“어서! 최대한 부지런히 움직여 표물의 피해를 줄여야 합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감미롭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주술과도 같았다.
그리고 천류영의 말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쟁자수 모두가 부리나케 움직였다. 수레 위에 놓인 거대한 물통의 꼭지를 열고는 콸콸 흘러내리는 물을 양동이에 담아 가장 근처에서 불타고 있는 수레로 뛰어갔다.
그것을 본 천류영이 외쳤다.
“가까운 곳이 아니라 귀한 것이 있는 수레부터!”
“아! 알았네!”
쟁자수들이 비싼 것이 실려 있는 수레로 방향을 바꿨다.
천류영 역시 큰 사발을 하나 들고는 물을 받았다. 그러고는 이제 바로 앞에까지 다가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산적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
“한바탕 싸움 후에 물 한 잔은 시원해서 좋지요.”
선두의 산적 하나가 기가 차다는 듯이 혀를 내두르다가 이내 눈에 쌍심지를 켰다.
“지금 뭐하는 수작이냐?”
“보시는 대로 녹림의 호걸들께 물 한 잔 대접하고 있습니다.”
“크하하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네놈이 미쳤구나.”
그가 들고 있는 환두대도를 앞으로 쭉 내밀어 천류영의 목을 겨눴다.
그러나 천류영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직 목이 마르지 않으시군요. 그럼 뭐…… 제가 마시지요. 저는 좀 긴장을 했더니 갈증이 나서 말입니다.”
천류영은 들고 있는 사발의 물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시원하게 물을 마시는 그의 모습에 환두대도의 주인이 버럭 성을 냈다.
“건방진 놈! 지금 나를 앞에 두고 무슨 농간을 부리려는 것이야?”
그의 고함에도 천류영은 태연히 물을 마셨다. 오히려 놀라 찔끔한 것은 불을 끄던 쟁자수들이었다.
천류영이 사발의 물을 다 비우고는 시원한 표정으로 그릇을 내리다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높였다.
“불을 안 끄고 뭐하시는 겁니까?”
역시나 감미로운 음성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의 음성이 추상과 같은 불호령으로 들렸다.
거부하면 안 되는, 아니 거부할 수 없는 명(命)!
“아아, 알겠네.”
쟁자수 중 하나가 당황하면서도 곧바로 대답하고는 다시 자신이 맡은 일에 열중했다.
천류영은 불 끄는 쟁자수들을 보다가 시선을 전면의 산적에게로 옮겼다.
“아깝지 않습니까? 이건 녹림의 호걸들께서 획득한 승전품들인데.”
“크크큭. 네놈 간이 큰 건 인정하마. 하지만 너희들이 아무리 아첨을 떨어도 결국 모두 죽는다.”
천류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받았다.
“힘없는 우리들을 모두 다 죽일 생각이십니까?”
“운 없다고 생각해라. 너희들은 우리를 능멸한 본보기로…….”
“살려 주십시오. 우리를 살려야 하는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천류영의 물음에 산적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의 산적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자신들이 이 짐꾼들을 살려야 하는가?
“너희들을 살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산적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한 가지도 아니고 네 가지 이유나 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이는 건 당연지사.
천류영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채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음…….”
산적은 뻗었던 환두대도를 회수하며 미간을 접었다.
그의 바로 뒤에 있던 초로인이 앞으로 나서서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다행입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제가 너무 재미없다고 하던데…….”
초로인이 ‘허어!’하는 묘한 의미의 탄성을 흘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 것이 안쓰럽구나. 하지만 채주님의 뜻은 진산 표국의 이번 표행에 참가한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다.”
“죽이는 건 쉽습니다. 더구나 저희 같이 힘없는 짐꾼들을 죽이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 칼자루를 쥔 것은 여러분이고, 저희들은 칼끝에 목이 놓인 상황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뭐가 두려워 제가 채주님께 네 가지 이유를 말씀드릴 잠깐의 시간조차 허락할 수 없단 말입니까?”
초로인과 환두대도의 장년인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확실히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살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수레의 불을 끄는 것은 자신들이 맡은 일이었다. 그것을 쟁자수들이 뼈 빠지게 뛰며 하고 있는 것이 밉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앞에 있는 청년의 말에 그들은 빠져들고 있었다.
환두대도의 장년인이 초로인에게 말했다.
“부두령, 어떻게 할까요?”
부두령이라 불린 초로인이 자신의 귓불을 만지며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저 앞쪽에서 벌어지는 전황을 보며 대꾸했다.
“싸움도 슬슬 끝나 가는 것 같으니 곧 채주님께서 오실 거다. 이놈들 목숨을 그때까지 연장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겠지.”
“예. 그리고 그 네 가지 이유라는 것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래. 분명히 나도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싶긴 하군.”
부두령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천류영을 직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어설픈 말장난이라면 사지를 찢어 고통 속에서 죽게 해 주마.”
소름이 끼치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천류영은 넉살 좋게 말을 받았다.
“당연하지요.”
“허어!”
부두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의 나이 오십둘. 산전수전 겪으며 숱한 사람들을 보아 왔지만 이런 녀석은 처음이었다.
“그래, 기대하마. 채주께서 과연 네 말을 듣고 수긍하실지 나조차 기대가 될 정도이니. 그러나 얼토당토않은 말로 우리를 기만한 것이라면 너는…….”
“사지가 찢겨져 고통 속에서 죽게 되겠지요.”
“그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산적들은 오도카니 서서 천류영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발에 땀이 나도록 뛰고 있는 열 명의 쟁자수들도 흘낏흘낏 천류영을 주시했다.
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산적들의 관심사에서 점차 멀어졌다.
물론 그건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했다. 무조건 이긴다는.
그들의 두령에 대한 충성심과 기대는 확고부동했다.
대륙의 변방에 있으면서도 녹림십팔채의 하나가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마침내 고함과 비명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붙었던 수레들의 불도 잡혔다. 의복이 있어 워낙 거세게 타올랐던 수레만 제외하고는.
물론 그 수레도 쟁자수들이 불을 끄려고 했지만 천류영이 제지했다.
“어차피 그 수레는 늦었습니다. 그렇다면 기왕지사 주변을 밝히는 것으로 두면 운치 있고 좋지 않겠습니까?”
막내가 산적들의 눈치를 보자 천류영이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바람도 쌀쌀한데 저 주변에서 몸이나 녹이자.”
산적들 중 일부는 천류영의 배포에 감탄하다 못해 질린 표정까지 지었다.
잠시 후, 아소채의 두령이 피를 뒤집어쓴 채로 어둠 속에서 등장했다.
그의 우악스러운 손에는 두 눈을 부릅뜬 채 횡사한 총표두의 수급이 잡혀 있었다.
그 광경이 어찌나 섬뜩한지 쟁자수 중 한 명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덜덜 떨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