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패왕의 별
작가 : 강호풍
작품등록일 : 2016.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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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화
작성일 : 16-08-18     조회 : 853     추천 : 0     분량 : 6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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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검봉(劒鳳) 독고설, 그녀의 실수

 

 1

 

 

 

 하늘을 보며 걷던 천류영이 일행들과 꽤 거리를 벌리자 멈춰 서서는 한 손을 들어 패왕의 별을 가리켰다.

 “강호에 사는 많은 이들은 저 별을 보며 기원한다지요? 자신이 패왕의 별이기를. 그게 안 되면 패왕성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나눠 달라고.”

 광혈창은 천류영의 시선을 쫓아 물끄러미 별을 보다가 말했다.

 “살려 주마.”

 “…….”

 “네가 말한 두 가지 이유는 모두 타당했다. 또한, 세 번째 이유는 잠깐이나마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천류영이 고개를 내려 광혈창을 보며 미소 지었다.

 둘은 어느새 적이 아닌 묘한 관계로 발전해 있었다.

 “녹림십팔채 총표파자의 자리는 결국 전임 총표파자의 지목이 첫 번째요, 두 번째는 십팔채 채주들의 다수결로 결정됩니다.”

 “후후후. 표국 생활을 제법 오래한 모양이구나. 강호 견식이 제법…… 아니지, 그 정도는 누구라도 아는 건가?”

 “우리 쟁자수들을 살려 보내면 세상은 아소채에 주목을 하게 될 겁니다. 잔인함과 자비를 동시에 갖춘 인물이라 채주님을 평가하겠지요.”

 “…….”

 “그건 녹림십팔채의 다른 채주들도 마찬가지일 터이고, 총표파자님도 그럴 겁니다. 채주님께서는 제가 첫 번째로 말한 이유를 들어 그런 판단을 스스로 내렸다고 총표파자님과 다른 채주들에게 연통을 넣으십시오.”

 광혈창이 손사래를 치며 무뚝뚝하게 말을 받았다.

 “녹림의 수좌 자리 얘기라면 되었다. 불가능한 얘기야. 나는 두 형님에 비해 전력이 훨씬 부족해. 또한, 우리의 위치는 가장 변방이지.”

 “예, 그렇기에 채주님을 그 누구도 견제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광혈창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녹림십팔채에 채주님의, 채주님만이 할 수 있는 얘기를 하십시오. 지금의 녹림십팔채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

 “방주채와 수한채가 지금처럼 경쟁하면 누가 후임 총표파자가 되더라도 후유증이 커질 것이고, 잘못하면 녹림이 두 쪽이 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십시오. 그러면서 간곡하게 두 의형께 서로 포용하라고 얘기하십시오. 아무도 경계하지 않는 아소채이기에 진심이 먹혀들 것입니다. 아소채의 약점이, 아소채만이 가질 수 있는 강점이 될 터!”

 광혈창의 눈동자가 해일을 만난 듯 거칠게 흔들렸다.

 그의 눈가와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천류영은 담담하게 그리고 대범하게 말을 계속했다.

 “총표파자님과 많은 채주님들이 바로 채주님을 주목하게 될 겁니다. 녹림을 둘로 갈라내지 않고,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분열이 아닌, 조화를 주장하십시오. 그러면서 스스로 몸을 낮춰 다른 채주들을 받드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 기회를 지금부터 준비해, 놓치지 마십시오.”

 광혈창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자제하려고 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천류영은 그런 광혈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진정되는 기미를 보고는 말했다.

 “일각이 됐습니다, 가시지요.”

 광혈창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몇 걸음을 먼저 떼었던 천류영이 멈춰 돌아보았다.

 “안 가실 겁니까?”

 “네 이름도 묻지 못했구나.”

 “보잘 것 없는 무명소졸(無名小卒)일 뿐입니다.”

 “말하라.”

 류영이 싱긋 웃었다.

 “제 이름은 천류영. 바로 저를 살려야 하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이지요. 훗날 제가 광혈창 채주님과 입장이 바뀌었을 때, 반드시 한 번은 살려 드린다는 약조를 드리지요. 저를, 제 이름을 잊지 마십시오.”

 광혈창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리고 이내 아까보다 훨씬 큰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크하하핫! 걸물이로다! 내 평생 너 같은 인간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크하하하!”

 폭풍 같은 웃음을 터트린 광혈창이 갑자기 정색하고는 천류영에게 다가가 어깨를 힘껏 잡았다.

 “절대로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나도 약속 한 가지를 해 주마. 만약 내가 녹림의 대권을 잡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네가 원하는 부탁 하나를 반드시 들어주겠다.”

 천류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만 머금었다.

 이때 둘은 짐작도 못했다. 둘의 인연이 나중에 어떻게 얽히게 될지 말이다.

 

 ***

 

 서른이 되지 않은 정파무림(正派武林)의 후기지수 중 유명한 사람들을 엮어 일컫는 말이 세 개 있다.

 오룡삼봉(五龍三鳳)!

 걸출한 무공실력과 지략을 뽐내는, 문무를 겸비한 다섯 명의 사내와 세 명의 여인.

 무림오화(武林五花)!

 정파무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섯 명의 처녀.

 강호십이월(江湖十二月).

 구파일방을 제외한 사람들 중, 무공에 미친 열두 명의 미남미녀 청춘들.

 이 세 곳 모두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려놓은 한 인물이 있다. 독고세가의 영애, 독고설.

 오룡삼봉의 검봉(劒鳳).

 무림오화의 청화(靑花).

 강호십이월의 편월(片月).

 검봉, 청화, 편월이란 무려 세 개의 별호를 가지고 있는 독고설.

 그녀는 지금 남장을 한 채로, 나무 한 그루 없는 동산 위에서 서쪽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바람이 잠들어 버린 늦은 오후의 초원.

 들판의 풀잎도, 하늘 위에 점점이 놓인 구름도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 멀리 산등성이들이 파도처럼 물결치며 몇 겹씩 반복되었다가 흩어지는 모습은 장관이어서 보는 독고설의 가슴을 탁 트이게 했다.

 “곧 마교 놈들과 붙게 된다 이거지.”

 그녀의 음성은 자못 떨렸다.

 비적이나 사파의 작은 문파와 소규모의 전투를 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천지경동할 마인들이 있다는 마교와의 대규모 싸움은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저 멀리 보이는 산 너머에 무림맹 사천 분타가 있었다.

 지난 백 년간 열두 차례의 마교를 포함한 새외 변황의 공격을 막아 낸 무적의 무림맹 분타.

 이제 내일 낮에 자신은 무림맹 총타의 현무단 오(五)조장의 신분으로 사천 분타에 들어가, 사흘 뒤 당도할 예정인 마교도와 한판 싸움을 벌일 터였다.

 그녀는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돌아섰다.

 서쪽의 풍경은 수많은 전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곳, 사천 땅의 중심인 성도(成道)였다.

 예전 삼국시대 때 촉나라를 세웠던 유비가 수도로 삼았던 곳. 그녀가 오늘 밤 잠을 청해야 할 장소이기도 했다.

 그녀는 목을 한 번 빙 돌려 몸을 풀고는 하산했다. 때마침 언덕을 오르던 일남일녀의 연인이 남장을 한 그녀를 보고는 눈을 치켜떴다.

 보기 드문 절세의 미남자가 아닌가?

 여인의 눈은 몽롱해졌고, 사내는 질투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

 

 왁자지껄한 객잔의 삼층.

 천류영은 우울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칸막이로 입구만 빼고 사방이 막혀 있는지라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자리였다.

 원탁을 따라 죽 둘러앉은 열 명의 쟁자수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천류영을 바라보았다.

 원탁엔 평소에는 비싸서 손대기 어려운 고급 음식들이 즐비했고, 각자 앞에는 잔마다 술이 가득 담겼다.

 평소라면 눈에 불을 켜고 음식에 달려들어야 정상이건만 모두가 젓가락조차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쟁자수 중 가장 연장자인 파호 영감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천류영을 향해 말했다.

 “국주가 미친 게야. 자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잘라, 자르긴! 모든 원흉은 죽은 총표두 그 인간이지.”

 막내가 주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파호 할아버지. 목소리가 너무 커요. 여기에 표국 사람들이 있으면 어쩌려고.”

 일부러 표국에서 멀리 떨어진 객잔, 게다가 자릿값이 나가는 칸막이 내실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법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파호 영감은 여전히 성난 얼굴로 말했다.

 “젠장.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기껏 살아 돌아오니 웬 역적 취급이냔 말이야? 그리고 류영이는 우리를 살린 죄밖에 없는데……. 왜 모든 죄를 류영이가 덤터기 쓰고 잘려야 하냔 말이야. 나쁜 놈들.”

 그 옆의 중년인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말을 받았다.

 “산 입에 거미줄 칠 수 없으니, 그만둘 수도 없고……. 사는 게 죄지, 사는 게 죄야.”

 막내도 맞장구를 쳤다.

 “그런 것 같아요. 아니, 사는 게 죄가 아니라 돈 없고 힘없는 게 죄일지도 모르죠. 아니면 부유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지 못한 게 죄일지도 모르고요.”

 말하던 막내가 풀이 죽어 눈물을 글썽이다가 결국 소매를 들어 눈을 쓱쓱 문질렀다.

 객잔의 다른 자리는 모두 웃고 떠들고 있을진대, 이들의 원탁은 잿빛 우울함만 가득했다.

 천류영이 앞에 놓인 술잔을 쥐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나저나 무리들 하신 것 아닙니까? 평생 못 먹을 진귀한 음식들을 이렇게나 많이 시키다니요.”

 파호 영감이 손사래를 쳤다.

 “각자 사정 한도 내에서 조금씩 각출한 것뿐이니 괘념치 말고 마음껏 먹게. 생명의 은인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게 고작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네. 정말로…… 미안하네.”

 파호 영감은 가슴이 북받치는지 눈시울을 붉혔다.

 천류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의 처지도 막막했지만, 이 사람들의 생계도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앞으로 반년간 원래 받던 품삯의 절반만 받고 일을 해야 했다.

 가슴이 찡하고 아팠다.

 가난이란 굴레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하지만 천류영은 그래서 더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간에 적어도 자신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자신을 포기하고 하찮게 여기는 건…… 그건 너무 슬프고 잔인한 형극(荊棘)이었다.

 천류영은 젓가락을 들어 여러 음식 중 녹두활어(綠豆活魚)를 집어 맛봤다.

 “야아! 이거 아주 맛있는데요? 어서 드셔 보세요, 막내 너도 먹고.”

 그가 활기차게 말하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음식을 먹고, 억지로 미소를 머금으며 건배를 했다.

 “헤헤, 돼지고기 볶음이 좀 매운 거 아니에요?”

 “인석아. 여기가 어디냐? 사천성 하면 매운 음식인 거 몰라? 하여간 토박이 아닌 것들이 괜한 음식 타박을 해. 하하하!”

 “헤헤, 알면서도 잘 적응이 안 돼서 그렇죠.”

 “류영아, 한잔 받아라. 허허허!”

 “할아범! 저도 주시오. 후후후.”

 그렇게 모두들 웃으며, 또 웃고, 웃다가 안 되면 쥐어짜 내서라도 웃으며 음식을 먹었다.

 대화를 나누고 잔을 부딪치고 술을 비웠다.

 그러다 막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못 웃겠어요, 흑흑.”

 사람들의 웃음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그쳤다.

 막내가 이를 악물며 흐느꼈다.

 “흑흑, 죄송해요. 너무 억울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온 것도 죄가 되는 건가요?”

 “…….”

 “그래도 하늘이 점지해서 태어난 거잖아요. 그런데 왜…… 제가 대체 뭘 잘못한 거죠? 태어나서 지금까지 죽어라 일만 했을 뿐인데…… 왜 입에 풀칠하는 것도 이렇게 벅찬 거죠? 그리고 왜 무시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죠? 잘난 사람들한테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다고.”

 천류영도 파호 영감도 그렇게 모두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들었다.

 열한 명이나 모인 원탁에서 모두 울 수는 없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막내를 따라 울면 객잔이 터져 나가라 통곡이 터질 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 속으로 오열하며 묵묵히 술잔을 들었고 술을 마셨다.

 일다경 쯤 흐르자 막내가 한숨을 크게 푹 내쉬고는 씩 웃었다.

 “차라리 한바탕 우니까 훨씬 낫네요.”

 파호 영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나도 속으로 한참 울었더니 속이 다 후련하구나. 허허허.”

 “헤헤헤.”

 “하하하!”

 사람들이 다시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가난, 아픔, 고통, 슬픔, 회한을 울고 웃으며 가슴에 묻는 것이다.

 “와아! 나 그때 류영이 형님 보고 질겁했다니까요. 표사들도 안색이 하얗게 질렸는데 류영이 형님은 평소보다 더 침착한 거 있죠?”

 “그래, 나도 봤다. 화살비가 쏟아지고 사방에서 산적들이 몰려오는데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다니. 나는 산적들보다 정작 류영이의 얼굴이 더 소름끼치더라고.”

 “캬아! 그뿐입니까? 산적이 칼을 겨누는데 웃으며 물 마실 때는 어떻고요. 그대로 목이 날아가는 줄 알고 제 심장이 벌렁벌렁했다니까요.”

 “인마, 그건 장난이지. 피를 뒤집어쓴 광혈창이 총표두 수급을 팽개치고 서슬 퍼런 기세로 다가올 때는 오금이 저리더라고. 이젠 죽었구나 싶었지. 그런데 류영이가 웃으며 그를 맞이할 때는…… 이야! 진짜 감탄했다.”

 “감탄이 아니라 나는 질려서 하마터면 오줌보 터질 뻔했다.”

 “하하하!”

 각자 그때 느꼈던 감정을 술기운을 빌어 쏟아 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얘기를 누군가가 귀를 쫑긋 세우고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검봉(劒鳳) 독고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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