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전쟁의 서막이 오르다
1
사천성 성도에서 반나절 거리에 위치한 무림맹 사천 분타.
지난 백 년간 중원 진입을 노리는 새외 변방 무림으로부터 열두 차례 침공을 받았으나 단 한 번도 점령되지 않았던, 그래서 사람들이 무적의 무림맹 분타라고 부르는 철옹성.
너른 평야의 한가운데 급격한 경사를 이루는 언덕이 있고, 그 위로 칠 척 높이의 담벼락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웅장한 요새.
지금 이곳은 묘한 긴장감 속에 잠들어 있었다.
마교의 소교주가 이끄는 이천의 대부대가 높고 험준한 파안객랍산(巴顔喀拉山)을 마침내 넘어서 석거(石渠)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낮에 당도했다.
그들이 이곳까지 오려면 어림잡아 사흘의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사천 분타주는 수하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명했다.
물론 빨리 오면 이틀 내로도 가능하겠지만 그래서야 지쳐서 싸우지를 못할 터.
한편 당장 내일 오후에는 남쪽에서 아미파가, 지척인 성도에서 독고세가, 곤륜파, 무림맹의 현무단이 지원군으로 도착할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이틀 뒤 오전에는 정파와 사파의 중립을 표방하던 당문세가(唐門世家)도 전격적으로 합류하겠다는 통보가 저녁에 날아들어 사기가 충천해졌다.
분타주인 절정의 노(老)고수, 철혈(鐵血) 맹천후는 휴식을 명하는 와중에도 외담에서 번을 서는 사람들을 두 배로 늘리고 철통같은 경계를 주문했다.
사나흘 뒤의 전투를 위해 휴식은 취하되 군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거대한 요새인 사천 분타의 한복판.
흐릿한 초승달이 교교한 빛을 뿌리다 구름에 갇히기를 반복하는 아래로, 사천 분타의 무사들이 식사를 하는 건물 뒤의 땅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푹!
스스스슷!
검고 길쭉한 몽둥이 같은 그것은 땅거죽을 조용히 까뒤집으며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몽둥이가 지나간 땅이 아래로 허물어지며 시커먼 동공(洞空)을 드러냈다.
그 캄캄한 굴속에서 한 인영이 땅 위로 올라섰다.
그는 갑갑했다는 표정으로 옷과 머리카락의 흙을 털어 냈다. 그 뒤로 속속 올라오는 인영들.
“오셨습니까?”
땅굴에서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을 향해, 건물 뒤 그림자 속에 서 있던 이가 다가와 부복했다.
그 뒤로 원래 이곳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한 무사가 목이 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사실 이곳은 번을 서는 곳이 아닌데, 분타주의 경계강화령으로 인해 죽게 된 이였다.
최초로 땅굴에서 나온 이가 흐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삼 년만이군.”
젊은 목소리.
부드러우면서도 속에 숨어 있는 강철같은 단단함이 물씬 묻어나는 음성.
“대주께서 오시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빌어먹을 정파 놈들 틈바구니 속에서 버텼습니다.”
“고생했다. 자네라면 잘 해낼 줄 알았어.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지.”
그의 격려에 부복한 중년인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졌다.
중년 사내는 대주의 명을 받고 삼 년 전 사천 분타의 주방 보조로 잠입한 인물이었다.
밤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무려 이십 리에 달하는 땅굴을 완성한 주인공.
“대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 아깝겠습니까?”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하자. 네 공이 컸음을 잊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중년인은 고개를 들어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젊은 대주를 보았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게 하는 사내.
그가 바로 자신의 주인이었다.
비록 그의 나이 스물아홉으로 젊었으나 천하에서 가장 많은 화제를 몰고 다니는 사나이.
마교 교주의 직속 단체이자, 현(現) 마교 최강의 부대라고 불리는 천랑대(天郞隊)를 이끄는 수장.
천마검(天魔劒) 백운회(白雲灰).
마교 불세출의 영웅이었던 천마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남겼다는 천마동(天魔洞)에 불과 열다섯 살에 자진해서 들어간 남자.
무려 오백 년 동안, 마교의 날고 긴다 하는 숱한 고수들이 도전했지만 모두 시신이 되어 버린 천마동에서 삼 년 만에 걸어 나온 살아 있는 전설.
지난 십 년간, 마교 교주인 뇌황(雷皇)과 새외 무림을 돌며 사상 처음으로 변황을 통일해 흑천련(黑天聯)이란 조직을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
그는 수많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으며, 전투에서는 늘 앞장서 불패의 전적을 기록했다.
자신의 공까지 수하들에게 돌리고 스스로는 한빈하게 지냈다.
그를 가리켜 흑도의 사람들은 마협(魔俠)이라고도 불렀다.
그를 본 숱한 여인들은 준수하면서도 사내답게 생긴 반듯한 외모에 상사병을 앓았다.
그가 꾸미는 책략은 귀신같고, 부리는 칼은 세상을 떨게 했다. 그 어떤 찬사의 수식어로도 모자란다고 찬양받는 사내.
오죽하면 일부 정파인들조차 천마검 백운회야말로 패왕의 별일지도 모른다고 얘기를 했을까?
백운회는 고개를 들어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하늘을 보았다.
유달리 구름이 많은 하늘.
“아쉽군.”
그는 입맛을 다셨다.
본격적인 대륙 정벌을 시작하는 이 밤, 패왕의 별이 보였으면 좋았으련만.
뒷짐을 쥔 채 오연히 하늘을 보는 그에게 땅굴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사내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천랑 대주. 모두 올라왔습니다.”
흑랑대주 초지명이다. 용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마흔 살의 중년인.
백운회는 자신 주변으로 모인 흑의인들을 가볍게 훑었다.
총 서른 명.
무림맹 사천 분타에 있는 무사들의 숫자는 칠백.
그러나 서른 흑의인들의 눈빛은 여유로움이 넘쳤다.
백운회를 시작으로 흑랑대주 초지명, 마교 장로 흑귀도, 냉혈쌍절이라 불리는 냉절과 혈절 등등 모두가 절정의 고수였다.
물론 그들만으로 사천 분타를 점령한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 사천 분타는 정예 중 정예만 모인 곳이니까.
하지만 안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외부에서 침공을 받는다면?
백운회가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순간, 한줄기 달빛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가 잠깐 그를 비추고 사라졌다.
육 척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굵은 검미 아래 커다란 눈과 그 두 눈 사이로 태산같이 우뚝 솟은 콧날.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 사이로 얼핏 보이는 하얀 이와 각진 턱 선.
완벽한 무인상이 있다면 이러할까?
그의 오른쪽 뺨에, 눈 바로 밑에서 턱까지 가로지르는 깊은 검상은 그의 준수한 얼굴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차가운 매력을 더했다.
모두가 백운회를 주시했다.
그보다 지위가 높은 장로들도 있었지만 무림맹 사천 분타의 점령 계획을 입안한 것은 백운회였고, 또한, 이번 작전의 지휘관도 그였다.
금적금왕(擒賊擒王)의 계(計)!
적을 잡으려면 먼저 왕을 잡으라는 뜻이다.
‘활로 사람을 쏘려거든 먼저 그의 말을 쏘고, 적을 잡으려거든 임금을 먼저 잡으라.’는 두보(杜甫)의 시(詩)에 나오는 것으로, 병법 삼십육계 중 열여덟 번째 책략.
이번 싸움의 핵심인 사천 분타를 제거하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을 정파는 구심점을 잃고 각개격파 될 것이다.
사천 분타는 말이고 임금인 격이다.
지금 정파인들은 그 누구도 이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사흘 뒤에 도착할 예정인 마교의 소교주에게 정신이 온통 팔려 있으니까.
백운회가 나직하게 그러나 이글거리는 열기가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이곳의 구조와 각자 해야 할 일은 이미 숙지하셨을 터이니 무슨 잔소리가 필요하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어줍지 않게 무적이란 이름을 붙인 이곳을 깨부수고 진정한 무적이 무엇인지 세상에 알려 줍시다.”
모두가 소리 없이 웃었다.
흔들리는 어깨 위로 광오한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백운회는 아직도 부복하고 있는 중년인에게 말했다.
“일각 뒤, 불화살을 공중으로 쏘아 올려라.”
밖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천랑대와 흑랑대, 그리고 흑천련의 정예 일천삼백 명이 돌격할 신호였다.
“존명!”
“자, 그럼 이곳의 수뇌부와 간부들 사냥을 시작해 볼까요?”
명령을 내릴 자들을 해치워 혼란을 극대화시키려는 심산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른 명의 사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절정의 경지답게 일체의 기운과 소리도 내지 않는 그들의 움직임은 바람처럼 가볍고 맹수처럼 날렵했다.
백운회의 시선이 이곳에서 가장 높은 칠층 전각으로 향했다.
사천 분타주 철혈 맹천후가 있는 곳.
백운회는 마치 산보를 가는 것 마냥 앞으로 걸었다.
씨익.
입가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미소.
전각 하나를 돌자 화톳불 앞에서 번을 서던 두 명의 사내가 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교대 시간이 아닌데…….
파팟!
둘은 까만 허공에서 빛나는 은빛을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어느 틈에 자신의 목에 박혀 있는 비수.
그들은 비명도 못 지르고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백운회는 맹천후가 자고 있을 전각까지 가며 세 곳의 경계소를 무력화시켰다.
제대로 된 경계는 대부분 외담에 몰려 있는지라 내부의 경계는 아무래도 허술했다.
아니, 설사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백운회가 뿌리는 죽음의 마수를 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느새 백운회는 칠층 전각의 앞에 다다랐다.
아무래도 분타주가 머무는 곳이라 그런지 번을 서는 이들이 다섯이나 있었다.
백운회는 허리춤의 비수를 만지작거리다 입맛을 다셨다.
“남은 비수가 두 개라. 뭐, 상관없지.”
휘이이익-.
백운회는 낮은 휘파람을 불며 거침없이 앞으로 걸었다. 그를 본 다섯 명의 선위 무사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봐. 저 사람 누구지?”
“글세……. 오늘 당직을 서는 간부님이 순찰을 도시는 건가?”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 같아서…….”
“왜 재수 없게 한밤중에 휘파람을 부는 거야?”
다섯이 의아한 시선으로 다가오는 백운회를 바라보다가 그중 한 명이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멈추고 소속과 지위를 말하라!”
삼 장이 조금 넘는 거리.
백운회는 발을 멈추고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하지만 쌀쌀한 바람은 계속 불어 그의 머리카락을 다시 풀어 내렸다.
“일각이 거의 다됐겠군. 이때까지 아무 소란이 없는 것을 보니 다들 노련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
“내가 누군지 물었나?”
“그렇습니다, 누구십니까?”
백운회의 자연스러운 하대에 선위 무사는 어깨를 움츠리며 존대로 물었다.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두워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보는 분위기의 남자였다.
하지만 외부 경계가 철통같은 이 안으로 외부인이 들어올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건 천하제일 살수라고 해도 불가능하리라.
“물어봤으니 답해 주는 게 예의겠지. 나는 너희들이 마교라고 부르는, 천마신교의 천랑대 대주, 천마검 백운회다.”
“…….”
반응이 없었다.
믿기지 않으니 당연한 것이다. 다섯 중 둘은 농담이라 생각하고 키득거리며 낮게 웃었다.
백운회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파팟.
두 개의 비수가 날았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쓰러지는 두 명.
그제야 두 명이 놀라 고함을 쳤다.
“저, 적이다!”
“침입자다!”
남은 다른 한 명은 비상종을 치기 위해 부리나케 움직였다.
순간 백운회가 발을 뗐다.
파라라랏.
그의 흑의가 바람을 일으키며 펄럭거렸다.
소리도 없이 등 뒤에서 빠져나온 은빛 검신.
슈가가각!
두 선위 무사는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백운회를 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빠른 보법과 쾌검이 존재하다니!
두 사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것을 본 유일한 생존자가 기겁하며 비상종의 줄을 잡고 덜덜 떨었다.
백운회가 말했다.
“어서 당기지 않고 뭐하지?”
“…….”
“그대가 타종을 해야 내부에 혼란이 일어나잖아.”
“사, 살려 주십시오.”
백운회가 혀를 차며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발을 살짝 굴렀다.
단숨에 이 장의 허공을 격하고 일층 지붕 위로 올라간 백운회.
그는 다시 발을 차며 공중제비를 돌아 이층, 삼층, 사층의 지붕 위로 올라섰다. 표범과도 같은 날렵한 몸놀림.
뎅뎅뎅뎅뎅!
긴급 사태를 알리는 타종 소리가 울렸다.
그사이에 백운회는 목적지인 육층 지붕 위에 올라가 가운데 있는 창으로 걸었다.
콰직!
그의 발길질에 창문이 부셔졌다.
그러자 아직 어둠 속 침상에서 누워 있다가 막 일어나려는 한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웬 놈이냐!”
뎅뎅뎅뎅뎅.
여전히 타종 소리는 시끄럽게 울렸다. 많은 전각의 창 곳곳에서 불이 켜졌다.
백운회는 침상 위에서 급히 벽의 검좌대로 몸을 날려 검을 잡아채는 노인을 유심히 보고 웃었다.
“후후후. 철혈 분타주가 맞군. 독수공방이라…… 잘됐소. 나는 힘없는 여인은 죽이지 않거든.”
그는 창가에 한 발을 올려 걸터앉아서는 말을 이었다.
“시원한 밤이오. 안 그렇소? 아쉬운 건 구름이 많아 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
차앙!
맹천후가 검을 빼어 들고는 다시 외쳤다.
“누구냐고 물었다!”
백운회는 무심한 얼굴로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화살 하나가 먹물 같은 허공을 향해 치솟았다.
밖의 경계 무사들이 타종 소리로 안으로 몰려들 시점, 이제 대기하고 있는 수하들이 달려올 것이다.
“나는 천마검 백운회요.”
“……!”
“북망산천 가는 길, 추울 테니 제대로 옷을 입으시오. 정사무림을 떠나 어쨌거나 무림에서 많은 업적을 세운 선배이니 그만한 대접이야 해 드리리다. 실력이 궁금하기도 하고.”
철혈 분타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 어떻게 네가 여기에? 말도 안 돼!”
충격을 받은 철혈의 목소리가 떨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천마검 백운회가 자신의 방 안에 들어오다니. 대체 밖의 것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백운회는 계속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지치지도 않고 쓸어 넘기며 대꾸했다.
“설명하려면 깁니다. 내가 그 정도 시간까지 양보할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오. 그래도 궁금하면 염라대왕에게 묻고.”
“…….”
“옷, 안 입을 거요? 그래도 명색이 무림맹 사천 분타주인데 벌거숭이로 죽어서야 체면이 좀 그렇지 않겠소?”
창밖을 구경하며 말하던 백운회가 다시 철혈 맹천후를 보며 싱긋 웃었다.
맹천후는 고민하다가 볼썽사납게 맨몸으로 싸우는 것은 영 내키지 않는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백운회를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상황이 이런데도 분타주를 찾는 수하들은 아직 없었다.
필시 타종을 친 사람을 찾아 그 이유를 묻고 있을 터였다.
아마 반 각의 시간 정도 여유가 있겠지.
백운회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보였다.
일천삼백의 수하들이 노도와 같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후후후. 이곳을 시작으로 내일이 가기 전에 아미파, 독고세가, 곤륜파, 현무단 모조리 쓸어 주마.”
그의 눈이 하늘로 향하다가 반짝 이채를 흘렸다.
구름 사이로 하나의 별이 찬란한 붉은빛을 발했다.
“나왔는가? 지켜보라, 나의 행보를! 결코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욕을 한바가지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마검 백운회라면 다르다.
그는…… 그럴 만한 인물이었다. 또한, 계획도 완벽했고 추진할 힘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길고 긴 인생사에 의외의 일이 곳곳에서 터지듯이, 전쟁에서도 변수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처럼 수시로 존재한다.
백운회는, 아니,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천류영이란 평범한 인물이 이 싸움에 끼어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의 합류가 무림 사상 가장 크고 치열했다는 대격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더더욱 몰랐다.
천하를 피로 물들일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
독고설은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폭음으로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가슴이 이상하게 얼얼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천근만근 내리누르는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렸다.
어둑어둑한 허공.
실눈을 뜬 독고설은 살짝 머리를 흔들다가 얼음이 되었다.
자신의 등에 닿아 있는 포근한 감촉의 그 무엇.
그리고 가슴에 얹혀 있는, 누군가의 손으로 추정되는 이상한 어떤 것.
독고설의 눈이 삽시간에 활짝 떠졌다.
그러나 이내 피식 웃으며 혀를 날름거렸다.
‘꿈이구나.’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조물락조물락.
손으로 추정했던 그 무엇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
그녀는 한순간에 입안의 침이 바짝 마르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얼마나 놀랐던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대번에 사라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독고설은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슴에 얹혀 있었던 누군가의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투박한 것이 험한 일을 한 사내의 손.
“으아아악! 말도…… 안 돼!!”
독고설은 나직하게 비명을 지르며 침상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도 눈이 부신 그녀의 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무림오화 중 청화라고 불리는 그녀의 아름다움.
청초한 한 떨기 꽃도 그녀의 자태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리라.
독고설은 침상 주변에 제멋대로 던져져 있는 자신의 옷가지를 보고 곧바로 시선을 침상으로 던졌다.
“이이…… 금수만도 못한 개자식!”
천류영이다.
그 인간이 입에 침을 흘리며 세상 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다.
드르렁. 퓨우우우.
드르렁. 퓨우우우.
상의만 벗고 하의는 입은 채로 낮게 코를 고는 천류영.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은밀한 비소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다행히 어떤 느낌이나 통증은 없었다.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놈도 만취해서 자빠져 잠만 잤던 것이다.
옷은 자신이 자다가 무의식중에 벗은 것이리라.
하지만 놈의 의식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녀는 전신을 태울 것 같은 분노에 휩싸였다.
그녀의 눈이 사방을 훑었다. 그녀의 검이 작은 원형의 다탁(茶卓)에 기대 있었다.
창!
그녀는 지체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침상 위로 올라가 천류영의 가슴을 겨눴다.
하얀 검신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마침내 검의 끄트머리인 검첨이 천류영의 심장 위 가슴 지척까지 도달했다.
부르르르.
그녀의 손이, 칼이 떨렸다.
처녀로서 생명과도 같은 정절을 농락당했다.
그러나 과연 이 사람을 자신이 단죄할 수 있는 것인가? 이자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가?